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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를 지켜보며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 구약성서(개역개정판) 전도서 1:9-11

조국 교수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공방이 연일 지속되고 있다. 근래 들어 가장 재밌게 보고 있는 시사 이슈가 아닌가 싶다. 장관 임명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서슬퍼런 투쟁을 벌이고, 장관 후보자와 관련된 논란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와 진위여부를 가리는 공방이 오가고, 심지어 그 논란의 핵심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교육, 입시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혐오의 심연, 역대 최대의 양극화  

하지만 조 후보자 임명과 관련된 논란은 단순히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의 기싸움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 이슈였다면 이런 정도로 국민적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국 후보자 임명은 한국 사회의 밑바닥에 강하게 흐르던 어떤 분노의 감정을, 조국 후보 반대자 진영에게서 끄집어냈다. 바로 그 감정을 원동력으로 극렬한 반발이 이어진 것이고, 그에 맞서 장관 임명 찬성 측도 더욱 열을 내서 조국 수호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조국 사태는 근래 보기 힘든 대결구도와 갈등상황을 만들어냈다.

조국 사태는 근래 보기 힘든 대결 구도와 갈등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 분노의 원천은 주지하다시피 옳은 말을 하는 위선적 특권계층에 대한 혐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한국 사회의 계층화 경향이었다. 웅동학원 및 사모펀드를 둘러싼 논란이 사실 자녀의 부정입학 스캔들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관심사를 모은 이유는 결국 이 같은 ‘원초적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 후보자 임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분노가 부당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조 후보자와 관련된 논란에 대응하고 있다. ‘옳은 말이라도 하는 위선’이 대놓고 나쁜 것보다 왜 더 경멸받아야 하는가? 부당한 흠집내기가 아닌가? 조 후보자의 딸이 특권과 연줄을 활용해 대학에 들어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따지면 그걸 비판하는 자들(자유한국당 의원, 서울대, 고려대 재학생)도 다들 비슷한 방법을 써서 들어온 특권층 아닌가?

나는 조 후보자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에 분명히 반대하지만, 이 같은 이야기와 논쟁들이 맞다 그르다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맞다 그르다를 따지기엔 너무 많은 이슈가 터지고 있고, 너무 복잡한 사실관계가 얽혀있으며,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다만 이 조국을 둘러싼, 특히 그의 자녀 입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지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얘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제1저자' 논란으로 조국 사태가 본격화했던 지난 8월 22일 모든 언론이 일제히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 격차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 보낸 조국 후보자의 인사청문요청안에는 “특권과 반칙 없는 사법 정의”라는 표현이 담겨 있었다(참조: 경향신문). ‘제1저자’ 논란 등으로 ‘조국 사태’가 본격화했던 지난 8월 22일, 언론은 2분기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가계소득 격차가 5.3배를 기록해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대의 ‘양극화’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참고: 경향신문).

하지만 너무나 첨예해진 이 사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차분히 하고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 잠깐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바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연방이다.

발탁자 ‘비드비젠치’의 탄생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러시아는 17세기 이후 최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으로 수백만 명이 전쟁으로 죽거나 기근으로 아사했다. 또한, 교육 받은 엘리트, 귀족, 중산층들이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라를 대거 떠나면서 인적 자본에 엄청난 타격도 입었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내전을 겪은 뒤 마침내 러시아 인민들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 소련을 건설했지만, 그 결과물은 사실 폐허 속의 잿더미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오히려 그런 파괴를 신세계를 건설할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 사실 이는 빈말은 아니었다. 구체제의 제약 조건이 없는 가운데서 혁명가들은 온갖 종류의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마저도 구체제와 어떤 연도 없이 길러낼 수 있는 혁명의 자원으로 간주 되기까지 했다.

만약에 현실 소비에트가 체제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면, '반자유주의 전략'은 진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혁명 세력은 거듭된 파괴가 초래한 폐허와 잿더미조차 소비에트라는 신세계의 비옥한 토양으로 삼았다.

