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영화와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2025). (⌚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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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주 약한 수준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범죄 드라마는 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가. 범죄 드라마는 늘 대중의 시선을 붙잡는다.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은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건의 퍼즐을 맞추는 과정은 스릴과 정의의 욕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러나 질문이 거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단지 오락일 뿐이다. 진정 흥미로운 범죄 드라마는 ‘왜 이 범죄가 발생했는가’, ‘어떤 사회가 이를 가능하게 했는가’를 묻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이하 ‘사마귀’)은 이 근본적 질문을 집요하게 붙든다. 프랑스 드라마 ‘사마귀’ (La Mante)를 원작으로 했지만, 한국판은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제도와 감정, 그리고 기억의 문법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회적 스릴러다.
첫 장면부터 그 기조가 분명하다. 차가운 교도소 복도, 수감복을 입은 여성이 거울 앞에 선다. 그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자른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거울 속 그의 눈빛이 화면을 정면으로 뚫는다. 이어지는 내레이션:
“사람들은 나를 괴물이라 부르더군요.
사마귀, 극 중 정이신.
하지만 괴물을 만든 건, 당신들이에요.”
바로 정이신(고현정)이다. ‘사마귀’는 이 대사로부터 출발한다. 범죄의 주체가 아닌,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를 응시한다.

가족주의의 균열과 모성 신화의 붕괴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성역에 가깝다. 산업화, IMF, 팬데믹을 거쳐도 ‘가족은 마지막 남은 공동체’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희생과 억압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모성’은 헌신의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감금하는 가장 강력한 제도로 작동해 왔다.
‘사마귀’의 정이신은 이 신화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한때 평범한 주부이자 어머니였던 그녀는 남편의 폭력과 사회의 냉대 속에서 점점 무너진다. 그리고 마침내, 억압의 구조를 깨뜨리며 ‘살인자’가 된다. 법정 장면에서 정이신은 담담히 말한다:
“내가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일 자격까지 박탈할 순 없잖아요.”
그 말은 죄의 변명이 아니라, 모성 신화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다. 사회는 여성이 ‘좋은 어머니’의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비정상’으로 낙인찍는다. 정이신은 이 장면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대신 무표정 속의 미세한 떨림, 숨 고르기 사이의 정적이 법정의 공기를 바꾼다. 정이신의 침묵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침묵시켜 온 방식을 역전시킨다.
한편, 그녀의 아들 수열 (장동윤)은 어머니의 죄로 인해 낙인의 삶을 산다. 면접장에서 “혹시 그 사건의…”로 시작되는 질문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완의 문장은 이미 그의 인생을 정의한다.
“괴물의 자식은, 괴물로 살아야 하나요?”
‘사마귀’는 가족이 안전망이 아니라 사회적 감옥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가족은 사랑’이라는 신화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가족은 시스템’이라는 냉혹한 진실이 자리한다.

여성 범죄자, 두 번 처벌받다
여성이 범죄자가 되는 순간, 사회는 법보다 더 무거운 도덕적 심판을 내린다. 남성의 범죄는 사회적 병리로 해석되지만, 여성의 범죄는 즉시 여성다움을 잃은 ‘괴물’로 규정된다.
‘사마귀’는 이 이중 규율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언론은 정이신의 범죄를 다루며 ‘모성을 상실한 살인자’, ‘비정상적 여성’ 같은 수사를 반복한다. 기자회견 장면에서 한 남성 기자가 묻는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습니까?”
정이신은 냉소적으로 답한다.
“한 아이의 엄마라서, 더는 참을 수 없었죠.”
이 대사는 드라마 전체의 축을 바꾼다. 여성에게 모성을 강요하는 사회, 그 틀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쉽게 괴물로 만들어지는지를 고발한다.
고현정의 연기는 이 장면에서 특히 압도적이다. 감정의 과잉 대신 절제된 분노로 일관하며,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이자 공범으로서의 인간을 동시에 구현한다. 그의 눈빛은 냉정하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세대의 기억과 사회의 책임이 스며 있다.

권력과 감시, ‘안전’이라는 이름의 폭력
‘사마귀’는 경찰 수사극의 외형을 취하지만, 진정한 주제는 감시의 사회학이다. 드라마는 CCTV 화면, 인공지능 얼굴 인식 시스템, 데이터 분석 화면을 교차 편집하며 ‘감시국가’의 일상을 비춘다. 한 형사가 말한다:
“이 정도 감시는 당연하죠. 국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잖아요.”
이에 수열은 대답한다.
“그 국민 안에, 범죄자의 가족도 포함되나요?”
이 짧은 대화는 드라마의 윤리적 핵심이다. ‘안전’이라는 명분은 언제나 통제를 정당화한다. 감시는 보호를 위한 장치이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사마귀’는 또한 경찰 내부의 권력 구조를 폭로한다. 내부 비리, 과잉 수사, 언론 플레이는 ‘정의’의 이름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범죄와 권력은 서로를 반사하며, 폭력은 순환한다.

