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칼럼] ‘MBC뉴스 속시원하다’는 칭찬,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은 이유. (조의명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보도민실위 간사) (⏳4분)
“뭐가 나왔다고 거기서, 겁나 험한 게”
4월 11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남동 관저에서 퇴거하는 장면을 중계방송으로 지켜봤다. 솔직히 반성과 사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기나긴 망상에서 깨어나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고야만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면 속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선장군처럼 손을 치켜들며 지지자들의 환호를 만끽했다. 소름끼치게도. 군경을 동원해 헌법기관을 침탈하고, 헌법수호 책무를 저버리고, 국민 신임을 배반한 자가 끝내 관저에서 쫓겨나는 와중에도 “다 이기고 돌아왔다”며 으스댈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과거 호송차를 타고 구속 수감되던 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은 며칠 사이 십 수 년을 늙어버린 듯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시대의 뒤안길로 쫓겨나는 철지난 권위주의의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지금 윤석열의 행태는… 그가 말하는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윤석열은 기어이 대한민국 사회에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의 씨앗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불법 계엄에 동조하거나 방조한 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정부 곳곳의 요직을 그대로 꿰차고 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는 끝난 게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투사와 기자 사이, 내란사태 123일을 돌아보며
윤석열 정권 3년은 언론 종사자 입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았고, 공영방송은 침략당했다. TBS가, KBS가, YTN이 차례로 무너졌다. 비판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입틀막’의 표적이 되었고, 방통위와 방심위, 검찰은 사냥개처럼 주인의 손짓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기자들을 물어뜯었다.
기성 언론이 움츠러든 빈자리를 차지한 극우 매체들은 경쟁하듯 극단의 언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언론장악은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지록위마의 고사처럼,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해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윤석열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언론들이 우호적 스피커 노릇을 해줄 거라는 오만함으로 계엄을 선포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언론은 이미 계엄 치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윤석열은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렀다. 대통령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장한 특전사 대원들이 국회 창문을 깨고 난입했을 때 이를 옹호한 언론은 거의 전무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평소 통했던 것처럼 ‘달 그림자’ 운운하며 아무 일 없었다고 모든 것을 부인했지만, 이번엔 차마 이 뻔뻔한 수작을 받아줄 만큼 비위 좋은 매체는 많지 않았다. 그날 밤 국회를 지킨 시민들이 있었고, 생전 처음 겪는 계엄 속에서도 카메라를 내리지 않은 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을 취재하다 계엄군에게 위협당하자 MBC 전인제 영상기자가 던졌던 한 마디를 기억한다. “저희가 기록 안 하면 누가 하나요?”
이들의 분투 덕분에 우리 모두가 범죄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었다. 전 국민이 내란의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오늘은 지금과 180도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정직한 현장의 기록은 백 마디 주장을 압도하고, 거짓말과 궤변을 정면으로 깨부쉈다. 윤석열이 불러온 분열과 혼란이 그가 그토록 파괴하려 애썼던 공공 미디어의 사회적 효용을 국민들에게 일깨워준 셈이다. 지난 120일, 우리는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누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는지 선명하게 구분해낼 수 있게 됐다. 내란사태를 겪으며 우리 사회가 얻은 소득이다.
“괴물과 싸우다 우리 또한 괴물이 되지 않도록”

▲ 2025년 4월 4일자 MBC ‘뉴스데스크’ 첫 리포트 화면 갈무리 ©MBC
12·3 계엄과 이후 벌어진 일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충격을 주었다. 언제나 시스템 뒤에 숨어 작용하던 국가 폭력이 노골적으로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까지 어느 하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기자의 섣부른 판단과 단정을 배제하고 사안의 양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 시청자의 현명한 판단을 돕는다는 통상적인 보도 관행이 작동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해서 전개됐다.
그래서 계엄 선포 이후 MBC 뉴스룸은 전쟁터가 됐다. 상식과 비상식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균형 보도’할 방법을 찾지 못한 우리는 투사처럼 내란세력과 ‘싸웠다’. 우리 뉴스는 평소보다 더 감정적이었고, 때론 평소보다 거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요즘 MBC뉴스는 시원해서 좋다’는 시청자의 칭찬에 뿌듯하기보다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조금 답답하고 미련해 보이더라도 주장보다 팩트를, 감정보다 사실을 담자는 뉴스의 원칙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장은 넘쳐나고 진실이 희귀한 시대다. 준엄한 꾸짖음 한 줄을 지우고, 한 땀 더 취재한 팩트로 그 자리를 채웠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란사태를 보도한 한 사람의 기자로서 반성하는 부분이다. 당장 코 앞에 놓인 대선 일정이 걱정이다. 부디 우리가 내란동조 세력과 맞서는 투사가 아니라 균형 잡힌 기사를 쓰는 기자 노릇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최근 강연에서 재판할 때 국민 정서나 정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야만이 지배할 때 다수의 의견이 기준일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어느 경우에나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내린 결정을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분별력, 경청, 그리고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단 법관 뿐 아니라 앞으로도 한동안 야만의 시대를 헤쳐가야 할 언론인들이 새겨야 할 금언이라고 생각한다. 반성 없는 힘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모두가 보았다. 우리가 당당히 불의에 맞설 용기 뿐 아니라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성찰할 용기를 갖길 소망한다.
민언련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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