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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큰 돈과 그에 따르는 힘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국가는 여기에 세금도 매기지 않는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부의 재분배에 힘쓰지 않으니, 나 스스로 내가 가진 것을 재분배해야겠다.”

마를렌 엥겔호른.

이런 신선한 부자를 보았나?!

마를렌 엥겔호른(Marlene Engelhorn. 1992년생). 독일 출신의 오스트리아 운동가이자 언론인. 마를렌 엥겔호른 페이스북.

360억 상속에 분노한 마를렌


만약 360억 원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살고 있는 31살 여성, 마를렌 엥겔호른(Marlene Engelhorn) 이야기인데요. 엥겔호른은 독일계 화학회사 바스프(BASF)의 상속인 중 한 명인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27,000,000(한화 약 360억 원)를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재밌는 사람입니다. 상속을 받고 나서 기뻐하기는커녕 그 돈을 버는 데 아무 기여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거액이 상속되었다는 점에 1차로 화가 나고, 정부가 상속세도 걷지 않으므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에 더욱 분노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부의 재분배를 이뤄야 하는 정부가 그 역할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돈을 갖게 되었다. 단지 내가 이 세계에, 이 성(姓)을 쓰는 특정 가문에 속해있기 때문에, 불공평하게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I have this money because the government has failed to fulfill its mandate to ensure that wealth is distributed in society in such a way that it doesn’t end up unequally in my hands, just because I’m in this world in this particular family with this surname.”
독일 굴지, 아니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중 하나인 바스프(BASF) 창립자 프리드리히 엥겔호른. 마를렌 엥겔호른의 선조. 특정한 성을 쓰는 특정 가문에 속해서 360억 유산 상속? 이건 불공평하게 들어온 돈이다!

불로소득에 세금 한 푼 없다면 정치의 실패!


엥겔호른은 부의 재분배를 위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달인 1월 중순, 엥겔호른은 16세 이상 오스트리아인 1만 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재분배를 위한 착한 위원회] 명의의 초청장을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부의 재분배를 위한 유산 사용처를 결정하는 토론에 참여할 생각이 있으면 온라인이나 전화로 등록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응답자 중 50명을 선정, 혹시 몰라서 예비후보 15명까지 추가로 뽑고 이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돈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토론을 거쳐 결정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일하면서도 생계를 겨우 이어가며 힘들게 살고 있다. 노동하고 얻은 한 푼 한 푼에 세금이 매겨진다. 그런데 일하지 않고 얻은 돈에는 세금을 한 푼도 매기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의 실패다. 정치가 실패하면 시민이 나서서 스스로 해결해내야 한다.”

마를렌 엥겔호른

부자가 부자감세가 불공평하다고 나서 부의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말하다니, 신선했습니다.          

마를렌 엥겔호른이 ‘재분배 이벤트’에 사용한 링크 페이지. 현재는 종료된 상태다.

오스트리아·스웨덴엔 상속세가 없어요


오스트리아는 2008년 상속세를 폐지했습니다. 소득이 있는 곳에는 세금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불평등이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통계로 입증이 되었으니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이 나와야 하죠. 경제학자 피케티도 불평등의 원인이 노동으로 인한 소득보다 자본으로 버는 소득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고요.

그런데 왜 파이를 키우자,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고 불평등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까요? 공동체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정부라면 자본 소득에 대한 정교하고 영리한 과세를 고민해야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정 반대로 가고 있네요.     

스웨덴도 상속세가 없습니다.

상속세 폐지를 이야기하는 곳에서 스웨덴 이야기를 꼭 들고 나오더라고요. 스웨덴 같이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소득 격차가 적은 사회라면 상속세가 무척 높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스웨덴은 상속세가 없습니다.

스웨덴은 높은 세율과 복지를 통해 강력한 부의 재분배를 이룬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득분위가 마름모꼴로 중산층이 강하고 엄청난 부자나 찢어지게 가난한 인구가 적습니다. 한 사회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보면 스웨덴의 경우 세전 0.434에서 세후 0.275로 떨어집니다. 지니계수가 0.3 이하이면 매우 평등한 사회라고 보는데 한국은 세전 0.406, 세후 0.355, 세전과 세후 차이를 보면 소득 재분배 정도를 알 수 있는데 스웨덴은 효과적으로 중산층을 강화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웨덴이 상속세를 폐지한 이유 (but 자본이득세)


그럼 스웨덴은 상속세를 왜 폐지했을까요?      

스웨덴 중산층은 이미 소득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또한 노후에도 연금으로 생활 임금이 보장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를 크게 축적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집 한 채,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요트 정도가 남기는 재산이에요. 그렇다 보니 부모 사망 후 자식에게 살던 집을 상속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죠. 과거 스웨덴의 상속세는 최대 65%, 상속세는 현금으로 내야 하니 상속받은 재산을 바로 팔거나 빚을 내야 했어요. 그러니 상속세가 부담이 되는 것이 엄청난 상속을 받은 부유층의 경우만이 아니었지요.      

