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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운 칼럼] 15년 차 반도체 노동자의 희귀암 ‘부신암’ 첫 산재 인정. 1심 법원은 직접 인과관계 없이 산재를 인정했습니다. 반가움도 잠시, 공단은 항소한다고 합니다. 사건을 담당한 임자운 변호사가 사건의 쟁점과 과정, SK와 삼성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1.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변호사는 판사 앞에서 자주 ‘간곡’해진다. 재판부에 어떤 요청을 할 때 습관적으로 ‘간곡하게 요청합니다’라고 한다. 특히 이 사건에서 난 여러 번 간곡했었다. 재판부에 요청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작업환경을 조사하지 않았던 탓에, 소송 절차에서라도 법원의 권한을 빌어 뒤늦은 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단은 이 사건 처리를 불과 2개월여 만에 끝냈었다. “부신암에 대한 직업적 원인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빠르게 불승인해 버렸다. 같은 이유로 ‘업무관련성 전문조사’ 마저 생략했다. ‘재해조사서’라는 게 있긴 한데 노동자ㆍ회사 측 진술을 옮겨 붙인 수준에 불과했다.

부신암의 직업적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관련 연구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부신암의 ‘희귀성’ 때문이었다. 국내 통계를 보면 전체 암 발병 사례 중에서도 0.1%에 불과하다. 유병자 수가 워낙 적으니 연구할 유인도 작았을 테고, 연구를 설계하기도 어려웠던 거다. 공단은 질병 자체가 갖는 그러한 한계를 조사 생략과 산재불승인의 근거로 빌미를 삼아서 벌였다. 이런 이유로 전문조사마저 생략한 것은 다른 직업병 사건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이었다.

2. 희귀한 ‘부신암’ 걸린 16년 차 반도체 노동자

그래서 난 소송 절차에서 근로복지공단, 고용노동부, 회사 등등에 대한 구석명, 사실조회, 문서송부촉탁, 문서제출명령 등등을 신청했다. 2022년 4월부터 24년 3월까지, 2년여를 그렇게 보냈다.

그렇게 받아낸 자료와 국내 반도체 사업장에 대한 기존 연구자료들을 토대로 A의 작업환경에 존재하였을 44종의 유해물질(8종은 발암물질)을 정리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체 사업장의 유해성, 특히 공정 엔지니어의 작업환경 문제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대략 이런 취지의 주장을 했다. A는 무려 16년간 이런 환경에서 일했다. 현재 접근 가능한 자료로 확인되는 문제가 이러하니, 그의 과거 작업환경에 실존했던 문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 ‘부신암’이라는 희귀암에 걸렸다. A에게 그 병의 원인으로 의심할 만한 개인적 요인은 없었다.

자, 그렇다면 A의 부신암과 반도체 생산라인 작업환경의 관련성을 추단하여, 치료비, 생계비 정도는 지원해 주는 것이 산재보험 제도의 운용 목적에 맞지 않는가? 작업환경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입증하라고? 공단 측이 조사를 안 해서 뭘 더 알 수 없는 거잖아. 드러난 유해물질과 부신암의 관련성이 의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부신암에 대한 연구 자체가 이뤄지지 않을 걸 어쩌라고.

3. 관련성 ‘알 수 없음’ vs. 관련성 ‘없음’

소송 말미가 되니 공단 측은 (역시나) 진료기록 감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에게 A의 부신암이 직업병이 맞는지 물어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반대했다. 의학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연구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다.

그럼에도 공단 측은 모 학회에 A의 작업환경에서 확인된 일부 물질과 부신암의 연관성에 대해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 있는지” 묻는 사실조회 신청을 하였는데, 재판부가 이를 채택하려 하자, 나는 곧 그 학회에 같이 보내줄 것을 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A의 작업환경이 어떠했고 이번 사실조회가 어떤 취지에서 신청된 것인지 설명하며, 상병의 업무관련성 판단에 참고할 수 있는 연구자료가 없다면 ‘상병의 직업적 원인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바 없음’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관련성 ‘알 수 없음’을 관련성 ‘없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그 학회는 사실조회를 반송해 버렸고(답변하기 어렵다며), 그렇게 재판은 종결되었다.

