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하자’는 말은 곧 소주를 한잔하자는 말과 같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국민 술인 소주에 가려져 그저 시원한 입가심용 술에 불과했던 맥주. 늘 2인자였던 맥주를 향한 국민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리고 적어도 소비량으로만 보면 우리나라 국민은 소주보다 맥주를 2배 가까이 많이 마신다.
맥주가 주목 받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은 소비자들의 욕구가 함께 커지고 있다. 생맥주에 대한 진실공방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관련 기사: 효모가 살아 있다? … 생맥주의 진실, 노컷뉴스, 2013년 6월 15일)
생(生)맥주, 생(生)인가 아닌가?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마시고 있는 생맥주가 실은 병맥주나 캔맥주와 같은 맥주라는 사실이 꽤 불편한 진실로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즉, 같은 맥주를 병에 담으면 병맥주, 캔에 담으면 캔맥주, 케그(keg, 맥주를 저장하는 작은 통)에 담으면 생맥주라 칭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속았다는 불편함을 토로하는 반응부터 원래 그런 것을 이제 알았느냐는 반응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등장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생맥주의 생(生)이라는 한자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생(生)이라는 한자어를 생맥주(生麥酒)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인데 우리나라의 맥주 소비자들은 대체로 생맥주의 ‘생(生)’을 말 그대로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즉, 생맥주를 ‘효모가 살아있어 신선하고 맛이 풍부한 맥주’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은 흔히 사 마시는 병, 캔 제품과 같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상미기한(賞味期限)의 열쇠, 효모
실망하기에 앞서 맥주의 상미기한에 있어 핵심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효모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생맥주는 왜 효모가 없는 병, 캔맥주와 같은 것일까? 효모가 당을 분해하여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드는 과정을 발효라 한다. 발효 과정이 끝나면 효모의 활동이 멈추게 되는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효모 역시 살아 있는 생물인지라 상온에 방치되면 변질되기 쉽고, 맥주를 장기간 상온 보관하면 맥주 맛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각종 부산물을 만들어 낸다.
[box type=”info” head=”‘상미기한’이란? “]양조자가 술을 만든 의도 그대로 그 맛과 향취가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래서 상미기한은 ‘식품 변질’의 마지노선인 유통기한에 비해 짧다. 즉, 상미기한이 지난 술이라고 해도 유통기한 내에 있다면 마셔도 전혀 지장이 없다. 간단히 말해 상미기간은 ‘최상의 맛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 기한’이라고 할 수 있다.[/box]
이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저온보관 및 냉장유통, 냉장판매의 방법이 있지만, 이는 유통 및 관리비용을 증가시켜 맥주의 원가 자체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유통 및 보관을 한다고 하더라도 최상의 맛을 유지하는 기간이 매우 짧다. 상미기한이 길어야 한 달 남짓인 생(生)막걸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많은 종류의 생막걸리들이 냉장 보관된 채 소비자를 기다리고 있지만 소비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다.
우리나라만 그렇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따라서 맥주 양조장에서는 정밀한 필터링 공정으로 효모를 걸러내거나 ‘파스퇴라이징’(pasteurizing)이라 불리는 저온살균법으로 효모를 사멸하여 맥주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애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는 상온에서 보관한 맥주라 할지라도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나라 맥주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영국의 ‘리얼 캐스크 에일'(Real Cask Ale) 맥주는 살균, 여과, 강제 탄산주입과 같은 일체의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또 양조장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병, 캔맥주와 케그용 생맥주의 도수나 풍미를 조금 다르게 만들어 출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외국의 어떤 양조장이라 할지라도 충분한 상미기한의 확보 및 맥주 맛의 변질 방지 차원에서 효모가 ‘죽거나’, ‘제거된’ ‘동일한’ 맥주를 병, 캔, 생맥주 케그에 담아 판매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수입 생맥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생맥주가 병, 캔맥주와 같은 맥주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은 이해하나 ‘어떻게 우리나라만 이럴 수 있느냐’, ‘믿을 회사 하나도 없다’는 항변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맥주를 찾아서
그렇다면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는 어디에 있는 걸까? 개인적으로 필자는 효모가 제거된 맥주라고 하여 신선하지 않고 맛없는 맥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라고 모두 신선하고 맛있는 맥주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존 생맥주에 대한 실망의 원인이 효모가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라면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맥주를 마실 방법을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싶다.
첫째, 브루펍(Brew Pub), 소위 말하는 하우스 맥줏집에 가는 것이다.
