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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힘 빠진 상태였는데,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제도와 관습이 알고 보니 별거 아니구나, 이건 아니구나. 그런데 뭔가 바꿔볼 수 있는, 그런 근사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저런 변화도 가능하구나, 그런 걸 이 책에서 발견했다고 할까요.”

최근 몇몇 지인들에게 저렇게 떠들었다. 이 책은 우연히 사촌 동생을 가르치려고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시작한 금융맨 살만 칸이 빌 게이츠까지 감탄하는 엄청난 대박을 터뜨려 새로운 교육혁명을 이끌어가는 내용이다. 한 줄로 요약해도 영화 같고, 대단한 성공담이다. 더구나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니 국경을 넘어 온 세상 부모들이 열광할 지경이다.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

다만 이렇게 짧게 정리하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있지 않겠나. 피가 다시 끓게 하는 그 무언가가 말이다.

지금 교육 현장은

“너무 많은 영리하고 의욕적인 아이들이 교육과정에서 푸대접을 받는다. 너무 많은 아이들의 자존심이 짓밟힌다. 심지어 많은 ‘성공적인’ 학생들조차 사실 별로 배우는 것도 없이 좋은 점수를 땄다고 고백한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학교나 직장의 지루함 때문에..호기심을 잃고 만다.” (22쪽)

내 중학생 딸은 수학에서 어려움을 분명 겪고 있다. 어딘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진도를 나가는 것 같다.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모르는 건 반드시 묻고 물으라 했지만 잘 못하는 눈치다. 하지만 수학이란 어딘가 구멍을 메꾸지 않고 달려가서는 탑을 세울 수 없다. 칸의 사촌 동생도 그랬다. 그 구멍을 찾아 메꿔주자 쑥쑥 달려갔다. 그런데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일대일로 저렇게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진도는 언제나 그냥 나간다.

칸 아카데미 설립자 살만 칸 (출처: KurzweilAl)
칸 아카데미 설립자 살만 칸(Salman Khan) (출처: KurzweilAl)

칸은 여기서 문제를 제기한다. 왜 이런 방식으로만 학교가 운영되지? 똑같이 가르치고 알아듣는 아이는 우등생으로, 못 알아듣고 구멍이 생긴 아이는 열등생으로 취급한 채 등수를 매긴다. 이게 ‘교육’인가?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의 집중력은 10~15분이 최고조라는데, 왜 1시간씩 수업이 이뤄질까. 왜 아직도 학생들이 시간 대부분을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야 할까.

“표준 교육모델은 매우 완고하고 획일적이다… 학생들의 ‘등급’이 나뉘고, 인간의 지성과 상상력, 재능을 특징짓는 경이로운 다양성과 미묘한 차이는 완전히 무시된다.” (87쪽)

교육 시스템의 ‘목적’은

“우리가 당연시하며 얽매여 있는 엄격한 격식, 즉 수업 일과 학년의 길이, 하루를 수업시간으로 나누고 지식 분야를 ‘과목’으로 자른 것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프러시아에서 우리의 기본적 교실모델이 만들어졌다. 애초에 공교육은 독립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교사, 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왕의 권위에 굴복하는 가치를 배워 충성스럽고 다루기 쉬운 시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도입됐다.” (99쪽)

“1893년에서 1979년까지 공립학교에서 교육 관행이 거의 같은 채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는 1979년에서 2012년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58쪽)

공교육이 문제란 생각은 오래 해왔지만 이런 뿌리는 처음 알았다. 칸은 ‘수업시간’이라는 신성불가침한 개념조차 “끝없는 개입을 통해 배움에 대한 자발성이 약해지도록” 도입됐다는 연구를 인용한다. 정해진 커리큘럼 이상 탐구하거나 이단과 위험한 생각을 토론할 시간이 없어야 했다고 한다. 계획적으로 질서가 호기심보다 조직화가 개인의 자주성보다 우선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배움이란 건 이보다 훨씬 근사한 일이어야 마땅했다는 것이 칸의 주장이다. 설렘과 놀라움의 감각을 발전시키는 학습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놀라움의 감각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가장 높은 목표가 되어야 한다”며 “이를 키우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우리 교육체제가 지닌 가장 큰 비극”이라고 지적한다. 세상의 이치를, 우주의 원리를, 그 깊은 뜻을 탐구하는 것이 왜 지겹고 지루한 일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줄 세워져야 하는 일일까.