내전이 끝나고 국가가 안정화되면서 소련의 유토피아 건설 프로젝트는 차츰 시동을 걸고 있었다. 레닌의 국가 전력화 계획, 국가 전체를 내전 이상으로 송두리째 뒤흔들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볼셰비키들의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러시아는 쟁기를 든 문맹 농민들의 사회에서 거대한 베어링, 프레스, 발전기를 돌리는 엔지니어의 사회로 변모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기시 노부스키의 국가주도 경제의 뿌리, 소비에트 계획경제

박정희의 개발독재, 기시 노부스키의 국가주도 경제의 뿌리, 소비에트 계획경제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엘리트층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엘리트들은 당연히 러시아 제국의 기득권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귀족 가문이나 새로이 러시아에서 등장한 상공계층은 군인, 학자, 실업인, 의사 등 다양한 엘리트, 전문직으로 진출했고, 많은 수는 프랑스, 독일 등지의 발전된 서유럽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서유럽에 가지 않더라도 이미 이들은 그런 서유럽 언어들을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을 통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혁명과 내전으로 이런 엘리트층이 쓸려나가고, 남은 엘리트층은 혁명 정권과 사이가 소원하게 되자, 과거에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엘리트가 될 수 없던 이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바로 비드비젠치(Vydvizhentsy; 발탁자; 스탈린 시대의 신엘리트)’들이었다. 원래 도시 노동자, 빈농의 자녀로 태어나 고등교육은커녕 글도 깨치기 힘들었던 이들은, 신생 소련 정권이 제공해주는 국민 교육의 수혜를 받아 기술 인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특히 여기서 출신성분, 당성, 능력이 뛰어났던 이들은 체제가 ‘발탁’하여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몇 계단이나 껑충 올려주곤 했는데, 예컨대 대학 교육을 보장해준다든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의 대도시 유학 기회를 준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1920년 제작된 소련의 계몽 포스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면 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합니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려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합니다."

1920년 제작된 소련의 계몽 포스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면 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합니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려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합니다.”

1930년대 이후 이들은 ‘붉은 엔지니어’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엘리트들은 전문직, 엔지니어, 화이트칼라 관리직, 공산당 간부 등으로 진출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스탈린 시대 소련이 겪었던 격변, 5개년 계획과 대조국전쟁의 현장에서 이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자신을 발탁한 공산당 체제와 스탈린에 대해 무한한 충성을 다했다. 그들은 개천에서 태어나서 용이 된 자신들의 존재야말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소련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체 

하지만 소련 체제가 초기의 격변기를 거치고 점점 안정화되면서 다른 종류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먼저, 이 당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비드비젠치들은 대체로 세대 측면에서 동질적이었다. 대체로 혁명을 전후로 한 짧은 시기에 태어나서, 핵심적인 교육을 혁명 이후에 받았어야 하고, 혁명과 숙청으로 쓸려나간 선배 세대의 자리를 빠르게 메워야만 했다. 아마 대략 1900년생에서 1920년생 정도를 이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동질적인 특정 세대의 특정 그룹이 굉장히 강력한 카르텔로서 소련 체제의 핵심을 오랜 기간 지켜나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소련의 ‘제2의 건국 신화’나 다름 없던 5개년 계획과 대조국전쟁에서 눈 부시게 활약한 선배 세대를 후배 세대가 따라가는 것은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1960년대부터는 레닌이나 스탈린 시대에 있던 정치적 격변도 사라지게 되었으니, ‘발탁자’ 그룹은 계속해서 고위직에 앉아 소련 국가와 공산당의 핵심 요직을 주물렀다. 이런 인사 적체는 필시 소련 체제의 쇠퇴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몇몇 인물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이런 경향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 1906년 금속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년 12월 19일 ~ 1982년 11월 10일)는 제철소에서 일하면서 스탈린 시대 야금학을 공부했고, 간부로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하였다. 그는 이미 40대에 모스크바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고, 50대 후반에 전임자인 흐루쇼프를 몰아내고 최고 지도자가 되어 18년 동안 죽을 때까지 나라를 통치했다.
  • 전설적인 경제 관료인 니콜라이 바이바코브(1911년 3월 7일~2008년 3월 31일)는 1911년 석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34세에 석유부 장관으로 초고속 승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하였다. 전후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로 커리어를 이어가 1965년 소련 경제의 최고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어 1985년까지 무려 20년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
  • 1909년에 가난한 벨라루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레이 그로미코(1909년 7월 18일~1989년 7월 2일)도 30대 중반에 주미 소련 대사가 되었으며, 48세에는 외무장관이 되어 76세에 은퇴했다. 이런 사례는 이 시대의 인물에서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소련 '발탁자'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들,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의 신엘리트 ‘발탁자'(‘비드비젠치’)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 좌로부터 브레즈네프, 바이바코브, 그로미코.

