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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에 관객이 몰리는 현상은 한국 영화산업이 다양한 소재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회 비판 영화를 소비할 수 있는 교양 계급의 증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 비판 영화의 성장

조폭 코미디와 누아르 형식을 빌린 남성 영화가 장르적 관습처럼 생각 없이 대량 제작되었던 1990년대 후반과 비교한다면 현재 한국 상업 영화는 영화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한층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2011년 이후 개봉된 상업영화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제법 발견된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상영관에 걸린 [26년] 등이 바로 이런 범주에 속한 영화들이다.

2012 대선 특수가 작용한 [남영동 1985]와 [26년]
2012 대선 특수가 작용한 [남영동 1985]와 [26년]
정지영 감독의 영화가 두 편이나 존재하고, [부러진 화살]의 성공이 [남영동 1985]을 가능하게 한 동인으로 작용했으리라는 점, 더불어 [남영동 1985]와 [26년]은 2012년 대통령 선거라는 ‘특수’가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들 민감한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의 제작과 상영은 주목할만 하다.

특히 제주 4.3 사건을 다룬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이하 ‘지슬’) 경우, 상영관을 찾기 어려운 최악의 관람 조건에서, 꾸준한 입소문으로 13만 관객이 들었다. 물론 천만 관객이 동원되는 다른 상업 영화와 비교하면 지슬의 관객수는 턱없이 작지만 영화 [지슬]이 자본의 스크린 독점 구조 밖에서 이뤄낸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비평의 꼰대 근성: 영화는 싸구려 대중문화? 정치적 수면제?

나는 한국 영화가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전성기를 다시 확인하거나 그 전성기를 이뤄낸 효자가 자본의 독점이라는 사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본 독점이 비단 영화산업에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자본에 대한 대항으로 특정 문화 상품을 불매운동하는 것도 항상 능사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주체적으로 영화를 소비할 수 있을까. 이것이 글의 관심사다.

상업영화에 대한 비판을 접하다 보면 관객으로서 때때로 불쾌하다. 대중문화로서의 가능성보다는 그 폐해를 주로 문제 삼는 비평은 관객의 순응적 태도를 강조한다. 그 비판에 따르면, 수용자는 현대 산업사회의 산물인 대중문화의 지배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따라 줌으로써 그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 비평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폭로라도 해주는 양 수용자를 자본주의의 제물로 내몰거나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입각해 대중문화를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홀대해왔다.

그런데 대중문화와 수용자의 관계가 이렇게 일방적이기만 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중문화에 대한 정통 예술의 미학적 관점은 문화상품의 소비자와 그 소비행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파악한다. 문화 향유자 스스로 평가된 문화 경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 이러한 체험들은 자본에 잠식당하고 있는 대중문화에 관한 도전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이벤트로 확장하면서 양심의 알리바이로 소비되는 영화

영화 [도가니]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자 시민들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동안 등한시했던 장애인 시설의 인권 문제에 분노했다. [부러진 화살]이 개봉이 되자 그동안 쌓여 있던 검찰과 법원에 대한 불신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영화가 사회적 이벤트로 연장되는 움직임은 최근 영화 [지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화 [지슬]이 개봉하자 여기저기에서 가려진 역사를 알리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하나씩 개봉될 때마다 사회 성원들은 거기에 걸맞는 이벤트를 만들어내곤 한다.

예상 외의 흥행. 더불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
예상 외의 흥행. 더불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
사회적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시민으로서의 관객, 그 창조적 생산력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묻자. 우리는 영화를 보며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도가니]를 보고 난 뒤에 장애인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하고, 시설법인에 대한 분노를 한잔의 커피와 함께 배출한다. [부러진 화살]을 보고나서 사법권력의 오만함을 성토하거나 그 집단이 응징당하는 개운함을 맛본다. 이것이 우리 대부분이 향유하고, 재생산하는 영화를 통한 문화적 체험의 전부다. 우리는 그런 일회적 분노와 상징적 정의 실현을 영화 체험이 줄 수 한계로 한정 짓는다. 왜 영화에 의해 재현된 현실은 기껏 ‘미학적’ 상징과 이에 대한 품평으로 그쳐야 하는 것일까.

영화마다 등장하는 소재는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일 수도 있고 여성이거나 성적 소수자이거나 또는 노인이 될 수 있고 일그러진 권력일 수도 있다. 이러한 소재가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의 가치는 사실로서의 역사적 사건이 주는 준엄함을 인식하고, 동시에 권력이 사회적 약자에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거듭 되새길 때 비로소 생겨난다.