헌 교육 대신 새 교육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제까지 너무 똑똑할 필요 없이 노동력을 착실하게 제공할 수준의 시민을 육성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바야흐로 ‘창조경제(!)’의 시대이다. “창의적이고, 호기심 많고, 스스로 주도하여 평생학습을 하면서 참신한 생각을 구상하고 시행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한데 이는 “프러시아식 모델이 적극적으로 억눌러온 종류의 학생”이다. 일단 시장과 사회의 필요가 확 달라지고 있는 시대란 거다.

지금 현재의 교육 체제도 알고 보면, 시대적 배경에 따라 등장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교육기관과 교육모델들은 대변혁의 전환기에 등장했다. 하버드와 예일대는 북미 식민지화 직후 설립됐다. MIT, 스탠퍼드, 그리고 주립대 시스템은 산업혁명과 미국 영토확장의 산물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는 역사상 가장 중대한 변곡점인 ‘정보혁명’의 초입에 있다.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이 혁명에서 깊은 창의력과 분석적 사고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나 사치스러운 것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기술이다.” (17쪽)

칸의 실험이 성공한 배경은 물론 인터넷이다. 그는 2006년 첫 동영상을 올렸는데 현재 집계로는 23개 언어 자막으로 4,000여 개 무료 수업 동영상이 ‘칸 아카데미’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동영상 누적 재생 수는 2억 4,200만 회를 돌파했다. 빌 게이츠는 아이들과 이 수업을 매일 들으며 대수학에서 생물학까지 섭렵했고,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650만 달러를 후원했다.


TED.com – 살만 칸: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 영상을 이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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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칸의 TED 강연이 끝날쯤 빌 게이츠가 깜짝 등장해 “나는 교육의 미래를 보았다”고 극찬한 것은 완전 드라마 같은 일이다. 실상 과목별로, 수업시간별로 자르는 것이 아니라 과목 간 연계하여,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 수 있도록, 질문이 이어지도록 이끌고 간다거나 집중력이 유지되는 10~15분의 짧은 영상으로 구성된 것도 인터넷이니 가능했다. x와 y를 푸는 수식이 결국 우주공간 미립자 운동량을 계산한다거나 새로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 이용된다니 더 흥미롭지 않은가. 질병의 유전확률을 다루는 개념이 미식축구의 공격기회 판단을 구하는 것과 같다면?

이런 식의 교육은 아이들의 뭔가를 건드렸다. 결과야 뻔하지 않은가.

“가장 더딘 아이들 중 하나 마르셀라는… 그러고 나서 뭔가가 건드려졌다. 그건 인간 지성의 아주 멋진 신비의 일부다. 마르셀라는 그런 ‘아하’하는 순간들 중 하나를 겪었고, 그때부터 교실 안의 거의 모든 사람보다 빨리 발전했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 마르셀라는 모든 학생들 가운데 두 번째로 잘하는 학생이었다. 게다가 진정한 재능을 암시하는 수학적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179쪽)

놀라운 성적 상승을 겪은 오클랜드 학교의 한 교사는 “우리는 칸 아카데미의 이용이 학생들의 성격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다. 책임감이 무관심을 대체하고 게으름의 자리를 노력이 채웠다”고 했다.

더불어 함께, 즐거운 교육

정해진 학기제, 수업제에서는 어떤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다. 열등생에게 추가 교육을 하지 않듯 우등생에 대한 배려도 없다. 우열반을 가르자고? 그럴 리가. 사실은 그렇게 편을 갈라놓는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자기 본능을 따르고 자신의 능력대로 새로운 도전을 해낸다면, 아이들은 더 배우고, 호기심과 상상력은 더 커지지 않겠는가? 교육이 궁극적으로 봉사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교육의 주목적은 학교 이사회와 교감이 안전지대에 머물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인가?” (224-225쪽)