나는 물러날 때 물러나지 않았다고 이들 세대가 특별히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들은 계속 언급했듯 소련 체제의 건설기와 위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활약하여 조국 근대화와 전쟁 승리에 이바지했다. 그것도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아마 자신들이 닦은 기반 위에서 ‘나약하게 자란’ 후속 세대가 못 미더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다 했다. 그 결과는 아마 1960년대부터 20여년 간 계속된 소련의 정체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후 소련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새로운 엘리트들을 탄생시켰던 소련 사회의 역동성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경향은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00년 무렵에 태어난 세대는 모든 것이 혁명과 내전으로 쓸려나가 강제로 평등해진 사회에서 출발했다. 자연스레 개중 능력이 뛰어나고 운까지 좋았다면 손쉽게 사회발전의 흐름을 타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고위직 자녀의 경우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비록 소련이 계층 간 생활 수준의 격차가 적은 사회주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부와 광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자본, 교육 기회, 생활 환경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련 태생으로 북한사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 진영국가에서 갈수록 세습화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비서의 아들은 당비서가 되고, 광부의 아들은 광부가 되었습니다.”(란코프 교수)

– 자유아시아방송, 소련지도자들의 후손들(2), 전수일, 2019. 8. 20. 중에서

공산귀족 ‘노멘클라투라’  

그 결과 후기 소련 사회를 특징짓는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 소련의 특권계급, 공산귀족)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멘클라투라는 간부 명단을 의미하는 말로, 나중에는 공산당 간부 전반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공산당 간부들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복지부동의 부패 집단으로, 당의 권력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쓸 수 있는 자들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이들 노멘클라투라의 생활은 굉장히 이중적이었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미국 자본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고 레닌의 어록을 외웠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특권을 활용해 자본주의 세계의 사치품을 수입하고 즐기는 데 몰두했다. 최고지도자인 브레즈네프부터의 취미부터가 외산 수입차와 고급 의류 쇼핑이었다.

반면 일반 인민들은 이런 사치품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자동차만 해도 일반 인민들은 품질이 훨씬 떨어지는 국산차를, 각종 연줄로 만들어낸 새치기로 가득찬 대기 명부에 이름을 올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 인민들이 주로 동유럽 단체 관광을 떠날 때, 미제국주의에 맞서 핵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고위 노멘클라투라의 자녀들은 워싱턴, 파리의 외교관으로 들어가 서방 생활을 즐겼다. 스탈린 시대 ‘발탁자’들이 건설하고 지켜낸 체제는 이제 그들, 무엇보다 그들의 자손들로 인해 정체하고 병들어가고 있었다.

과도한 음주를 경고하는 소련의 포스터 (1958)

공산귀족(노멘클라투라)와 그 자녀들에 의해 소련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위 이미지는 과도한 음주를 경고하는 소련의 포스터 (1958)

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개혁 조치들은 사회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의미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많은 사람이 소련 공산당을 몰아내고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방의 부유한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으니, 소련도 민주주의를 하면 평화와 안정,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에서 나온 요구였다.

