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폴리시] OCED 자살률 1위 한국. 미국 자살 예방 전화 ‘988’에 대한 미 경제연구소(NBER)의 분석은 우리에게도 새겨야 할 시사점을 제공한다. (⏳4분)
미국엔 자살 및 정신 건강 위기 상황에서 지역에 상관없이 24시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두 개 있다. ‘911’과 ‘988’이다.
- 911은 응급 상황에 이용한다.
- 988은 정신 건강 위기와 자살 위험에 놓인 이들에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여 자살을 예방한다는 목적으로 2022년 7월 개통됐다.
미국 약물남용정신건강청(SAMHSA)이 2021년 10월부터 3년간 약 5억 달러(6900억 원)를 투입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8월 미국경제연구소(NBER) 워킹페이퍼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988은 자살을 막지 못하고 있다. 전화 상담 서비스 운영을 개선시켰을 뿐이다. 벤저민 한센(미 오리건대 경제학 교수) 등 NBER 연구원 3명의 연구 기록을 정리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988 시스템 도입으로 위기 전화 응대 건수가 크게 늘었지만, 목표였던 자살률을 낮추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이 상담원과 통화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 대부분 발신자가 당장 자살 고위험 상태가 아니다.
- 고위험 발신자가 핫라인 통화 후 후속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정신 건강 전문 인력이나 위기 대응 시설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 선의로 도입한 ‘착한 정책’이 행정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988은 왜 도입했는가.
- 미국 내 자살 사망자 수는 2022년 한 해에만 4만 9,476명에 이른다. 특히 청소년 및 청년층 주요 사망 원인으로 자살이 꼽히면서 국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했다.
- 미국은 2005년부터 ‘1-800-273-TALK’라는 10자리 번호의 전국 자살 예방 핫라인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파편화한 재원에 의존한 탓에 지역 콜센터마다 상담 인력과 장비 등 역량 격차가 심했다.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고 중간에 끊기거나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고질적 문제가 있었다.
- 미 의회는 2020년 10월 세 자리 번호 ‘988’을 전국 통합 번호로 지정하는 국가 자살 핫라인 지정법을 통과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연방 정부 차원의 전폭적 예산 지원이 이뤄졌다. 2022년 7월 16일 전국적으로 정식 개통됐다.
상담 서비스 품질 개선시킨 988.
- 988 도입 후 월별 신고 건수가 급격히 증가해 2022년 8월부터 11월까지 주당 평균 4,298건을 기록했다. 2024년 초에는 월 5,575건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월간 총 25만 건 이상의 위기 신고가 접수돼 증가율이 75%에 달했다.
- 988 도입 직후 주 내에서 처리된 전화 비중이 82% 상승했고, 2024년 초에는 상승률이 85%에 도달했다. 주별 응답률 및 대기 시간 격차가 줄어들었으며, 평균 통화 시간은 약 13분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연방 자금 지원이 통화 품질, 인력 배치 및 운영을 개선시킨 것이다.

자살률? 변화 없었다.
- 연구진은 인프라가 가장 낙후됐던 주들을 추적해 개통 전후 자살률(10만 명당) 변화를 측정했다. 자살률은 오히려 0.006명 증가했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자살률 하락 효과는 관찰되지 않았다.
- 988을 사용해 봤거나 향후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취약 그룹, 즉 여성, 흑인, 청년층 등 어떤 집단에서도 사망률 하락 신호는 발견되지 않았다.
- 인구 500만 명 정도 되는 주(미국 주 가운데 중간 규모에 해당)를 전제로, 해당 주에서 통화가 3,125건 늘어날 때마다 최선의 경우 자살자 1명이 줄어드는 것으로 관측됐다.
왜 자살 막지 못하는가: 급박한 순간의 전화가 아니다.
- 전화 연결이 늘었는데 왜 자살을 막지 못하는가.
- 첫째, 대부분 전화 통화는 일촉즉발의 극단적 자살 상황에서 걸려오는 게 아니다. 988에 걸려오는 대다수 고민 상담은 가족 불화, 대인 관계 스트레스 등 사회적 갈등에 대한 호소이거나 가벼운 우울과 불안 장애를 포함한 정서적 하소연이었다.
- 988 통화 전체 중 자살 사고, 시도, 위협과 관련한 통화는 10~20%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전화가 걸려온 시점에 실제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 사람 관련 사례는 전체 전화 건수 중 약 0.7~1%에 그쳤다.
- 전화 접촉이 발신자의 정서적 고통을 줄여줄 순 있어도, 자살 고위험 발신자와 접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살 감소 효과가 작은 것이다.
왜 자살 막지 못하는가: 전화하고 땡?
- 전화 이후 치료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부재했다.
- 연구진에 따르면, 988 도입 후 정신 건강 전문 인력 고용 및 관련 시설 수에 유의미한 증가가 없었다.
- 988은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988 도입으로 자살 위기 상담 서비스는 개선됐지만 최종 목표인 ‘자살률 감소’와 이어지진 않았다. 통화가 끝난 후에도 발신자들이 효과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적, 물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 응답 대기 시간을 10초 줄이고, 응대율을 85%까지 끌어오린 ‘지표상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전화를 내려놓은 아이와 청년이 실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시설 인프라 및 전문 인력 투자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공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