매장 내에서 맥주를 직접 양조하거나 동일 법인의 맥주 양조장에서 맥주를 받아와서 판매하는 업장이다. 대부분 하우스 맥줏집에서는 필터링이나 저온살균법을 거치지 않아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대표적인 국내 하우스 맥주 업장으로는 서울 옥토버훼스트, 더테이블, 바네하임, 메가씨씨, 팝스쿨, 수원 본점을 기반으로 홍대에 분점을 두고 있는 퀸스헤드, 의정부 저멘하스, 울산 트레비 브로이, 부산의 한창 브로이, 리치 브로이, 전남 담양의 담주 브로이 등이 있다.
둘째, 요즘 주목받고 있는 크래프트 맥주, 즉 소규모 생산 맥주를 판매하는 업장에 가는 것이다.
크래프트 맥줏집은 주로 이태원, 녹사평역 주변과 홍대, 강남 등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업장은 맥주를 제조하고 유통할 수 있는 소규모 맥주 회사에서 맥주를 공급받아 판매한다.
크래프트 맥주는 하우스 맥주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효모를 제거하거나 저온살균하지 않은 맥주다. 따라서 맥주 맛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냉장차로 유통할 뿐만 아니라 판매하는 업장 역시 마찬가지로 케그 자체를 냉장 보관한 상태에서 맥주를 추출하여 판매하고 있으므로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셋째, 직접 만들어 마시는 것이다.
맥주를 만들어 마시라는 제안에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외국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맥주를 직접 만들어 마시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맥주 만들기 동호회, 굿비어 공방, SOMA 공방 등의 온/오프라인 기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가입 회원 수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맥주를 직접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20리터 정도의 물에 맥주 원액 캔을 녹여 효모만 뿌려주면 끝나는 아주 간단한 방법도 있고, 직접 맥주의 주재료인 ‘맥아’(Malt. 보리를 싹 틔워 싹을 제거하고 건조한 것. 엿기름)와 ‘홉’(Hop. 맥주에 쌉쌀한 맛과 좋은 향을 부여하는 식물의 일종)을 구입해 맥주를 만드는 방법까지 자신의 사정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자가양조의 장점은 아무래도 저마다 기호에 맞는 맥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알코올 도수, 맥주의 색, 쓴맛, 다양한 맛과 스타일 등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즉, 지구 상에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자신 만의 특별한 맥주를 만들 수 있다. 아울러 효모가 살아 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음은 물론이다.
맥주회사, 이제 적극적인 맥주 소비자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생맥주와 관련된 논란을 정리하면서 맥주 애호가로서 드는 생각은 소비자의 다양한 논의가 건강한 시장 형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처럼 언론이 주목해서 소비자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소비자 인식이 바뀐 결과가 언론에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간 그저 ‘주는 대로’ 마셨던 소비자에서 이제는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맥주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와 같은 소비자의 시그널을 성실히 인지하는 맥주회사들의 반응을 기대해 본다.
생맥주가 맛 없어서 더 싸다고 생각했는데…그걸 더 맛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구나…제대로 된 생맥집을 못가봐서 슬퍼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상미기한 설명중에 유통기한이 ‘식품변질’의 의미라고 쓰셨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유통기한이란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으로 유통관리자들이 관리하는 기준으로,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바로 식품이 변질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상미기한의 한자가 틀린게 아닌지… 일본어에서 온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일본어 한자는 윗상자가 아니라 賞味期限(しょうみきげん)입니다만.
잇힝 님,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상미기한은 따로 사전 표제어는 없고, “상미2 (上味) [상ː미] [명사] 음식의 좋은 맛.”라는 사전 등재어가 있길래 상미(上味)인줄 알았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댓글로 주신 “상미(嘗味)”가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참조 링크) 바로 수정했습니다. 필자의 원문에는 없는 한자 설명인데, 편집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모쪼록 너른 이해를 구합니다. (편집자)
정우 님, 좋은 의견 고맙습니다.
유통기한은 말씀해주신 것처럼 ‘엄밀하게’ 말하면 하루 이틀 지났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변질 여부와 직결되지는 않습니다만, 식품의 변질과 상식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넉넉히 이해되고 있는 바라서요. 위 박스 설명은 MBC 보도의 설명(링크)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차용한 것이고, 해당 설명에 위 MBC 보도 링크도 있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좋은 글 잘 읽고 퍼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