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국 정치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DSA. 샌더스, AOC, 맘다니를 거쳐 프란체스카 홍까지. 점점 더 ‘DSA 스타’ 출현 빈도가 짧아지고 있다. DSA에 관해 알고 싶은 ‘거의’ 모든 것. (⏰15분)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35]
트럼프 이후의 미국,
희망은 민주당이 아니라 ‘DSA’다
질문 정리: 민노
답변 퇴고: 캡콜드
📢 안내 및 알림: 인터뷰는 2026년 9월 8일 서울 명동에서 진행했습니다. 질문은 맥락화하고, 캡콜드의 ‘독백 문투’로 정리합니다. 최종 퇴고 과정에는 캡콜드가 참여했습니다.
DSA = 구(舊)좌파 + 신(新)좌파
우선 DSA(미국 민주사회주의자; 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라는 요즘 나름으로 핫한 용어부터 설명하자.
전통적인 노조 운동에 뿌리를 둔 구좌파, 문화 개혁 운동 색이 짙었던 68 혁명으로 상징되는 신좌파가 80년대 들어서 하나로 합쳐진 범좌파 정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개별 정당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데, 미국 특유의 연방제-양당제 때문이다.
원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국 정치는 다당제에 가까워서, 유진 뎁스가 사회주의당 만들어 다섯 번이나 대선 나가고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루스벨트가 진보 정당을 새로 만드는 등 중구난방 활력이 있었다. 그런데 연방제 정치를 효율화하는 과정에서 양당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이후 미국 정당정치는 경직됐다.

새로운 정치 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은 신당을 만들기보다는 어쨌든 양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해야 했다. 즉, 정당 안에서 계파를 만들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구좌파 전통 위에 있던 마이클 해링턴이 주류 리버럴 정당이 된 민주당 안에서 계파를 만드는 것에 매진하던 와중에 80년대의 시작과 함께 신보수주의의 득세 속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젊은 활동가들을 더 많이 갖추었던 당대의 신좌파 조직과 손을 잡고 하나로 뭉쳤다.

하지만 두 티끌을 모았더니 조금 더 큰 티끌이 되었다. 보수 레이건 정권은 냉전을 나름 승전 비슷하게 마무리했고, 민주당 클린턴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끌어안은 상태에서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는 바람에 좌파적 문제 의식은 미국 시민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 삼십년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2011년의 월가 점령 운동이 비로소 가능성을 확인해 줬다. 비록 그 자체로는 별 결과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그간 미국식 중산층 이념에 늘 묻혀 있던 계급 갈등이라는 이슈가 마침내 전면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시골 취급 받는 버몬트의 소도시 시장 출신인 상원 의원 버니 샌더스가 컬트적 인기를 누리면서 전국구 인물로 부상했다. 이 때 생겨난 풀뿌리 조직을 기반으로, 201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며 그간 누적된 좌파적 개혁에 대한 수요를 전국적으로 폭발시켰다. 하지만 경선은 주류 리버럴인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로 끝났고, 그가 대선에서 우익 광대 트럼프에게 지는 바람에 개혁이 문제가 아니라 정상 국가 회복이 이후 수년 간 핵심 화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불씨는 확실히 타올라, 버니 샌더스가 전구구가 된 그 즈음 DSA는 회원이 수십 배 늘었다. 나도 DSA 소속이라는 정치인들이 대두했고, 여러 강성 진보 정치인들이 연방 의원으로 당선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바이든 정부를 거치며 국가 정상화는 커녕 다시 트럼프 2기나 불러들인 갑갑하고 나약한 이미지의 민주당 주류에 대한 불만으로 DSA가 새롭게 주목받는 현재에 이르렀다.
트럼프의 공포정치가 등장한 배경
미국 바깥에서는 흔히 트럼프를 희화하하는데, 어이없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과 별개로 실제 돌아가는 모습은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다. 한국으로 치면 전두환 정권 당시를 연상하면 된다. 트럼프의 이민단속국 아이스(ICE)는 전두환의 백골단과 비견할 정도로 국민을 제 멋대로 때려잡는 폭력 조직이다.
