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공존을 위해 인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 혐오와 증오의 확장을 막고 고립시키는 게 공동체의 과제. (⏳4분)

편집자 주.

정희진(여성학자)의 경향신문 칼럼 [내전과 공존]에 대한 강성현(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의 글입니다.

정희진은 “단호한 대처는 진짜 내전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면서 “지금 한국 상황에서 최선은 공존에의 의지”고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제안했습니다.  

강성현은 “극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극우의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왜 “단호한 대처”를 폭력적으로, 물리적인 것으로 상상할까?
왜 ‘공존’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상호 인정’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할까?

과거 나는 잘 알고 지냈던 일부 ‘역사 수정주의자’들과 토론을 시도하며, 서로 인정하고 거리를 좁혀보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뉴라이트와 극우 비판 때문에 종종 표적이 되어 마음고생했고, 공포감을 느끼던 시간도 있었다.

Free public domain CC0 photo.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폭력에 휘둘린다.

지금 나는 그들과 직접적으로 논쟁하지 않는다. 논리나 방법으로 대화하며 공통의 감각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었다. 만약 말과 글로 논쟁이 벌어진다면, 난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한다. 논문과 책을 쓰고, 페북이나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활용하며, 필요하면 방송과 신문, 미디어에 기획을 제안하거나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각오를 하고 대응한다. 악의를 가진 혐오 집단과 마주할 때, ‘단호하게’라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그들이 쏟아내는 폭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대응의 대상은 뉴라이트나 극우가 아니라, 그들과의 충돌을 지켜보는 토론 가능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싸운다. 나는 뉴라이트나 극우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또 다른 혐오, 증오 발화로 대응할 생각이 없다. 그들의 폭언과 위협 속에서도, 폭력을 감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자리에서, 또는 그 옆자리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뉴라이트나 극우들을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거나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기는 정신 승리이고, 그들에게 하는 어떠한 말글의 논리도 무화되기 때문이다.

‘공존’이란 무엇인가? 나는 극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과의 공존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처한 상황인 것이고, 그렇다고 공존을 위해서 상호 인정까지 할 생각은 없다. 현재 극우가 표적 집단에게 저지르는 부정과 타자화, 비인간화는 자칫하면 끔찍한 물리적, 사회적 파괴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1.19 서부지법 폭동에서 그런 에너지를 느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는 대응, 아니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2025.1.19 서울서부지방법원 극우 폭동 사태.

급진적인 것과 극단적인 것은 다르다.

얼마 전 KKK와 대화하며 친구가 되었다는 사례들을 접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지만, 나는 그것이 특수한 경우라고 본다. 그런 사례들을 통해 어디까지 성찰할 수 있을지 누군가는 극한에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상대와의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한계까지 지속해야 그들에게 나와 우리를 이해시키고 공존할 수 있을까? 만약 극우가 변화한다면, 그때 비로소 대화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극우 관련 조사와 분석에서 나는 현재 극우 대중의 절반 정도만이 극단적인 의미에서 우파라고 분석한 걸 읽었다.

나는 극우를 단순히 ‘급진적인(radical)’ 우파 사상과 생각을 가진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 급진적 우파는 특정 집단을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수법을 퍼뜨리고 행하는 이들이다. 나의 대응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내 눈앞에서 물리적으로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와 수법이 왜곡과 사기로 점철되어 있음을 폭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extreme)’ 우파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 그들은 혐오를 넘어 타자를 비인간화하고, 린치하며, 굴복시키려 한다. 심지어 죽이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존’과 ‘상호인정’이 과연 가능한가? 타자화되고 폭력에 스러져간 집단은 살아 있다면, 그냥 숨 쉬고 사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냥 살아진다”라는 말이 난 너무 싫었다.

제주 출신 연구자로서 나는 국가 폭력과 극우 집단의 폭력이 결합하는 지점을 연구해 왔다. 현재 극우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도 불사하는 모습은 역사 속 가해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그들은 반공청년단, 백골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그게 힘이 세 보이고 쿨하다고 생각해 과거 가해자 집단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언어의 내란 시대, 정치적 사회적 담론 투쟁을 해야 한다.

나는 극우의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재로선 요건과 절차에 따라서 형식적으로, 때로는 기층 사회적 약자 집단의 누군가에게 폭력적으로 자행되기도 했던 ‘법’에 그 역할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법 기술자들의 ‘법률 전쟁’이 극우들을 돕는 이 상황에서 헌법과 법률, 그리고 이의 요건과 절차에 따른 형사절차에 기댄다는 것은 어쩌면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법치주의 앞에 ‘민주적’이라는 말을 붙여 민주적 헌정질서를 존중하고 그 취지에 따른 법 집행을 더 강조할 수밖에 없는 궁색한 상황이다. 동시에 현재로선 그게 나의 단호한 대응의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전부는 아니기에 언어의 내란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담론 투쟁을 해야 한다.

나는 법적인 진실 규명과 이에 따른 법적 해결이 전부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역사적, 사회적 진실의 차원은 더 입체적이고, 극우의 폭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두고, 이에 맞서 어떻게 대처하고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극우의 얼굴은 특정 극우 목사, 유튜버, 정치인 등의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극우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해 온 분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극단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나는 앞서 말한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응할 것이다. 폭력적인 방식의 맞다툼이 아닌 채 얼마든지 단호하고 조직적인 대응을 할 수 있고, 그렇게 극우의 확산을 막고 고립되게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휘말려 들어갔지만, 이탈하는 그 누군가를 대면하고 상호 인정하기 위해 공존을 다른 의미로 확장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단호한 대응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필요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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