기억과 트라우마 — 사회적 상처의 재생산
‘사마귀’는 기억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정이신의 과거, 도현의 어린 시절, 피해자 가족의 분노 — 모두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다.
수열은 어머니가 체포되던 날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떠올린다. 빨간 구두, 비 내리는 골목,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군중의 비명. 화면은 붉은 조명과 푸른 조명이 교차하며, 과거와 현재의 상처가 겹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었어요.”
‘사마귀’는 이 플래시백을 통해 트라우마의 본질을 드러낸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기억이다. 언론, 대중, 제도는 정이신의 과거를 잊지 못하게 만들고, 그 기억은 수열의 현재를 계속 감금한다. 결국 ‘사마귀’는 묻는다. 이 질문은 범죄를 다루는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누가 죄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잊힐 권리를 갖는가?’

원작과 다른 한국판의 무게
프랑스 원작 ‘사마귀(La Mante)’는 개인의 속죄와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한국판 ‘사마귀’는 훨씬 더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다. 프랑스판의 ‘모자 관계’가 심리적 화해의 서사였다면, 한국판은 가족주의와 사회적 낙인의 비판적 탐구로 확장된다. 수열이 말한다:
“한국에선 용서보다 잊히는 게 더 어렵습니다.”
이 한마디가 한국판 ‘사마귀’의 핵심이다. 한국 사회에서 죄는 처벌과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낙인의 문제다. 정이신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사회는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가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사회가 잊지 않기 때문이다.
‘사마귀’는 원작의 플롯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적 맥락 속에서 전혀 다른 무게를 만들어낸다. ‘죄와 속죄’의 서사가 ‘기억과 사회적 폭력’의 이야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고현정이라는 시대의 얼굴/거울
‘사마귀’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배우 고현정 그 자체다. 1990년대 ‘모래시계'(1995) 속 보호받아야 할 청순가련한 여자로 시작해 2000년대 끝자락에 ‘선덕여왕'(2009) 속 ‘미실’을 통해 권력의 화신으로 변신을 꾀한 고현정은 2025년에 도착하자 마치 자기 자신의 사회적 상처에 대한 복수이자 치유인 것처럼 살인자 ‘정이신’을 연기한다.
‘사마귀’에서 고현정은 대한민국이 스스로 겪어온 시대적 흐름과 변화를 온몸으로 체현한다. 그녀의 연기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절제의 미학이다. 눈빛 하나로, 숨 한 번으로, 얼굴의 근육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관객을 압도한다. 그의 정이신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사회의 거울이다.
고현정은 드라마의 구조를 초월해 존재한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화면은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 듯한 밀도를 얻는다. 그녀의 침묵은 수많은 여성의 억눌린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녀의 냉정한 미소는 사회의 위선을 비추는 조용한 분노다.
‘사마귀’는 결코 편안한 드라마가 아니다. 여성 연쇄살인범, 가족의 낙인, 경찰 권력의 폭력성은 시청자의 안락한 몰입을 끊임없이 흔든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작품의 힘이다.
시청자는 어느 순간 ‘범인의 심리’를 좇는 대신,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를 바라본다. ‘우리 사회는 왜 이런 괴물을 만들어내는가’ — 이 질문은 불쾌하지만, 그 불쾌함이야말로 성찰의 시작이다. 정이신은 말한다:
“악은 사라지지 않아요. 다만 모양만 바뀔 뿐이죠.”

이 말은 단순한 극 중 대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자기 고백이다. ‘사마귀’는 범죄를 다루지만, 진짜 주제는 사회와 인간의 조건이다. 가족 제도의 억압, 젠더 불평등, 감시 권력, 기억의 폭력 — 이 모든 것이 교차하며 사회의 초상을 그린다. 드라마는 결국 묻는다.
‘범죄를 낳는 것은 개인인가, 아니면 사회인가?’
정이신은 감옥에 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감시의 일부다. 그녀의 유리벽은 우리의 거울이다. ‘사마귀’는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사회의 내면을 해부한다. 그 불편한 거울 속에서 우리는 결국 자신을 보게 된다.
마지막 장면. 정이신은 면회실의 유리벽 너머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 눈빛은 고요하지만 차갑다. 화면은 정지하고, 시청자는 그녀의 시선과 맞닥뜨린다. 그 순간, ‘사마귀’의 시선은 시청자를 향한다.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들이 만든 그림자예요.’
‘사마귀’는 범죄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한국 사회의 초상을 그린다. 고현정의 얼굴은 그 사회의 거울이자, 그 거울 속의 균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