그 정도로 심각한데도, 안팎에서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안에서도 ‘내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서, 위험한 불법 범죄자들 잡는다니 ‘나’는 합법적 국적자고 선량한 시민이니까 아무 일도 없겠지 하면서 말이다. 사실 사람들이 민주제를 지켜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품고 들고 일어나는 것은 관념적 불의가 누적될 때가 아니다. 정말 피부에 와닿는 물리적 충돌이 당장 우리 곁에서 일어나서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당할 것 같을 때다.


무슨 국가간 인종간 기타 무엇이든 시민의식 수준 차이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 한국에서 윤석열 계엄 당시 많은 사람이 들고 일어난 것은 ‘우리 동네’에서 ‘내’ 민주제가 군홧발에 또 밟히는 꼴을 실시간으로 봐서다. 그 전에 2년 넘게 다양한 민중들이 탄압 받을 때는 그게 불의라고 인식은 되도 벌떡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고 말이다.
한편 미국도 ICE 요원이 공포 조성에 항의하는 여성을, 넘어트려진 다른 사람을 도우려던 남성 간호사를 백주대낮에 총살한 사건들이 발생한 미네소타에서는 시민들이 영하 수십도 날씨에도 당장 동맹 파업과 시위에 나섰다. 공포정치의 성공 비결이란, 공포를 주되 분노는 폭발시키지 않는 선을 타는 것에 있다.



그러면 왜 충분히 많은 미국 시민은 공포정치를 벌일 조짐이 너무나 뚜렷했던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약간 시간을 거슬러,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 상징하는 2008년 금융 위기는 기성 정치 역시 함께 파산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헌 정치’를 혁신할 오바마를 선출했지만, 기본적으로 오바마는 온건파였다.
오바마는 젊고 지적이고, 무엇보다 흑인이라는 파격적 이미지를 무기로 삼았음에도 오히려 실제 정치는 전면 개혁보다는 합의와 점진적 접근에 집중했다. 그렇기에 공공의료보험보다는 사보험 시장의 빈틈만 메꾸는 ‘오바마 케어’를, 폭주한 금융 시장에 대한 대대적 수술보다는 개별 손해를 방지하는 ‘소비자금융보호국’을 만들었다.

그런 신중한 갑갑함은, 어쨌든 증가하는 빈부격차라든지, 문화적 변화 속 적응 혼란이라든지 하는 체감적 사회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새 정치의 통쾌한 포풀리즘을 기대할 때, 한 쪽에서는 계급 갈등을 이슈화한 샌더스가 나와서 ‘구태 정치 조직의 지원을 받는 것 같은 힐러리 클린턴’에 맞서며 선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선풍은 클린턴에게 지면서 김이 샜고, 대선엔 반대쪽에서 나온 트럼프의 포풀리즘이 결국 성공해버렸다. 기존의 모든 정치 질서를 다 부수며 눈치 안보고 맘대로 살게 해주겠다는 ‘파괴왕’ 이미지와 유능한 경영인의 느낌을 장착한 트럼프가 나와서 당선된 것이다.
DSA vs. 트럼프,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왼쪽 DSA나 오른쪽 트럼프나 모두 극단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비교의 논리적 정합성과 별개로, 이미지는 쉽게 이진법이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실제로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정치 스펙트럼의 어디든지 국민이 답답해하는 걸 한 방에 날려버리는 이른바 ‘사이다’라는 점이다.
하지만 ‘좌파 사이다’ DSA 깃발에는 ‘노동, 환경, 다양성’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구는 그저 사람들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사이다에 머무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정책화로 이어져야만 하는 씨앗이고, 원형이다. 민주사회주의에 굳이 민주라는 말이 붙은 것은, 그 목표가 민주적 규범과 절차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뚜렷한 조건이다.