스웨덴도 지난 수십 년 사이 부동산 가격이 꾸준히 올라 평소 상당한 여윳돈을 비축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이 상속세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집을 팔아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중산층에서 상속세의 불합리에 대해 지적을 하고 나온 거죠. 전체 세금에서 상속세가 차지하는 비중도 1.5%가량으로 크지 않았고요. 보수 정권이 아닌 사민당 정권에서 상속세가 폐지된 이유입니다.

상속세는 없지만 스웨덴에는 자본이득세가 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 자체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지만 상속받을 재산을 처분하는 시점 즉 상속받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을 매각하는 시점에 발생하는 이익에 과세하는 것으로 양도소득세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경제가 일정 규모 이상 발전한 여러 나라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부유세 폐지로도 막지 못한 자본도피


2004년 상속세와 증여세를 폐지하자 부유세가 늘었습니다. 상속된 재산에 부유세를 매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부유세를 피하기 위해 자본도피가 일어났습니다. 유럽연합 안에 속한 스웨덴의 경우 해외로의 자본 이전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의 유출과 투자 침체를 우려한 정부가 2007년 부유세를 폐지했죠. 부유세 폐지는 보수당 정권이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부유세는 자본의 이탈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스웨덴의 자본 유출은 더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고요. 경제의 국경이 허물어진 탓입니다. 부의 유출을 막는 것은 나라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국 상속세 납부 대상은? 겨우 4.5%


한국의 경우 2022년 기준 피상속인(사망자) 348,000명 중 상속세 과세 인원이 15,800명으로 상속세를 내야 하는 비율은 전체 상속인 중 4.5%입니다. 상속세가 국세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국세 중 1.9%로 액수로는 7조 6000억 원가량입니다.

기초공제, 배우자상속공제, 인적공제, 일괄공제, 금융재산상속공제, 재해손실공제 등 다양한 공제가 있어, 배우자와 자녀가 상속자라면 10억 원까지는 공제, 상속액이 10억 원이 넘어야 상속세 납부의 대상이 됩니다. 상속세 납부 대상이 4.5%밖에 안 되는 이유입니다(2023 국세통계연보). 요 몇 년 새 집값이 많이 올라 비율이 늘어날 수는 있겠습니다.

가계금융 복지조사에 의하면 2022년 기준 대한민국 가계의 평균 순자산은 4억 5602만 원, 순자산 10억 원 이상 가구는 전체의 11.4% 정도이니 스웨덴처럼 상속세가 국민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아닙니다.

스웨덴 상속세 없으니 우리도 없애자?


세금이라는 것은 복합적이고 연쇄효과를 내니 특혜성 공약으로 선심 쓰듯 낼 수 있는 정책이 아닙니다. 단순히 ‘스웨덴 상속세 없으니 우리도 없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두 나라의 조세 징수 현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은 조세징수율이 98%에 이르는 나라로 세금을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어도 당선이 되는 나라입니다. 한국은 2020년 기준 조세징수율이 86.5%입니다. 중국, 러시아와 함께 조세포탈 국가 수위에 이름을 올린 국가이기도 합니다.

대학시절 제 스웨덴 친구들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국세청에 자발적으로 신고했습니다. 퀴즈대회에서 우승해 상금으로 50만 크로나(약 8000만 원)를 받은 후 30%를 세금으로 낸 친구에게 아깝지 않으냐 물으니 자신은 지금껏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를 누리기만 했다며 이제 기여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을 정도였죠.

세금은 복지국가의 엔진이라 탈세는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여깁니다. 유명인사 인터뷰를 보면 한결 같이 사회가 제공한 인프라와 복지가 없었으면 자신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답하지요. 세금을 포탈하면 매국노 취급을 받는 사회입니다.

스웨덴에서 세금 안 내면? 매국노 취급받아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상속세 폐지의 조건


한국은…한국은 고소득 사업자 탈루액이 조 단위, 그나마 부과된 세금 징수 비율이 60% 수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자본도피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나라죠. 전체 세수 중 상속세 비율이 크지 않다고 해도 정책이 담고 있는 상징이 있습니다. 상속세 폐지는 평소에 탈세 없이 세금 잘 냈다는 전제가 있어야 내밀어볼 수 있는 카드 아닐까요?

세금 징수만 제대로 해도 부의 재분배 효과가 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눈감고 상속세를 없애자는 것은 사회 전체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입니다. 당장 부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세수가 줄고 투자가 줄고 인프라가 약해져 사회 전체를 갉아먹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번 돈, 사회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내 노력으로 번 돈이니 내 자식에게 당연히 물려줘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상속이 되겠죠.

국세청 조세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재산을 상속받은 약 162만 명 가운데 4만6천 명인 약 2.8%에게만 과세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공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속세 폐지를 말하기 전에 상속세가 제 역할을 해왔는지, 평소 탈세 없이 세금을 잘 냈는지 조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닐는지요?

세금은 부의 재분배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스웨덴도 상속세 폐지했다는 이야기하려면 나머지 제반 상황을 비슷하게 맞춘 후에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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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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