하지만 계층에 따라 그 목적은 조금 달랐다고 평가해볼 수 있다. 젊은 노멘클라투라들은 뛰어난 인적 자본을 갖고 있었고, 국가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정보가 있었다. 몇몇 이들은 공산당 통제 체제가 사라질 경우 그 공백을 활용해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을 것이다. 설령 그런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 치더라도, 많은 젊은 간부들이 국가 재산을 외국에 팔아치우거나, 때로는 자신이 헐값에 인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들 중 특출난 거물들은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 러시아 신흥재벌)라는 새로운 특권층으로 변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돈으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었고, 자식들을 서유럽과 북미의 고급 사립학교에 유학 보냈다. 러시아 인민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던 체제전환기에 말이다.

숭고한 혁명과 산업화, 전쟁의 이야기가 어쩌다 이런 부조리한 비극으로 끝났을까? 어째서 소련은 간부직의 세습을 방치했을까? 이 점에 대해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옛날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아주 잘 사는 이유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쨰는 교육이고, 둘째는 인맥입니다. 제일 먼저 권력자의 아들딸들은 어린 시절부터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권력자 아들딸들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고위 간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가 큰 권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간부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결국 그들은 처음부터 발전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세계 어느 사회이든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류층의 특권 세습화를 통제나 관리 할 수 있지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자유아시아방송, 소련지도자들의 후손들(2), 전수일, 2019. 8. 20. 중에서

‘노멘클라투라’로 변신한 386 

몇십 년 전 소련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이렇게 쓴 이유는 이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도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은 100년 전 러시아와 비슷하게 철저한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상황이었다. 러시아처럼 엘리트들이 갑작스럽게 나라를 집단적으로 떠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전통적인 엘리트들 중 많은 이들이 토지와 자산을 잃고 몰락했다. 공산주의의 압력으로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은 땅을 내놓아야만 했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은 전쟁과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되었다.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말 소수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평평해졌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파괴'는 사회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사진은 미 공군에 의해 폭격당하는 원산의 모습(1951). 군대식 얼차려 중 하나인 '원산폭격'은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유래했다.

한국전쟁이 초래한 광범위한 ‘파괴’는 전후 한국 사회를 유례 없이 평평하게 만들었다. 사진은 미 공군에 의해 폭격당하는 원산의 모습(1951). 군대식 얼차려 중 하나인 ‘원산폭격’은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유래했다.

그 후 고난의 시간을 거친 뒤 남한의 신화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발탁자들처럼 특정한 세대의 특정한 그룹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대부분 농민이었던 이들은 조선시대와 실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 없는 심성을 지닌 빈농의 자녀로 태어나 박정희 시대에 근대 교육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이중 50년대생들과 60년대생 중 대학 진학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 대기업에 진출한 사람들은 한국 경제 성장을 견인했고, 또 동시에 그 수혜를 받으면서 이 사회를 주도해나갔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날 때부터 편한 자리에서 담배나 피면서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층에 있든 하층에 있든, 한국의 기본 경제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어떤 종류의 불공정과 부정의, 무엇보다 폭력적 문화와 마주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모두가 똑같이 가난했던 50년대생과 60년대생 중에서 공무원이 되었든, 대기업 직원이 되었든, 자영업이 되었든, 전문직이 되었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중산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대거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60년대생의 엘리트 그룹이 가장 큰 수혜를 본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20~30% 밖에 되지 않았던 대학 진학이라는 과제를 달성한 이들은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고, 사회에 진출해서는 각종 영역의 핵심 중추로 부상했다. 나는 여기서 일부 운동권을 뿌리로 하는 시민단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학 졸업장을 받고 사회 각지의 영역으로 파견된 대략 25%의 인구집단은 ‘386’을 형성했고, 그들은 한 줌의 시민단체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특히 IMF 위기로 그들의 선배 세대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대거 물러나자 그들은 30대와 40대의 이른 나이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훈련되었다. 마치 소련의 발탁자 세대의 선배들인 혁명과 내전 세대의 엘리트들이 내전으로 대거 쓸려나가면서, 발탁자 세대가 일찌감치 중요 직책을 맡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IMF 사태(1997)는 분명 국가적 위기였지만, 386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출처: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310312140465