반면, 트럼프 깃발에 새겨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그냥 가슴을 웅장하게만 한다. 위대함이 무엇인지, ‘다시’라는 말이 지목하는 찬란한 시대가 언제였는지, 애초에 미국이라는 사회의 울타리가 어디까지인지, 무엇 하나 없는 그저 텅빈 구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제안해서 받아들이는 ‘마스가’ 선박 제조 정책이나 자동차, 태양광 등 에너지를 둘러싼 반중 정책 역시, 통일된 구체적인 철학에 바탕한다기보다는 그럴듯한 사업 수치를 과시하고자 하는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에 가깝다. 아무거나 채울 수 있으니 뭔가 펑펑 터지면서 신나기만 하면 인종차별주의도 좋고 국수주의도 좋고 세계구 깡패 협잡질도 다 좋다.
그래서 결국 트럼프의 구호는 ‘나쁜 사이다’다. 텅 빈 구호는 실제로 국민의 팍팍한 삶의 모순을 해결하는 구석이 없기에, 사회적 약자인 어딘가의 소수자 집단을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손쉬운 엉터리 혐오로 그때그때의 인기를 회복하는 수 밖에 없다.
결국 나쁜 사이다는 텅 비어 있지만 어떤 문화적 원형을 건드리며 설레발만 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좋은 사이다는 그 구호(시원함)을 추구하다 보면 구체성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구호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들이 떠올리는 미국스러움의 문화적 원형, 그러니까 속칭 어메리칸 드림의 본질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맘껏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일하면 ‘엄청나게’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이다. 그 이미지가 1800년대에서는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다는 정도의 느낌이었고, 그래서 고향의 빈곤이나 핍박을 피해서 새 터를 찾는 이들에게 먹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엄청나게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성공 신화로 불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적 성공으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인물은 첨단 사업 굴려서 세계 최고 부자가 된 이미지의 일론 머스크, 그리고 천재 사업가로 뉴욕 재계를 호령했다는 어렴풋한 느낌의 트럼프다.
신화의 세계에서 사실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미국에 사는 보통 미국 사람들, 중남미 이민자들도 모두 포함해서, 미국스러움의 상징으로 그 둘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미국스러움의 비극이기도 하다.

맘다니 같은 DSA는 트럼프의 X맨?
DSA를 자처하는 스타 정치인의 출현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 조금 단순화하자면, 버니 샌더스에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속칭 AOC) 까지는 30년이 넘게 걸렸는데,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보도에 오르내리는 전국구 정치인이 하나씩 늘어나 있다. 맘다니 뉴욕 시장은 이런 상황의 뚜렷한 상징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충격(쇼크)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언론인은 ‘충격’ 요소를 그야말로 쏟아내는 미국 극우 매체들, 혹은 한 때는 진지한 저널리스트였으나 지금은 공격적 관종으로 거듭난 독립 논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 먹기 쉽다. 나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고 자처하면서도 억지로 반대편 시점을 고려한다면서 끌어들이고, 어이없는 시비라도 무심결에 그냥 받아들인다.
DSA가 민주당의 ‘중도’ 확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트럼프 X맨’설이 바로 그렇다. 일련의 한국 언론인, 논객들이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섬기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것은 DSA 반대 측이 뿌리는 선동을 영 이상한 소스를 통해서 주워 먹고 다시 뱉는 것에 불과하다.

