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껍데기뿐인 삼권분립···함정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할 세 가지 제안. (은재호 / KAIST 겸직교수) (⏳5분)
2025년 대한민국은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중대한 상황에 직면했다. 대법원은 5월 1일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넘긴 뒤 불과 9일 만에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하고, 24시간도 되지 않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된 일련의 절차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과 절차적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으며, 법원이 현 정권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불을 지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5월 7일 서울고법이 파기환송심 심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함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희대의 난’이 정치적 파국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법부의 ‘굴욕’으로 기억될 것이다. 법원이 중립성과 공정성을 잃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 씁쓸한 것은 이 굴욕이 사법부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라는 이중 함정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의 초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초고속’의 충격과 ‘연기’의 역설, 사법의 정치화
현대 민주주의는 권력의 자의적 남용을 방지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삼권분립을 헌정 원리로 삼는다. 사법부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는 최후의 보루로서 국회와 행정부의 명령, 규칙, 처분 혹은 입법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법부가 정치적 책임과 사법적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고, 독립성과 중립성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정치인은 선거와 여론, 법률에 따른 감시와 시민 평가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지므로 명백한 위헌이나 위법이 아닌 이상 그 판단을 법원이 대신해선 안 된다는 원칙도 적용해야 한다(비사법성의 원칙 또는 민주적 정당성의 원리). 현실은 어떤가?
5월 1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대선 33일을 앞둔 시점에 이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불과 하루 만에 서울고법에서 재판부 배당을 완료한 것은 이것이 ‘정치적 셈법’에 따른 결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를 “대법원이 정치에 직접 뛰어든 사법의 정치화 사례”(이헌환 아주대 교수)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어진 서울고법의 연기 결정 역시 민주당의 강경한 반발 이후에 이뤄져 사법부가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반발하면서, 사법부는 여야 어느 쪽의 압력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는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 정치적 논란을 회피하려는 사법부의 결정조차 또 다른 정치적 결정으로 해석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번 사건은 법률 해석이 아니라, 판결의 시기와 맥락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작동했다는 점에서 사법의 정치화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법부가 이렇게 권력에 종속되거나 정치적 효과를 고려해 판단을 내리면 법치주의는 훼손되고 권력 남용의 유인은 커진다.
사법의 정치 도구화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그 폐해는 늘 치명적이다. 국민적 신뢰의 붕괴, 사회 갈등의 심화, 삼권분립의 무력화, 국론 분열을 불러오고 심지어 유혈 충돌 등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다.
정치권의 ‘하드볼 전략’과 정치의 사법화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법의 정치화 뒤에는 정치의 사법화가 도사리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란 본래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갈등과 긴장이 정당과 의회, 공론장에서 협상이나 합의로 해소되는 게 아니라 사법기관의 판결로 귀결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는 법률 해석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넘어 정책 결정의 최종 심급이자 사회 갈등의 최종 조정자로 변모하게 된다.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보자. 이 사안은 선관위와 국회, 언론과 시민사회의 공적(公的) 토론을 통해 충분히 검토하고 평가해야 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검찰 기소와 법정 공방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경기 청년 기본소득’ 정책 홍보와 관련한 ‘사전 선거운동’ 논란, 친형 강제 입원 관련 발언의 허위성 여부 등도 정치적 책임과 공적 논쟁의 영역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야와 보수·진보를 가릴 것 없이 한국의 정치권은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하드볼 정치를 선택하며 갈등 해결의 책임을 법정으로 넘긴 채 이를 ‘정당한 법 집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곤 했다.
하드볼 정치(hardball politics)란 타협과 합의의 공간을 축소하고, 법적·제도적·심리적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상대를 압박하거나 제약하는 강경한 정치 행위를 말한다. 이 전략은 토론과 설득보다 소송, 탄핵, 규칙 개정 등 제도적 장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며, 법과 제도의 경계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이때 통상적인 관행이나 관용은 철저히 배제되고 승자독식의 구도가 강화된다.

최근 핵심 법안의 헌법 심사를 헌법재판소에 넘기고, 선거 이슈가 연이어 재판정으로 넘어간 것은 모두 이 흐름, 한국 정치권의 하드볼 전략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하드볼 전략이 말 그대로 단단해지면 단단해질수록 정치는 고유의 기능을 잃고 오직 투쟁의 수단이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적 판단의 공백을 사법이 메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판단 시점, 파급 효과, 정치적 맥락 등을 고려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행위자로 변질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의 정치화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정치의 사법화를 심화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 악순환이 지속되는 한 일관된 법 해석과 삼권 간의 견제 기능은 마비되고, 법 앞의 평등은 허구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기관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없고,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국민의 신뢰와 국가 공동체는 그렇게 붕괴하고 해체된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세 가지 제안
민주주의의 퇴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사법부 모두의 각성이 필요하며, 동시에 헌정질서 전반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 요구된다. 실제로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후퇴는 각종 지표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발표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2023년 8.09점에서 2024년 7.75점으로 하락하며 22위에서 32위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법원 역할수행의 긍정 평가 역시 22%에서 20%로 내려앉았다(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
헌정질서와 법치주의가 위기에 처한 오늘 단지 엄중한 처벌이나 제도적 봉합만으로는 이 상처를 다 치유할 수 없다. 불법적인 12·3 비상계엄부터 이번 대법원 사건까지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시 세우기 위한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또한 집권 세력은 자기 권력을 절제하며 국민과 야당 앞에 겸손한 리더십으로 민주주의의 얼개를 기초부터 다듬어야 한다.

첫째, 권력기관 간 견제와 균형의 회복이 시급하다. 대통령의 긴급권 행사에 대한 제한 장치를 명확하게 마련하고, 국회와 사법부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권력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 현재처럼 의회 다수당이 주도하는 입법과 탄핵에 대통령이 무조건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고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극한 대립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악순환에 빠지게 하면 안 된다.
둘째,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결이 특정 정당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법관 인사 시스템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고, 시민감시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
특히 독일 ‘법관선출위원회’처럼 국회의원·법조계·시민대표가 참여해 법관 인선 과정을 공개적으로 심의하고 추천하는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임명 절차의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또, 사건 배당을 법관 전체 합의와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전환해 사법부 내 정치적 영향을 차단해야 한다. 검찰권이 민주적 통제 밖에서 초헌법적 지위를 누리는 현실을 고려하면 검찰 제도의 구조적 개혁도 비껴갈 수 없다.
셋째, 정치적 양극화 해소와 헌법의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가 절실하다. 싱가포르 ‘국민 대화’처럼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헌법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consensus) 수준을 재확인해야 한다. 이 합의는 국회 입법, 정부 정책, 사회적 실천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불법 계엄에서 시작된 헌정 위기 속에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은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나 권력구조의 취약성, 정치적 양극화, 사법부의 신뢰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권력기관 간 견제와 균형, 사법부의 중립성, 사회협약을 통한 공동체 가치의 재확인을 이룰 때 이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 수 있다. 제로섬 게임이 난무하는 오늘의 혼란 속에서도 헌법과 법치, 국민주권의 가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