사회 비판 영화가 그저 우리의 감각에 일회적으로 호소할 뿐이라면, 우리가 사회 비판 영화를 우리의 인식과 체험으로 체화시키지 않고, 그저 ‘지식인의 일회성 알리바이’로 취급한다면, 우리의 감각은 이내 모든 사회적 문제들에 무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영화들도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자극적인 하드코어 방식으로 생산, 재현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운 방식이 아니다. 감각이 견뎌낼 수 있는 자극에도 한계는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실천의 씨앗: 영화를 통한 세상과의 만남

수잔 손탁은 그의 저서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 이라고 말한다. 손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다. 타인의 고통에 손쉽게 연민과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만들어 낸 사건 그 자체와 사회적 모순 구조를 파악하고, 그런 인식을 통해 실천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지슬]을 예로 들자. 영화 [지슬]은 가려진 역사를 배경으로 공동체의 억울한 죽음을 재현하고, 그 죽음을 위로한다. 영화 [지슬]를 통해 4.3 항쟁의 역사가 남긴 상처와 아픔에 연민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는 조작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을 이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지에 대한 생생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저마다 서로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다. 서사 구조를 논하는 이도 있을 수 있고, 배우의 연기와 영화의 완성도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한국 영화 산업이 갈수록 자본 독점으로 일그러지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저마다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영화를 향유하고, 담론으로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건, 우리가 채 두 시간도 안되는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 사회는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스템은 특히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배제하는 방향으로 운동한다.

영화를 어떤 식으로 소비하는가는 전적으로 관객인 영화 소비자의 몫이다. 영화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사운드트랙을 반복해서 들을 수도 있고, 원작을 읽으며 영화의 울림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 갈 수 도 있다. 어떤 방법이 전적으로 옳을 수도 없고, 혹시 그런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와 그 영화를 탄생시킨 사회의 관계를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렇게 어떤 영화가 놓여진 사회적 맥락을 직시하고, 영화 속에서 재현된 상징을 현실에서 다시 살려내면 좋겠다.

영화관 나들이가 사회적 약자에 관한 지속적 관심을 이끌어내고, 사회 모순에 관한 비판적 인식을 고양하는 촉매제가 될 때, 영화 소비는 그저 일회성 소비에 머물지 않는 사회적 실천의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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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중문화가 많은 좋은 기능들을 한다고 보는데요, 이를테면 그렇게 욕을 많이 먹는 연예인 사생활 캐기조차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저는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죠. 그런 반성이 티브이 앞을 떠나면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니까요. 그러니까 박군님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소비’가 ‘그저 일회성 소비에 머물지 않는 사회적 실천의 의미 있는 방법’으로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저야 뭐 대중문화에 대해서라곤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위에서 박군님께서 비판한 틀에박힌 대중문화론들이 대중문화를 혐오하고 대중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유의미한 ‘행동화’를 이끌어내는 데 대중문화가 무기력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적어도 하나의 이유는 되겠죠).

    물론 영화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지슬}을 보는 사람들은, 적어도 보통의 극장에서는 보기도 어려운 그 영화를 보려고 ‘굳이’ 특정 극장을 찾을 정도로 ‘엄선된’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군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즉 {지슬}의 가능성은, 그 영화와는 대체로 무관하게 사전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그 관객들의 자발성/가능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과연 그 자발성/가능성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걸까요?

    또 하나. 박군님께서는 {남영동}이나 {부러진 화살} 대신 {지슬}을 주로 언급하시는데요, 제가 넘겨짚어보면, 그건 아마도 전자의 영화들보다 후자가 (영화적으로) 낫다고 보시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을 보는 관객들이 위에서 쓴대로 대체로 “self-selected”된 것이라면, {남영동}과 {지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그러니까 영화적 완성도 등의 견지에서의 차이가 대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왜 영화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됩니다. 이를테면, 본문에서 박군님은 ‘조작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을 이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지’를 {지슬}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거꾸로 왜 그러한 이해를 굳이 영화를 통해 얻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책을 볼 수도 있고, 현장을 답사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영화가 쓸데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 고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조작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을 이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지’라는 목적은 지나치게 추상적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은, 더구나 극장에 찾아가기도 불편한 영화를 보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혹시 거기엔, ‘다름아닌 영화’라는 매체를 거쳐 그러한 주제를 이해하고자 할 때 관여되는 ‘특수성’이 있는 것은 아닐지요? 다시 말해, ‘영화적 실천’ 또는 ‘영화를 통한 (제작이든 감상이든) 실천’의 좀 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 아닐지요?

    저는 위에서 박군님께서 쓰신 것이 좀 더 의미있으려면, 이런 질문들에 대답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지슬} 관객들은 모종의 자발성/가능성을 사전에 가지고서 극장에 들어선다고 했는데요, 과연 {지슬}의 관람은 그러한 자발성/가능성을 어떤 식으로 자극하고 변형시키는가… 뭐 이런 것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차피 그런 영화들, 일상에 지친 노동자(가족)으로서는 애써 찾아가 보기도 어려운 것들 아닌가’라는 류의 비아냥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네, 제 얘기가 상당히 고리타분한 류의 것이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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