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포인트] 전자책으로 발간된 한 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세계적인 출판사가 판권을 얻었다. 하지만 AI 생성 의혹이 제기됐고, 종이책 출간은 취소됐다. 우리는 왜 여전히 인간이 쓴 책을 원하는가. 왜 AI는 문학을 생성할 수 없는가. 신형철(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이 말하는 여전히 문학을 읽는 이유. (⏳5분)
인공지능(AI)가 인간을 대신해 글을 쓰고, 시와 소설을 짓는 시대다. 우리는 AI 도움을 받으면서도, AI가 문학에 손을 뻗치는 것에는 반감을 갖는다.
작가 미아 발라드가 자비로 출판한 공포 소설 ‘샤이 걸(Shy Girl)’은 전자책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세계적 출판사와 판권 계약까지 마쳤지만 AI 집필 의혹으로 출판이 취소됐다. 특정 묘사와 단어가 세 번씩 나열되는 등 AI 글쓰기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은 13일 공개된 서울대 유튜브 콘텐츠 ‘샤로잡다’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AI가 쓴 글은 매끄럽다. 매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미끄럽다. 매끄럽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 미끌미끌해서 못 쥐겠다. 읽고 나도 아무것도 손에 뭔가 잡히지 않는 이상함을 느낀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신형철은 AI 시대에도 왜 인간이 500쪽짜리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했다.
- 신형철은 “AI와 달리 인간은 자기 경험에 대한 가장 내밀한 주관적 정보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은 즉각적이지 않다. 10년 전 경험을 이제 깨닫기도 한다. 복잡한 맥락과 과정을 거쳐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 불가피한 과정을 다 담으려면 500쪽이 필요하다. AI가 만들어준 텍스트로는 “감정에 대한 인지적이고 고차원적 지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AI 글에는 “야생성”이 없다.
- 신형철은 AI가 작성한 글에 “유려함이 지나치다”며 이렇게 말했다.
- “만약 AI 글에 학점을 준다면, ‘B+’는 줄 수 있을 정도로 잘 쓴다. 하지만 ‘A+’를 줄 만한 글은 안 보인다. 야생성이 안 보인다. 야생성이 있는 글은 단점이 분명하지만 아주 강력한 장점이 있는 글이다. AI가 쓴 ‘B+’ 글은 단점이 없지만 장점도 별로 없다. 인간적 글에는 단점을 다 상쇄할 만한 강력한 강점이 있다. 거친 무언가를 뚫고 나오는 눈부심이 있어야 한다.”
AI가 흉내낼 수 없는 ‘경험력’에 대해.
- AI와 인간 차이는 “자기 경험에 대한 가장 내밀한 주관적 정보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느냐” 여부다. 경험력 차이다. 인간은 같은 빨간색을 봐도 각자 다른 감정을 갖는다. 우리가 고통을 느꼈을 때, ‘고통의 느낌’은 짧은 구술로는 타인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 AI 글쓰기는 문법적 정확성만 갖고 있을 뿐 인간 내면의 모호하고 복잡한 감정을 적확하게 전달·표현하지 못한다.
‘사이다 맛’ K 콘텐츠 우려하는 이유.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을 필두로 한국 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 신형철은 일부 K 콘텐츠의 ‘도덕주의’를 우려했다.
- 무엇이 옳고 그른지, 미리 ‘정의’와 ‘악’을 규정한 뒤, 정의가 악을 응징하는 플롯만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신형철이 생각하기에 좋은 콘텐츠 요건은 ‘진보적 상상력’ 여부다. 지금 존재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선행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윤리적 열망이 내재해 있어야 한다. 이런 고민이 없다면 K 서사는 공허해질 수 있다.
- 도덕은 이미 존재하는 규범이다. 윤리는 그런 규범을 순응하기보다 거리를 두며 성찰하는 데 방점이 있다.
- 윤리가 빠진 도덕주의 세계관에서는 “우리는 더 세다. 더 화끈하게 악을 응징한다”는 명분만 되풀이된다.
생존주의, 응보주의, 능력주의.
- 신형철은 K 콘텐츠를 ‘응보주의, 능력주의, 생존주의’ 키워드로 설명했다.
- 한국 콘텐츠에는 유독 복수와 응징 이야기가 지나치다. 신형철은 이런 현상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았다. “능력주의는 분배에 대한 정의를 말한다. 능력에 따라 사회적 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 과정에 대한 강도 높은 감시가 이뤄진다. 한국은 유독 능력주의 집착이 심한데, 결과에서 차등 분배를 전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차등이 클수록 좋다는 관점도 적지 않다. 보통 약자 배려를 ‘형평’이라고도 하는데, ‘형평조차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다.”
- “능력주의자들이 정말 싫어하는 것은 분배가 불공정하게 된 상태고, 응보주의자들이 분노하는 것은 고통의 분배가 불공정한 상태다. 응보주의는 고통의 재분배에 대한 열망이다. 능력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응보주의적 열망도 강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똑같이 응분의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능력주의가 그럼 심할까? 점차 생존주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다.”
박찬욱 ‘복수 3부작’과 마동석 ‘범죄도시’ 차이점.
- 응보주의 서사는 철저히 도덕적이다.
-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을 보면, 모든 복수는 다 실패한다.
- 신형철은 “복수로 쾌감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적 작품”이라며 “반면 범죄도시 같은 작품은 응징에 성공한다. 악당을 잡고 나서 얼마나 시원하게 두들겨 패는지, 즉 공권력에 대한 판타지가 투영돼 있다. 이는 철저하게 도덕적 세계로써 성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대조했다.
- “박찬욱 작품을 보면, 말미에 과연 복수가 이뤄진 건가 질문을 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쪽으로 질문을 하게 된다. ‘왜 사건이 이렇게 된 걸까. 뭐가 문제였던 걸까.’ 인지적 접근을 시작하는 것이다.”
- 당대와 호흡·반응하는 이야기들은 시의적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대한 인지적 소득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결국 사라진다는 게 신형철 생각이다. 최근 인기를 얻은 K 드라마·영화들이 뇌리에서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 읽는 이유: 기꺼이 질 수 있는 사람이기 위해.
- AI와 알고리즘은 나와 맞는 콘텐츠와 사람, 장소를 추천한다. 구독자 역시 정서적 공감이 이뤄지지 않는 글, 영상, 콘텐츠는 중단에 차단한다.
- 그와 달리 문학의 목표는 정서적 공감이 아닌 인지적 공감에 있다. 다양한 사람의 경험을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인지적 공감이다.
- 신형철 표현을 빌리면, “타인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문학을 읽는다. 문학은 사람을 이해하는(understand) 과정이다. 신형철은 언더스탠딩 단어에서 ‘언더’를 강조했다. “언더라는 말은 옛날 영화에서는 ‘누군가의 사이’라는 뜻이었다. 언더스탠드는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나는 언더를 ‘밑으로’라고 해석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 “자연 재해 연구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이기는 것이다. 의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 혹은 문학의 이유는 내가 모르는 타인에 대해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지게 되는, 질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것 아닐까. 점점 더 질 수밖에 없는, 약점 많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게 문학 독서의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