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세상 이야기를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전합니다.
1. 이광진이라는 사람
500년 전에 이광진(1513~156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어릴 적 공부할 때는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이가 들어 벼슬에 나가서는 유능하고 강직하다는 세평을 얻었다.
<명종실록>과 그의 행장·묘지명 등을 보면 1548년 예문관 검열로 벼슬살이를 시작해 수재들에게 주어졌던 승문원과 교서관의 여러 관직을 맡았다. 학문이 높은 성균관에서도 일했고 맑고 깨끗한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벼슬도 두루 맡았다.
호조·공조·예조·병조에서는 좌랑·전랑과 같은 핵심 요직을 꿰찼고 왕족 비위를 규찰하는 종부시에서도 첨정을 했다. 군기시·군자감·사복시 같은 실무 기구에서는 최고 책임관을 지냈고 순천·흥양·사천·창녕·담양의 수령을 지낼 때는 선정을 베풀어 포상까지 받았다.
1565년 마지막 관직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맡았다. 그에게 주어진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는 6승지 가운데 하나로 핵심 요직이었다. 게다가 승지는 향후 종2품 이상 승진이 보장되는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이즈음 그는 호평도 여럿 받고 있었다. “맑고 단아하며 신중하고 과묵하여 모두 좋아했다”, “여러 고을에서 자못 선정을 베풀었다(명종실록).” 이와 더불어 명예도 더해졌다. 예조로부터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선비(師儒사유)’로도 선정된 것이다.
그런데 깜짝 반전이 일어났다. 정승 판서 최고위직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광진은 벼슬살이를 그만두었다. 이를 두고 ‘금시당 중수기’는 “조야가 이제 막 그에게 의지하며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하루아침에 호연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2.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이유
옛날 벼슬아치들은 지금 공무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권력을 누렸다. 조선은 임금이 유일한 주권자인 왕국이었다. 임금만 잘 섬기면 그만이었으니 백성들로부터 누리는 그들의 권력은 아무 제한이 없었다. 임금과 가까울수록 명예와 특전도 높았다.
그들이 받는 봉급도 상당히 많았다. 이를테면 함안군수를 하면 농지 40결(대략 13만2000평)에서 나는 소출을 1년 연봉으로 받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 해에 열다섯 섬이 넘는 각종 곡식과 닭·꿩 그리고 땔감까지 상납받을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 이런 엄청난 권력·명예·실리를 마다한 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두고 주세붕(1495~1554년)은 “벼슬살이는 영예롭기도 하지만 치욕스러운 것도 있어서 군자는 과감하게 물러나는 용퇴를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치욕도 있었다. 고령 공민왕 시절 이방실 장군은 홍건적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함락된 수도 개경을 되찾는 엄청난 공훈을 쌓았지만 간신들의 중상모략에 넘어간 임금의 명령으로 하루아침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당연한 일을 했다가 꼬투리가 잡혀 치욕을 겪은 경우도 있었다. 정승 어세겸은 30년 넘게 관직을 공명하고 청렴하게 했지만 사후 갑자사화를 맞아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 논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본인은 부관참시당하고 증손자와 친척들은 귀양을 살아야 했다.
치욕은 임금이나 정적·동료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당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감사였던 김수는 겁에 질려 경상도 경계 밖으로 왜적을 피해 달아나는 행색으로 재물을 챙기다 백성들로부터 온갖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당했다.
인간은 부귀영화 앞에서 탐욕을 넘어서지 못할 때가 많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데도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고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욕심을 떨치고 과감하게 벼슬을 버릴 수 있어야 이런 치욕을 겪지 않는다고 주세붕은 얘기했던 것이다.
3. 이진숙, 어리석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을 보면 어떨까? 탐욕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 할 만큼 어리석다고 해도 무방하지 싶다. 그는 젊은 시절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로 이름을 얻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대전MBC 사장이라는 높은 자리도 누렸다.
그런데도 만족을 모르고 한 번 더 해 먹겠다는 욕심 끝에 갖가지 치욕을 뒤집어쓰고 있다. 방통위원장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지난 시절 저지른 그의 악행과 비리, 치부와 잘못도 지금처럼 까발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전MBC 사장 시절의 치졸한 법인카드 유용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를 향하는 세간의 비난 비판 조롱 멸시 비아냥 혐오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들이다.
나라를 구하거나 국리민복을 위하다 치욕을 겪고 몸이 상했다면 그나마 동정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진숙 방통위원장의 행위는 일개 정파의 편협한 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욕됨은 멈출 기미도 없다. 수억 원대에 이르는 법인카드 유용은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업무용으로 썼다”는 등의 청문회 답변은 무거운 처벌을 받는 위증죄에 해당된다. 인과응보의 원리가 여기라고 작동되지 않을 리는 없다.
4. ‘작비(昨非)’와 ‘금시(今是)’
밀양에 가면 금시당(今是堂)이 있다. 앞서 말한 이광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이다.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명승 영남루 상류 맞은편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어쩌다 거기 앉아 내려다보면 영남루 못지않게 경관이 빼어나다.
‘금시’는 “지금이 옳다”는 뜻이다. 금시는 ‘작비(昨非)’와 짝을 이룬다. “지난날이 틀렸다”는 각성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당호는 ‘영예도 있지만 치욕도 있기 마련’인 벼슬에 매여 살았던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담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이진숙도 “지난날이 틀렸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 2024년 여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부끄러워하는 날이 그에게 올까? 지금 보면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앞날은 모를 일이다. 머지않아 닥칠 사법 심판이 그런 계기는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진숙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반사경이다. 이진숙처럼 하면 온갖 수모를 뒤집어쓰고도 모자라 결국 몸까지 망치고 만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를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