못하고 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즐겁게 어느 수준까지 배움을 지속하느냐가 문제다. 친구를 누르고 이기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배움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여유, 거기서 나오는 훨씬 더 진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상상하는 나이가 뒤섞인 커다란 학급들은 학습의 중요한 부분이 학생들끼리 가르치기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학업 이력 기록에는 이 학생들끼리 가르치기도 포함해서 학생이 스스로에게 들인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일도 기록하고 존중해야 한다. 너그러운 학생은 너그러운 동료로 자랄 것이다. 학교에서 의사소통에 능한 학생은 인생에서도 잘 소통할 것이다… 만약 내가 입학사정관 또는 인사 담당자라면 지원자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 베풀고, 자신의 목표뿐 아니라 지역사회나 팀의 공익을 추구하는 성향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싶다.“

ban_ mackerels[고등어를 금하노라]라는 책이 떠오른다. 하향 평준화 논란에 우열반을 나눌 상황에서 독일의 학교는 아이들끼리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서로 묻고 가르쳐주며 협동을 통해 창조적 공부를 경험했다. 낙제생들도 궁극적으로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저자는 “이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얻게 된 자신감과 자부심을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살아남도록, 도태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과연 교육일까?

그렇다면 이런 꿈 같은 교육을 한국 사회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칸 아카데미는 또 다른 ‘인강(인터넷강의)’으로서 애들 부담만 늘리게 되지는 않을까? 속도 차이는 있더라도 모두 상위권이 된다면 대학 진학은 어떻게 되지?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묻자. 대학 서열은 필요한 것일까? 이런 성적순으로 사람 뽑는 우리 시스템은 지속 가능한가? 창의적 인재를 키운다면서 이 방식은 맞는 것일까? 지금 교육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대한민국에 과연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바꾸지 못할 건 뭐지? 더 잃을 건 뭐란 말인가?

책이 설레는 이유는 칸이 모든 고정관념, 오래된 교육의 관습과 관행에 이런 질문을 던졌고 실제 바꾸는 첫걸음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다양한 제도 중에는 뿌리를 알고 나면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는 것이 많다. 칸의 성공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전체 판을 흔들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런 도전, 변화의 가능성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버틸 수 있는가. 꿈과 희망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다.

칸의 책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는 ‘어른들에 대한 교육’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놀이와 학습을 어린 시절에만 몰아넣고,
모든 일은 중년에, 모든 후회를 늙은 나이에 몰아넣는 것은
완전히 틀렸으며 지독하게 독단적이다. – 마거릿 미드. (208쪽)

“세상이 더 복잡해짐에 따라 무엇이 왜 일어나는지를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평화는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할 것이다. (210쪽)

교육과 언론은 민주주의 시민이 깨어있도록 해준다. 지금 우리는 그 기능이 상당히 마비됐다. 시민이 생각하지 않으면 교육이 처음 목적했듯 ‘순종하는 시민’으로 머문다.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더 나은 교육시스템을 위해서라도 이럴 때가 아니다. 아이 학원 정보를 습득하고 아이 인생에 모든 걸 걸기보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면 좋겠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은 열두 살 무렵 성인이 되기 시작한다. 그때가 생식할 수 있는 때인데, 나는 10대 부모를 옹호하는 건 분명 아니지만, 청소년들도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도록 자연이 설계하지 않았다면 생식을 가능하게 했을 리가 없다고 믿는다. 고등학생들은 급성장하는 성인인데도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 대한 책임도 없는, 또래끼리의 동료 관계로만 좁게 제한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아이로 취급한다.” (살만 칸)

아이들은 빨리 자란다. 어른들의 못난 교육 시스템 덕에 혹은 과도한 보호와 집착 속에 풀려나지 못해서 그렇지 스스로 즐겁게 배울 수 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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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내 멋대로 고르는 ‘오늘의 읽을만한 글’
    “진도는 언제나 그냥 나간다.” 거기까지만이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 “교육과 언론은 민주주의 시민이 깨어있도록 해준다”에 이르면 많이 오글거린다(나는 ‘깨시민’이 싫다) 교육 과정의 목적이 단순한 지식습득에만 있는 게 아님을, 사회 체제에 대한 ‘길들이기(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또한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임까지를 그래서 굳이 말하게 한다

  2. 재미있는 글이네요.
    특히 마거릿 미드의 말은 정말 인상깊습니다.
    아이건 노인이건, 노는 것도 배우는 것도 균형되게 살 수 있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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