자고로 선거는 기세다(바람, 흐름, 모멘텀, 뭐 다 좋다). 주목을 모으고 성과를 내고 더 주목을 모아내는 순환적 동원 과정이 그런 예다. 그런데 그 기세를 스스로 꺾는다면 그야말로 자충수일 것이다. 온건파와 DSA가 민주당 경선에 붙어서 DSA가 이겼는데, 민주당 지지자를 자칭하면서도 DSA의 과격한 이미지 때문에 결국 실전에선 질 것라고 저주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정작 현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DSA와 같은 새로운 개혁파가 결합하고 기존 지지층에게도 계속 지지할 이유를 제공하며 전체적으로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이다. 선거의 흐름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미리 부정적으로 예단해 놓고는 선거 끝난 다음에 ‘거 봐라?!’ 그런 태도야말로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꼰대스러운’ 자세에 가깝다. 하지만 어째 정략적으로 정교한 느낌을 풍기니 좋다구나 하고 한국 언론이 받아쓰기 쉽다.
기세를 만든다는 것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가령 최근 맘다니 뉴욕 시장의 시정이다. 거대 이슈를 구체화한 정책으로 쪼개 실현한다. 정책 진행 내용을 고스란히 공유하는 아주 정석적인 접근인데, 포인트는 시정 보고서 형식이 아니다. 포인트는 마치 자신의 원래 발랄하기로 소문 났던 선거 캠페인의 연장선처럼 소통 밀착도를 높이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이미 뉴욕 시민은 지난 30년 동안 시장들 중에서 제일 낫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보내고, 특히 젊은 층 지지는 아주 높은 편이다.

- 저비용 식료품점
- 주거 임대 동결
- 쓰레기 처리 시스템 현대화
- (시장이 함께 나서는) 도로 하자 신고 보수 시스템 등
시정을 과제와 해결의 순환으로 만들어서, 문자 그대로 도파민 나오는 신나는 뉴욕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공공 수영장의 개장일에 양복 입은 채로 뛰어들며 분위기를 띄우는 긍정과 도전의 이미지를 장착한 시장인데 DSA라는 명찰이 멍에가 되어 민주당에 누가 될 리가 있겠는가.
좌파 모험주의? 미국 ‘실패의 역사’ 모르는 구경꾼의 언어
DSA가 전국적 차원에서 온건파, 중도파 확장을 방해하고, 트럼프 득세를 강화하는 ‘좌파 모험주의’라는 공세는 허구다. 그런 시각은 미국 좌파가 무엇인지, 한편 리버럴 온건파가 어떻게 실패의 역사를 축적했는지 모르는 구경꾼의 언어다. 미국 정치 현실에 진지한 고민이 없는 호사가들의 무책임한 화제 몰이에 불과하다.
온건파가 얼마나 밀리고 밀려서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했는지 그 처절한 실패의 역사를 외면하는 말이다. 한국 축구에 비유해 보자면, 미국 민주당 온건파는 지난 월드컵 남아공전에서 드러난 홍명보 감독, 축구협회 같은 폐단을 계속 쌓아왔다. 축구팀을 해체하지 않는 선에서, 좀 뚜렷하게 개혁을 해서 방향을 틀어야 할 것 아닌가.
DSA는 80년대에 현 상태로 출범한 이래로, 사실상 양당제라는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민주당 시스템의 틀 안에서 계파로서 작동하고 있다. 사표 방지 논리에 허구한 날 치이는 소수 정당 운동과 다르고, 한국에서 용혜인 의원 장관 후보 내정 및 사퇴 과정에서 결국 명분의 앙상한 밑바닥을 드러내고야 만 엉터리 위성정당 연합 같은 꼼수와도 다르다. 위성정당 같은 헌법 해킹에 좌파정치의 미래를 거는 정도는 되야 ‘좌파 모험주의’다.
