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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리스트: 내 유년 시절의 책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을 한번 살펴보니 압도적으로 학습만화 류와 SF/판타지 영 어덜트(young adult) 책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문득 떠올려봤습니다. 슬로우뉴스 편집팀원들이 유년 시절에 읽은 책들을. 그리고 기억에 남는 책들을 모아봤습니다. 아래 순서는 응답 순입니다. (편집자)

슬로우 리스트 - 내 유년 시절의 책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명작 (전 15권)

계몽사 세계의 명작어린 시절 몇 번이나 두고두고 읽었던 또는 봤던 책.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전설이나 민담을 모은 옛날이야기 책이다. “읽었던 또는 봤던”인 이유는 글보다 훌륭한 그림 때문. 일본 고단샤의 책을 그대로 베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일본 편 인어 이야기의 그림은 아주 일품. 80년대에 나왔던 이 책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계몽사는 몇 년 전 ‘한정판’이라며 책을 다시 찍었지만 ‘이미지북’을 반드시 함께 사도록 세트를 구성하는 등 상술을 부린 탓인지 아직도 다 팔지 못했다.

by 엔디

MS-DOS 3.21 유저매뉴얼

MS-DOS 3.21 유저매뉴얼어린 시절 기계적 논리의 효율성에 눈을 뜨게 해준 책. 그저 남에게 물어보고 그나마 듣지도 않고 넘겨짚으며 상상력으로 질러대기 전에, 자료가 어엿하게 존재한다면 그걸 먼저 읽어라. RTFM(Read The F**king Manual)이라는 일갈이 지니는 순수한 진리는, 정말로 매뉴얼을 읽어본다면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된다.

by capcold

백과사전 (불명)

책 (불명)초등학교 3, 4학년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흐린 기억이다. 어떻게 생긴 책인지는 모르겠다. 이모네 집에서 엄마가 가져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들의 공부를 위해 엄마가 샀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에게 처음으로 백과사전이 생겼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백과사전 읽는 게 내 기억에 남은 가장 오래된 교과서 외 ‘책읽기’다. 한없이 이어지는 궁금증은 백과사전 속 표제어들 사이로 나를 헤매게 했다. 그 여행이 감미롭거나 흥미진진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순간들이 그저 희미하게 바랜 흑백사진의 한 장면처럼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by 민노씨

아동용 삼국지 (불명)

책 (불명)삼척동자도 아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부터 시작해 온갖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가 신 나게 펼쳐지지만, 마지막 쪽 마지막 문단 단 세 줄 만에 “그리고 모두 죽고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였다”로 끝난다. 응원하던 영웅들은 다 없어지고 이름 한 번 나온 적 없는 듣보잡이 모두의 염원을 이뤄버리는, 실로 인생무상의 교과서. 원래 삼국지가 그런 내용이라지만 아동용으로 축약되기까지 하는 바람에 반전의 충격이 한결 더 강렬했다. 요즘 유행하는 왕좌의 게임으로 치자면 7권 마지막 쪽에서 “그리고 모두 죽고 호도르가 웨스테로스를 통일하였다”로 끝나는 느낌이었을까나.

by 임예인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페어 플레이를 하라’, ‘남을 때리지 마라’, 남에게 상처를 줬으면 반드시 미안하다고 말하라’ 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단서 조항이 없는 단순하고 교과서적인 이런 경구들이 어린 시절 마음 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세울 때가 점점 많아지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도 삶의 순간순간, 타인을 대할 때나 심지어는 인터넷 상에서 댓글을 달 때조차 나는 그 내용을 떠올리며 지금 하는 행동이 옳은가를 고민하곤 한다.

by 뗏목지기

꿈을 찍는 사진관 (강소천)

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선생이 1954년에 발표한 이 책을 유치원시절 만났을때 난 상당히 놀랐다. 문체부터 내용구성이 모두 어린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려나갈 수 있는 서사로 이뤄졌기에 종전에 읽었던 ‘어린이를 위한 책’ 과는 완전히 낯설고 다른 느낌, 그러나 어린이인 내 자신이 ‘이것이야말로 나같은 독자를 제대로 알고 쓴 동화야’ 라는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관과 사진의 원리도, 삼팔선과 북녘의 느낌도, 할미꽃과 민들레꽃이 어떻게 생긴 것이었는지 조차 잘 구분이 안갈때 이야기를 접했고 그 뒤로 그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지만 그 뒤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조차 그 이야기의 구절들이 막 찍은 필름을 물에 담가 건져올리듯이 생생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꿈을 찍으시려는 분들에게!” 라는 제목으로 붙여진 쪽지가 공손하면서도 강렬하게 말하던 그 이야기속 이야기의 느낌들은 이후 내가 생활속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문화와 상식들을 접해나갈때 절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계속 내 기억 언저리에 붙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

어릴 적 접하는 한편의 문학작품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좋은지 나쁜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한편의 동화는 내게 문학과 성찰 그리고 수 많은 철학들의 친절한 안내자가 된 셈이다.

by nomodem

아이들만의 도시 (헨리 윈터펠트, ABE전집)

