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착취적 대한민국 만드는 포용 사회의 적···내란으로 만천하에 민낯 드러나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5분)
성숙한 민주주의는 국가의 번영과 지속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라는 것이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의 성과다.
정치와 경제는 따로 가지 않고 함께 간다. 정치가 독재와 권위주의를 향할 때 경제발전은 멈추고 특권과 착취가 횡행하는 저개발국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될 때 혁신과 발전이 이어지고 경제적 번영과 선진화가 지속된다. 바로 이것이 노벨경제학상으로 빛나는 정치와 경제발전의 기본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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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번영은 한몸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바로 이 기본 원리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현실로 보여준다. 침략국의 수탈과 전쟁의 폐허 속 세계 최빈국이 21세기 글로벌 주요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한 유일한 사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독재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정치개혁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은 하루아침에 군법이 지배하는 무지막지한 나라로 전락할 뻔했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없음이 현저히 명백했던 12월 3일 늦은 밤, 대통령은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포고문은 국회와 지방의회 등 일체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반헌법적 조항을 담았다. 무장한 특수부대가 총부리를 시민과 의회에 겨누며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장면을 당시 의회를 지키려고 모여든 수천 명의 시민, 그리고 모든 국민이 매체를 통해 목격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민주주의와 포용적 제도로 발전한 모범 사례,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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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과 수구세력이 발전의 길 가로막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포용성에는 물론 다양한 단계가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통해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이 된 모범사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진국 경제의 발전을 지속하려면 그에 걸맞게 제도의 포용성을 높여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 그리고 공정한 시장경제로 개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경제발전은 “전환적이고 안정을 거부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다. 따라서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경제 기득권과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 수구세력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아야만 경제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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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득권과 수구세력이 발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착취적 현실이다. 착취적 노동시장, 착취적 기업 간 거래, 착취적 플랫폼 경제, 착취적 지역 불균형, 그리고 교육, 의료, 삶의 질 등 착취적 격차 사회가 우리가 매일 피부로 느끼는 대한민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이런 착취적 대한민국을 만드는 포용 사회의 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재벌과 대기업 집단의 세습 경제다. 둘째는 세습 족벌 언론 그리고 세습 대형 종교 단체다. 이 세습 권력이 돈, 정보 그리고 신념을 지배하여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의 특권을 지키는 최첨병이 된다. 셋째는 공권력의 암시장을 지배하는 검찰, 사법, 금융 등 슈퍼 공권력 엘리트 집단이다. 국민이 부여한 공권력이 이들에 의해 돈과 자본의 질서를 지키는 창과 방패로 전락한다. 넷째는 착취적 정치, 오염된 민주주의다. 편향된 정책 지형, 불공평한 대표성, 그리고 독재적 권위주의와 파시즘을 전파하는 보수 정치가 착취적 정치의 온상이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공약이 이 나라에서는 좌파 공약으로 분류된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거나 중도 복지 공약도 좌파 사회주의 공약으로 낙인찍힌다. 노동자 혹은 노조를 대표하는 목소리는 언론과 정치에서 극히 미미하지만, 대기업과 재벌을 대표하는 목소리는 어마어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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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네 가지 얼굴
정치가 모든 계층을 공평하게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인이 평균적으로 30억 원에 가까운 자산가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건설업, 부동산 개발 등 이익단체를 대변해야 할 사람이 국회에 입성하여 입법 활동을 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의 원인, 그리고 그 자체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수 정치를 오염시키는 부패한 이념, 독재적 권위주의와 파시즘이다. 그리고 이 보수의 탈을 쓴 파시즘의 부역자 정치가 돈과 자본, 세습 언론 그리고 세습 종교와 담합하여 포용 사회로의 개혁을 가로막는 거대한 힘을 형성한다.
포용 사회로의 개혁을 위해 이런 파시즘을 정치에서 퇴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파시즘의 네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일본 침략주의 파시즘과 그 부역 세력을 미화하는 얼굴이다. 둘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얼굴이다. 셋째는 개혁 세력을 악마화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넷째는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지우거나 부정하는 얼굴이다. 특권과 착취적 질서를 옹립하는 역사를 미화하고 개혁과 민주주의의 역사에 먹칠하는 선전 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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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파시즘의 네 얼굴이 21세기 대한민국 보수 정치를 대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임기 후 중대 부패 범죄로 수감된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이 이끈 정부에서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부상했다. 이들은 파시즘의 네 얼굴을 모두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고 노무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범죄자 몰이,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는 파시즘의 세 번째 얼굴이다. 시대에 역행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 그리고 제주 4.3 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정치인과 보수 인사들의 반복되는 망언과 만행은 파시즘의 네 번째 얼굴로 기억된다.
윤석열 친위대로 전락한 검찰
윤석열 정부에서 이 파시즘의 네 얼굴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폭력적이었다. 뉴라이트 세력을 정권의 홍위병처럼 전면에 배치했다. 독립기념관, 진실화해위원회 등에까지 뉴라이트 인사를 임명하여 기관의 명예를 훼손하고 그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검찰은 윤 정부의 행동대장이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윤석열은 검찰총장직을 맡을 때부터 조직의 수사 기소권을 동원하여 가장 큰 정치 성과를 획득한 자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사정기관으로서 검찰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이다.
정적이나 비판 세력에 대한 수사에 검찰 조직을 마구잡이식으로 동원하고 입증되지도 않은 피의사실을 유포하여, 결과적으로 수사의 표적이 된 사람을 악마화했다. 정적과 비판 인사에 중대범죄 혐의를 씌워 수백 번까지 압수 수색하고도 중대범죄는 찾지도 못하는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모해위증을 교사하거나 간첩을 조작하는 등 파시즘 폭력의 끝판왕 정치 검사들도 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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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검찰의 반인권적 수사 방식에 대한 족쇄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 파시즘은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로 그 본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았다.
21세기 대한민국 보수 정당의 집권기에 빠짐없이 확인된 파시즘은 보수 정치의 한 중앙에서 특권과 부패를 지속하고 착취적 사회를 옹립했다.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보수 정치는 시대착오적 파시즘과 결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앙대 신진욱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언제든 독재로 회귀할 수 있는 사회”를 피할 수 없다.
하루빨리 파시즘의 네 얼굴을 한 부역자들을 모두 퇴장시키고 진정한 보수 정치의 새 얼굴로 교체해야 한다. 이렇게 보수 정치가 바로 서고 착취적 정치가 포용적 정치로 탈바꿈한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숙이 지속되는 포용과 번영의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