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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실존인물일까?

배신은 불이익과 왕따를 부르게 마련이다.

기업이나 국가기관의 비리을 폭로하고자 하는 내부 고발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부고발자의 폭로가 개인적인 배신감에 기인한 것이든, 공익을 위한 용기에 기초한 것이든, 배신은 해고를 포함한 인사상의 불이익과 왕따를 부르게 마련이다.  기자가 내부고발자를 취재하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기자가 알고 싶은 것은 누가 내부 고발을 하는지, 왜 내부 고발을 하는지가 아니다.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부 고발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이다. 이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자가 내부고발의 내용을 기사화하고자 한다면 취재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거나, 익명으로 기사를 작성할 것이다.

물론 취재원에 대한 익명처리가 내부 고발의 경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업계관계자,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를 비판하는 중소기업 관계자 등 자신의 신원을 노출했다가는 각종 정치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수많은 취재원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기소청탁 사건’이 문제된 바 있다. 주진우 기자는 나꼼수에서 나경원 전 의원의 보좌관이 나의원을 비판하는 글을 포스팅한 네티즌을 형사고발했고, 나 전 의원의 남편인 김재호 판사는 사건의 담당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기소를 부탁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기자가 취재원을 밝히지 않을 수 있는 권리

이런 경우 기자는 딜레마에 놓인다. 취재원을 공개하면 신분이 노출되어 취재원에게 불이익이 발생할 것이고,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으면 자신이 진술한 내용이 허위로 판단되어 형사처벌을 감내해야 한다. 기자가 이런 갈등상황에서 취재원을 밝히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취재원 비닉권'(取材源 祕匿權)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취재원 비닉권이란 검찰의 수사과정이나 법원의 재판과정에서 취재원의 공개를 요구받았을 경우에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호주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취재원 비닉권을 명문으로 규정해 두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취재원 비닉권은 취재원 보호를 통해 은폐된 진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돕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취재원 비닉권은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는 취재원 비닉권의 본래 목적과는 관계없이 익명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크지않은 인물들이 기사에 등장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익명의 취재원들은 기사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얼핏보면 감동적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조선일보에서 연재했던 게임 관련 특집 기사 중 하나를 살펴보자.

기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타크래프트에 빠진 중학생 아들을 둔 대기업 임원 이명준씨(가명)는 1년여에 걸친 맹연습 끝에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최고수를 꺾고, 아들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여 승리한다. 이명준씨는 자기반 최고수를 이겨보는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1주일의 연습 끝에 아들과 편을 이루어 최고수인 친구들을 꺾는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어하던 아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게임을 끊고, 유학길에 올라 중국 유명대학에 합격한다. 얼핏보면 무척 감동적인 기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현실적인 개연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이라면 45세의 아버지가 스타크래프트를 연습해서, 회사의 최고수를 꺾고, 16세인 아들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잘하기 위해서는 빠른 전략적 판단과 손놀림이 요구되며, 이런 이유 때문에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물론, 아버지가 게임에 대한 천부적 소질을 가지고 있거나, 아들이 또래집단에 비해 게임실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이런 결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명준씨가 회사내 최고수를 꺾고, 아이와 함께한 팀플레이에서 최고 실력의 아이들을 상대로 승리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일반적인 경험칙에 비추어 이명준을 실존인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지게 된다.

이명준이 실존인물인지는 기자만 알 것

왜 기자는 기사 속의 인물에게 이명준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지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이 아버지의 노력으로 게임중독 문제에서 벗어나고, 적성에 맞추어 새로운 진로를 찾아가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 기사로 인해 누군가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거나,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유없이 가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기사의 신빙성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인물의 실존을 심히 의심스럽게 한다. 물론, 독자로서는 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명준이 실존인물인지 여부는 기자만이 알고있을 것이다. 이명준이 실존인물이라면 기자는 가명을 사용한 합리적인 이유를 밝히기 바란다. 이는 비단 위 기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아무런 필요없이 익명의 인물들을 기사에 등장시키는 모든 기자들에 대한 요청이다.

취재원 보호라는 엄폐물 뒤에 숨은 소설같은 기사들을 더이상 보지 않기를 바란다. 독자들은 가공된 해피엔딩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기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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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저 자신이 많이 반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마저도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장담을 못합니다.
    왜냐면 몇명은 ‘제 친구’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ㅠㅠ
    물론 그런 경우는 대부분 이 기사처럼 사례 자체가 중요한 경우는 아니지만요.
    그런데 정말로 저 기사는 읽으면서 “와 대단한 사례를 발굴해 냈네”하고 생각했었는데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약간 과장한(사실은 1등까지는 안했고 조금 잘 하는 정도까지 발전해서 아들과 화해했는데 그런 식으로 과장을 했다든지) 사례일 가능성이 높네요.

    하지만 진짜 저랬을 확률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회사 다른 사람들이 스타를 잘 해보았자 얼마나 잘하랴 싶기도 하고요.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합리적 의심을 제기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기사는 사실 이 사례가 기사의 전부나 다름없을 정도인데 혹시라도 소설이라면 독자를 우롱했다고밖에 할 수 없겠네요.

  2. 펄님 지적처럼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위 기사내용이 전부 진실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기사에서 너무나도 자주 접하게 되는 익명의 인물들에 대해서 한 번쯤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문제제기가 없으면, 사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기사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3. 기사는 있는 사실만 표현!!!
    판단은 독자가 할 일!!!

    굳이 그 기사를 기록하면서 기자본인의 생각을
    기록하고 싶다면…
    본 기사와는 따로 분단된 형태로 써주시길…
    독자는 특정 언론의
    교육의 대상도… 훈련받고 세뇌되는 대상도…
    아닙니다.

  4. 아무래도 ‘이명준씨(가명)’라는 것은 저 기자의 저 언론사의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큰 자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기삿거리가 생기면 언제라도 부담 없이 꺼내 넣어 쓸 수 있는~

  5. 문득. 예전에 뉴욕타임즈였나? 빈민가 소년을 심층취재,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까발렸던 기자의 기사가 알고보니 소설이었다는 얘기를 본 것 같네요. 물론 기자는 해고당했고 그 신문은 대대적으로 사과를 했다더군요.

    ‘이명준씨’ 얘기는 개연성이 지나치게 떨어지기 때문에, 당시 댓글에도 소설이냐는 얘기가 많았던걸로 기억해요. 민감한 문제에는 제보자를 보호해 줄 필요가 있겠지만, 취재가 귀찮(?)아서 허구의 인물은 만들어내는 데 쓰이는 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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