앞서도 강조했지만 이제 점점 더 지역구와 전국구에서 DSA 간판을 단 주목도 높은 정치인의 출현 빈도가 늘고 있다. 상원, 특히 미시간 주에서 경선 과정에서 온건파의 저주를 받은 압둘 엘사이드(Abdul El-Sayed) 후보가 계속 호방한 이미지를 과시하며 지지 추세를 올려가고 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 홍의 경선 패배
DSA로서 위스콘신 주지사 후보에 나섰던 프란체스카 홍이 경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석패했는데, 마침 한국계 미국인이라 한국에서도 적잖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안다. 경선 운동 기간 내내 압도적 승기를 잡았다. 그런데 막판에 온건파의 집중적인 지지 선언을 끌어모은 크로울리 후보에게 패했다. 홍의 패배를 DSA의 한계로 해석한 한국 언론의 부정적 평가가 적잖이 보였다. 특히 전국구 DSA 스타인 샌더스 등이 지지 연설하지 않은 걸 DSA의 후퇴니 ‘버린 후보’니 구설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훨씬 명료하다. 미국에서는 지역 정치와 중앙 정치의 구별을 두는 것이 흔하고, 샌더스나 AOC 등의 후보 지지 운동은 전국구, 그러니까 대통령이나 연방 의원 선거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주지사나 주 의원 등은 개별 지역의 전략과 이해 득실에 일임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샌더스는 연방정부 하원, 상원에선 지지 연설을 했지만, 프란체스카 홍의 지지 연설은 하지 않았을 뿐이다. 거기에서 무슨 편견이나 갈등을 읽는 것은 그저 ‘노이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위스콘신의 지역적 이해는 무엇인가. 지방선거에서 상원, 주지사, 대법원 등을 ‘한줄로 투표’하는 경향이 강한 선거에서 맨 위에 기재되어 있는 주지사를 누구로 뽑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위스콘신은 심각한 개리맨더링을 다시 정상화하기 위해서 민주당이 주의회를 다시 되찾아와야 하는 주다.
그래서 좀 더 온건한 이미지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전략이 작용한 측면이 있다. 크롤리 후보는 온건한 성향도 있지만 나름 정치 아웃사이더로서 난관을 헤치고 올라왔다는 점에서 홍의 장점도 일부 공유한다. 그렇기에 홍의 석패는 위스콘신 유권자들의 전략적인 선택이 만든 결과지, DSA의 한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편, 프란체스카 홍의 부상에서 주목할 점은 따로 있다. DSA라는 계파적 구심점보다 더 중요한 건 투쟁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불만으로 쌓인다고 해도, 가장 간편한 해법은 늘 ‘나만 성공해서 빠져나가면 된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연대하고 조직화 해 길거리에 나와 싸우고 시설을 점거하며 정치인을 주민소환 하고 의회에 후보를 올릴 수 있다는 경험, 그 경험이 중요하다.
그런 경험을 해야 사회적 해법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좌파적 개혁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정치인으로 나설 수 있다. 홍은 자신이 시의원으로 나선 위스콘신주 매디슨이란 도시는 딱 그런 경험을 얻기 좋은 환경이었다. 2011년의 공공노조 노동권 시위가 바로 홍에게 정치적 성장의 경험과 토양을 제공했다.
공공노조 노동권 시위는 교원 노조를 중심으로 경찰, 소방관 등 여러 노조가 시민과 연대해 장기간 다양한 정치 압박을 효과적으로 행사한 사건이다. 그때 프란체스카 홍은 위스콘신대 저널리즘 스쿨을 중퇴했다. 그리고 시위가 매일, 매주 이어졌던 그 주의회 의사당 식당가에서 젊은 스타 셰프로 활동했다.

투쟁이 최종적으로 성공했는지는 부차적이다. 사회적인 연대의 체험이 핵심이다. 그것이 비단 프란체스카 홍 뿐만 아니라 사회적 해법을 위해 나서는 그 모든 이들을 성장시킬 좋은 토양이자 원천으로 믿기 때문이다.
‘독일을 위한 대안’과 트럼프는 닮은 꼴
최근 독일 선거에서 극우 정당이 연이어 압승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026년 9월 동부 지역 주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다. 독일에서도 자긍심을 품고 경제적인 안정감을 느끼면서 살기 어렵다. 독일을 위한 독일을 만들자! 독일 국기 계양하자! 그런 직접적인 구호가 작센안할트주 주의회 선거에서 먹혔고, AfD는 약 44%를 득표해서 제1당을 확정했다.