4. A의 부신암은 업무상 질병이다(1심 판결)

지난달, 서울행정법원(판사 윤성진)은 A의 부신암은 업무상질병이 맞다고 판결했다. 판결문 내용 중 몇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A가 취급한 유해물질의 안전보건 자료에) 상병과 관련된 유해성에 대한 내용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위 유해물질이 이 사건 상병과 무관하다고 볼 사정이라 보기는 어렵다.”

서울행정법원(판사 윤성진, 1심)

“(근로복지공단은) 전문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고, 단지 이 사건 상병이 유해물질 등과 같은 환경적 요인으로 발생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만 이 사건 처분에 이르렀던바, 이와 같은 점도 상당인과관계 존부 판단에 있어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인과관계 판단에 있어 첨단산업의 불확실한 위험을 대비하여 근로자의 희생을 보상하면서 첨단산업의 발전을 장려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사회적 기능을 규범적으로 조화롭게 반영하여야 하는 점 등까지 함께 고려하면, (상병과 업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와 같음.

변호사로서는 당연히 고민하는 판사가 반갑다. 기존 법리(판례)에 사건을 끼워서 맞추려 하지 않고, 사건의 면면을 잘 검토하고 관련 법리가 무엇인가도 두루 살펴본 후, 구체적으로 타당한 결론과 법리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는 판사. 이 사건은 사실 반도체 직업병 사건에서 나타나는 여러 어려움이 가장 크게 중첩된 사건이었음에도, 재판부는 잘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송 진행 중에도 그런 고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위와 같은 문구들이 그 고민의 결과겠다 싶다.

5. 삼성과 달랐던 SK의 문의

판결이 선고되고 MBC, 경향 등 몇 개 언론사에서 보도가 나간 후,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하이닉스 측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판결 소식을 들었다며, 과거 작업환경 중 어떤 부분이 문제였던 것인지, 지금 고칠 부분은 없는지, 알고 싶다 했다. 참으로 반가운 연락이었다. 산재보험 제도의 순기능이 작동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별수 없이 ‘삼성’과 또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의 원조 격인 삼성은 단 한 번도 그런 반응을 보인 적 없었다. 비슷한 모습조차 없었다. 이를테면 삼성에서 최초의 산재 인정 판결(2011년 6월. 고 황유미 사건)이 나온 직후, 삼성은 뭘 했던가. 해외 컨설팅 업체(인바이런)를 앞세워 ‘백혈병과 작업환경은 무관하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었다. 그 외에도 두 회사의 기본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사건들은 많았다. 특히 2014, 15년에 두 회사가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확연하게 달랐다(임자운, 프레시안, SK는 하고 삼성은 하지 못한 것, 2016).

생각해 보면 직업병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보였던 태도 차이가 많은 것을 갈랐던 것 같다. 하이닉스는 뭐가 문제인지 궁금해하며 알아보고 개선하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삼성은 처음부터 ‘(직업병)아니다’, ‘(공장 작업환경에)아무 문제 없다’는 답부터 내리고 그걸 관철하려고만 했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 차이가 좁혀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하이닉스 측의 이러한 연락이 반가울밖에. 어찌 보면 참 상식적인 반응인 건데, 삼성 덕에 아주 특별하게 비쳤달까. 암튼 오랜 반올림 활동에서 기억해 둘만한 순간이었다.

6. 삼성과 닮은 공단의 항소

어제(11일) 근로복지공단은 이 사건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뭐 그럴 수 있다. 다만 벌써 짜증 나는 것은 공단이 항소심에서 어떤 주장을 펼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1심 판결이 지적한 절차상의 문제, 그러니까 ‘질병의 환경 요인에 대해 연구된 게 없음을 이유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불승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된다, 그렇게 해도 적법하다, 따위의 주장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부신암과 작업환경의 관련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그 입증은 노동자가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일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면? 계속 그렇게 처분할 것이다. 법원으로부터 그 적법성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질병 판정 절차에 대해, 법원은 특히 반도체 직업병 사건에서 여러 차례 그 문제점을 지적했었다. 누적된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법원도 한마디 한 것이었으니, 공단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단일 사건의 승/패 문제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은 닮은 면이 있다. 문제점이 분명하게 지적되어도 이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게 참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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