아이들만의 도시유럽의 조그만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아이들이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자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의 버릇을 고쳐줄 목적으로 한밤 중에 마을을 떠난다. 길을 잘못든 어른들이 국경을 넘는 바람에 며칠동안 동네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고, 그 동안 아이들은 어른들의 역할을 대신하며 나쁜 아이들 그룹인 해적단과 결투를 벌인다. 어린시절 어른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나는 뭘하게 될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했었다. 물론, 그 상상에는 부모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달려 있었지만.

by 이병찬

무정 (이광수)

무정인쇄소를 다니던 아버지는 거의 매일 잘못 만들어져서 버리게 된 책들을 한 권씩 들고 오셨다. 덕분에 온갖 다양한 파본서적들이 유년시절의 내 친구였는데 그 중에서도 ‘무정’은 심하게 어긋찍혀서 제대로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버지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이 책에는 구멍을 뚫어서 화장실에 휴지로 쓰라고 걸어두셨다. 여섯 살 짜리 꼬마는 조명도 어두운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그걸 일주일만에 다 읽었다. 무정 때문에 ‘영채’라는 이름은 이쁘고 착하고 순수하고 헌신적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아 있다.

by 필로스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아버지의 적은 월급으론 피아노 학원비를 계속 댈 수 없어 관둬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하필이면 6년 내내 공부를 잘 해서 교사들의 끊임없는 촌지 요구에 시달리며 보냈지만 우리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소풍 갈 때 선생님 도시락 싸 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당시 낙이라면 적은 용돈을 모아 헌책방에 다니며 재미있는 책을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초등학교 때는, 사랑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길 바랐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더욱. 비슷한 제목의 레 미제라블만 해도 장발장은 결국 영혼의 구원을 얻었고 코제트는 영혼의 짝을 만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두 연인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여주인공이 사실상 팔려가는 마지막 부분 읽으면서 엉엉 울었던 게 기억 난다.

by 펄

월간 보물섬

월간 보물섬1982년 10월 창간한 월간 보물섬은 아마도 당시 모든 아이들에게 최고의 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박근혜 대통령의 육영재단에서 펴낸 이 본격 만화잡지에는 정말 별의별 만화들이 있었다. 우리 남매가 돈을 모아 창간호를 샀던 것과 책이 워낙 두꺼워서 몇 달만 지나도 책장이 금방 차는 바람에 책장 위에 쌓아둘 수 밖에 없었던 기억도 난다. 둘리, 제제, 맹꽁이 서당의 훈장님과 학동들, 하니, 땡땡, 용호취, 스카라무슈, 오혜성, 독도탁, 벤… 지금은 잊혀진 이름들이지만 기억 속에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by 써머즈

창작과비평 전집

창작과비평 전집지금 나도 그렇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는 놓을 데도 없는 비좁은 집에 책을 사날랐다. 계몽사 소년소녀 전집과 어린이 위인전기 전집을 두어 번씩 다 읽고 나서 무지 커버에 담긴 검은색 장정의 창작과비평 전집을 꺼내 들었는데 그 짙은 종이냄새가 아직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창비를 제대로 읽었을 리는 없고. 나만의 비밀은 은근히 창비에 실린 소설에 야한 대목이 많았다는 것. 연도를 기억하지 않아도 대략 몇 번째 줄에 꽂혀있는 어느 정도 두께의 책에 어떤 소설이 있었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야금야금 다시 꺼내 읽는 재미가 있었던 듯. 아들들이 서울로 대학에 가고 어머니는 집을 좁혀 이사하느라 언젠가 내려가 보니 창비 전집은 처분하고 없었다.

by 이정환

지경사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말수가 적었던 나는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사회화의 길은 열려 있었으니 소녀들 간의 우정을 글로 배울 수 있었던 것. 지경사에서 출간했던 소녀 명작소설들은 언젠가 사교계에 나갈 기회만 노리던 나에게 귀중한 교과서였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갔던 작품은 단연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였는데 주인공 쌍둥이가 풍성한 공주풍 헤어스타일은 하고 있음은 물론 테니스를 즐기면서 밤에는 사감 선생님 몰래 수영장 파티를 여는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온갖 사건을 함께 헤쳐나가는(?) 단짝 쌍둥이에 대한 동경도 친구는 소울메이트인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이상한 고집을 키우는데 영향을 미쳤다. 중학생이 되어도 현실은 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일까. 이후 답 없는 영화광에 어둠의 상징이었던 넥스트 팬이 되고 만다.

by 설렌

소설 손자병법 (정비석)

소설 손자병법대략 1990년 무렵까지도 군청소재지에서 군청소재지를 연결하는 국도조차 비포장도로였을 정도로 정부 관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된 서점 구경도 못 해봤다. 다행이라면 집에 이런저런 책이 다른 집보다는 많았다는 점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초등학교 5학년쯤 아버지께서 읽어보라며 권해준 책이 바로 정비석이 쓴 [소설 손자병법]이었다. 중국 고대사를 쥐뿔도 모르던 어린 시절인데도 꽤 열심히 탐독했다. 나름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렇게 삼국지, 소설 초한지, 소설 연개소문, 임꺽정 같은 장편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내 성장기 독서 취향의 첫 단추를 끊었다.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졌다. 이윽고 ‘역사학자’를 장래 희망으로 꿈꾸는 청소년을 만들어냈다. (사족: 내 아들이 이 책을 읽겠다고 하면 좋은 말로 타이른 뒤 다른 책을 사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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