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의 어시스턴트인 앤디가 무심코 이딴 거(stuff)라는 표현을 하자 미란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넌 그냥 네 옷장으로 가서 그 미련스러운 파란색 스웨터를 골라 들었겠지. 옷 따위에 신경 쓸 틈 없는 진지한 인간이라는 걸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네가 모르는 사실은, 그 파란색이 그냥 파란색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파란색 중에서도 터쿼즈(Turquoise)색이 아니라 정확히는 세룰리언(Cerulean)색이지. 2002년에 오스카 데 라 렌타가 셀룰리언 색 이브닝 가운을 발표했고, 다음에는 이브 생로랑이 셀룰리언 색 군용 재킷을 선보였지. 그러자 셀룰리언 색은 급속하게 퍼져나가 8명의 다른 컬렉션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백화점을 거쳐서 네가 옷을 사는 그 끔찍한 캐주얼 코너로 넘어가게 된 거지.
네가 입고 있는 그 파란색은 셀 수 없이 많은 일자리와 수백만 달러의 재화를 창출했어.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너는 여기 패션계의 사람들이 골라준 색깔의 스웨터를 입고 있는 거야.
아마도 이 영화의 작가는 우리의 삶이(그리고 패션이) 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 뒤섞인 원인과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미란다의 카리스마도 함께 말이죠)
뒤죽박죽 얽힌 국제 뉴스 속 이야기들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상파든 종편이든 이제 9시 뉴스와 8시 뉴스의 몇 꼭지는 국제 뉴스로 채워집니다. 우리는 해당 국가의 소식을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없고, 그 나라의 뉴스를 직접 찾아 읽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보통은 국외 언론이 다루면 이를 국내 언론들이 다시 다루고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국제 뉴스에는 소식을 대신 전해주기 위해 전문가들이 등장하고 그런 전문가들이 흔히 이용하는 식상한 표현(클리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 이제 국경은 사라졌다.
- 이스라엘과 아랍은 결코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 서양의 가치는 보편적이다.
- 전문가들은 사건의 이해를 돕는다.
- 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대중은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를 쉽게 믿습니다. 대중은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라고 믿고, 객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 비난을 합니다. 둘째, 세상엔 위와 같이 짧고 분명한, 선언적인 문장들을 이용해 세상의 문제를 단순화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정세와 관련해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 혹은 편견
책의 저자인 “파스칼 보나파스”는 책을 통해 이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50가지의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문장을 제시하고 그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반복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 50가지의 문장을 한꺼번에 나열해서 읽다 보면 “이 문장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나?”와 같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를 전하는 뉴스에 한두 문장 정도 들어가 있으면 무시하고 읽게 되는 그런 문장들입니다.
책 전반에 걸쳐 우리가 쉽게 확신하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지 않은 부분은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엔(UN)에 관한 예를 들어볼까요?
강대국과 거대 다국적 기업의 틈바구니에 끼어 “유엔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쉽게 말을 하곤 하지만, 사실은 “유엔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유엔의 집단안보 시스템이 잘 작동했죠. 리비아 민간인을 위한 “보호책임” 원칙을 강구하기 위해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하기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결의안 1973호 같은 경우는 중국과 러시아와 기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을 덧붙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의심하는 힘
“이 색은 하얀색이다”의 반대말이 “이 색은 검은색이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짧고 선언적인 문장들을 쉽게 쓰면서 실제로 그렇다고 여겨버리게 됩니다. 소셜 서비스에서는 자극적인 뉴스, 선과 악이 분명한 이슈들이 폭발적인 공유를 일으키며 타임라인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한참을 생각해 봐야 할 정도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내용은 쉽게 전파되지 않습니다.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고정관념을 갖도록 유혹하는 짧은 말들이 더 유행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첫 번째 고정관념은 바로 “책에 쓰인 내용은 믿을 만하다”입니다. 그렇다고 “책에 있는 내용은 믿을만하지 않다”는 건 아니죠. 그 책이 무엇을 참고하고 저자가 누구인지를 잘 살피면서 내용을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이 책을 포함해서 책에 쓰인 모든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책은 50가지의 예를 들며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상세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국제 정세에 이미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고정관념에 대해 디테일한 반박이 없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반면 이런 표현을 쉽게 받아들였던 분들이라면 책에서 누락한 디테일에 관한 호기심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겠죠.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2015, 서해문집)
다음 책 ㅣ 알라딘 ㅣ 교보문고 ㅣ 반디앤루니스
참고로 이 책이 선정한 50가지 고정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toggle style=”closed” title=”50가지 고정관념”]
- 책에 쓰인 내용은 믿을 만하다
-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있을 것이다
- UN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 9.11테러가 세상을 바꾸었다
- 세계를 이끄는 것은 다국적기업이다
- 문명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일어났다
- 미국은 쇠락 중이다
- 9.11테러는 미국이 일으켰다
- 세계는 진보한다
- 국제사회는 존재한다
- 이제 국경은 사라졌다
- 군사력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 국가는 더 이상 국제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 서구 세계는 위태롭다
- 아프리카는 결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 세계는 일극체제이다
- 이스라엘과 아랍은 결코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
- 우리는 핵확산을 겪고 있다
- 테러는 주요한 위협이다
- 서양의 가치는 보편적이다
- 보편적 가치는 없다
- 테러리즘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이들은 레지스탕스다
- 테러와 싸울 때는 법을 어길 수도 있다
- 테러의 원인은 종교에 있다
- 전문가들은 사건의 이해를 돕는다
- 매스미디어는 여론을 통제한다
- ‘불량국가’가 존재한다
- 현실정치는 비도덕적이다
- 내정간섭은 진보적인 생각이다
-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 러시아는 강권체제로만 통치할 수 있다
- 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
- 이슬람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 아프리카에서는 민주주의가 아직 불가능하다
- 민주주의는 수출될 수 있다
- 프랑스는 더 이상 국제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 아랍의 혁명은 도미노 효과를 불러왔다
- 무슬림 국가에서 최초의 자유선거는 이슬람 독재로 이어진다
- 리비아 내전은 현실정치의 끝을 보여준다
- NGO는 도덕적이다
- 지구온난화는 기술의 발전으로 극복될 것이다
- 월드컵과 올림픽은 순수한 스포츠 행사이다
-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 이전까지 친아랍 국가였다
-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 이전까지 반미 국가였다
- 국가주권 원칙이 폭군들을 보호한다
- 국가는 파렴치한 정책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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