잘 알려져 있듯, 독일은 통일 후 전 국민적 자긍심을 위한 구심점이 애매한 상태에 처했고, 특히 동독 지역의 패배감이 심한 편이었다. 덕분에 최근까지도 선거 결과 데이터 지도가 동서독 분단 시절의 지도와 놀랍도록 닮아있어서 온라인에서 화제감 내지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런데 자긍심에 구멍이 있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한다. 그리고 AfD 같은 극우 정당이 ‘순수한 독일’, ‘위대한 독일’의 이미지를 끌어와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순수함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불결한 것으로 몰아내야 하고, 위대하려면 누군가를 열등한 존재로 내려쳐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독일 정치에서 가장 비슷한 과거의 역사가 나치당이 대두되던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인 것 같다.
그리고 AfD와 트럼프는 일맥상통한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많은 세계 각지의 극우는 동질적이다. 그래서 트럼프의 극우 정치를 지펴내고 남아공 극우 마인드를 미국에서 꽃피운 일론 머스크가 AfD를 적극 후원했던 건 어떻게 보면 아주 자연스럽다. 오죽하면 ‘독일을 위한 대안’이 선거 직후에 머스크에게 감사 인사까지 했겠는가.
포스트 트럼프: DSA는 극우를 막는 방벽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현재 미국을 9회말 2사 1루 정도의 상황으로 본다. 준파시즘에서 완전한 파시즘으로 가기 직전이고, 시스템 붕괴 직전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방벽으로 남아 있는 게 이번 11월의 중간선거다. 그리고 중간선거에서 이슈를 대충 뭉개면서 가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DSA다.
즉, 트럼프 이후의 ‘포스트 트럼프’를 보여주는 건, 민주당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 DSA다. 물론 DSA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특히 미국 정치에서 ‘사회주의’라는 브랜드는 여전히 약점이다. 그걸 극복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나 자신은 민주당 주류 온건파보다는 왼쪽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늘 애매한 개량주의자로 평가하기에, DSA의 자신감이 부러우면서도 의아할 때가 많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도 아니라 민주사회주의로 왜 굳이 ‘사회주의’라는 브랜드를 꼭 붙들고 있는지 살짝 불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DSA가 트럼프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고 있는 건 사실이다. 앞서 설명한 ‘좋은 사이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적인 부분은, 이들이 지금 필요한 진취성을 가장 잘 챙긴다는 점이다. AI 시대 인간의 노동성, 다양셩, 규칙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의 바탕에는 ‘다양성’이라는 화두가 있다. 그런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실체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감각을 보여주는 유일한 집단이 DSA다.
현재의 폭발적인 추세가 이어진다면, 다음 대선 후보도 가능할 수 있다고 보지만, 현 추세가 선형적으로 이어진다고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대선에서 DSA 노선에 친화적인 민주당 후보가 나올 수도 있다고 기대해 볼 순 있다. 현재 미국에서 트럼프적 세계에 대한 항체로서 명확하게 반대적 세력을 구축한 유일한 정치 세력은 민주당이라기보다는 DSA다. 현재를 기준으로 ‘세력’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렇다.
한국과 DSA
미국 내 DSA 열풍이 한국 정치 변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수많은 세력들, 다양한 정파에서 DSA 붐을 결국 아전인수로 해석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교훈은 선명한 방향성과 풀뿌리 조직화다. 가장 작은 조직부터 만들고, 그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력을 키우는 과정을 배워야 제대로 그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지역 정치와 연대의 경험이 중요하다. 물론 제도적으로는 지역정당을 활성할 수 있도록 정당법부터 바꿔야 한다.
풀뿌리와 조직화, 그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한국 정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화두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 단계씩 레벨업하면 좋겠다. 물론 한국 정치에서 소위 진보 정치의 현실은 용혜인 벼락출세 시도에 머물고 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