IMF 사태(1997)는 386 선배 세대의 퇴장을 앞당기고, 386이 좀 더 빠르게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출처: 경향신문)

그 다음 벌어진 일도 소련에서 벌어진 일들과 유사했다. 386은 중년이 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앞선 세대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운 뒤 자신의 자리를 놓지 않고 후속 세대가 주도하는 세대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성벽을 세웠다. 이 과정은 어떤 면에서 보면 소련보다 더 심한 면도 많았다. 특히 자녀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랬다. 노멘클라투라들이 활약하던 시대는 소련뿐 아니라 서방 국가들도 부의 불평등을 억제하는 분위기가 강하던, 사민주의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386들이 엘리트로 부상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회의 중추로 자리매김 하던 때는, 이미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뒤로, 불평등과 세습에 대한 저항감은 세계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약해져 있었다.

6 vs. 86 

그 결과 대학에 가지 못한 ‘6’들과 대학에 갈 수 있던 ‘86’들 사이의 골은 점점 더 심해졌다. IMF 위기, 2000년대의 집값 상승, 이어지는 꾸준한 경제 성장 등은 한국 사회에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세계화로 일국 내에서 연결되어 있던 고부가가치 영역과 저부가가치 영역 사이의 사슬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 한국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몇 가지 우연적 요소와 필연적 조건들이 개입하여 60년대 생 사이의 분화가 불평등 악화를 견인하고 있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자, 소련의 사례를 보건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더욱 명약관화하다. 란코프 교수가 ‘광부의 아들은 광부가, 당간부의 아들은 당간부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획득한 지위와 계급을 후대에도 물려주고 싶었던,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에 충실하였던 386들은 자녀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외국어고, 과학고, 영재고, 자사고, 국제고 등 수많은 특수한 고등학교와 8학군의 명문고 등. 아니면 영어 열풍에 편승하고자 자녀들을 일찌감치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로 보내 당당한 세계시민으로 키워내기도 하였다. 이런 교육투자에는 당연히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기에 모든 이들이 성공을 거머쥐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보자면, 80년대에 대학을 나와 전문직, 대기업, 대도시 공무원으로 진출한 부모 밑에서 자란 90년대생 내 또래들은 상기한 특목고 진학과 조기유학 등의 기회를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이제 학교는 배움과 공존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계급을 재생산하는 경쟁의 공간이었고, 386 엘리트는 그 경쟁과 배제의 시스템을 강화했다.

이제 학교는 배움과 공존의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계급을 재생산하는 경쟁과 배제의 공간이다. 86은 그 경쟁과 배제의 시스템을 강화했고, 자신의 자녀들을 그 시스템의 ‘승리자’로 만들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즉 대학에 가지 못한 부모를 둔 90년대생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받았던 사교육은 아마 ‘단과학원’, ‘보습학원’, ‘공부방’ 정도였을테고 그마저도 아니면 PC방이나 만화방 등에 갔을 것이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느냐면 내가, 내 주변 친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에게 조기유학은 발음교정을 위해 혀를 인위적으로 늘린다는 얘기만큼 기이하게 들리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또 당시 불어닥쳤던 특목고나 자사고 열풍에 나도 지원해보기도 하였으나 당당히 낙방했다. 내가 살던 지역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자녀 교육에 그렇게 신경쓸만한 자원, 정보, 의지 등이 ‘386’ 부모에 비하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학업성취도에 있어서 차이로 나타났다. 사실 나도 수능은 전혀 잘 보지 않았었고, 지방 고등학교에서 내신을 잘 받아서 농어촌 전형으로 서울대에 들어갔다.

다시 강조하자면 모두가 이런 도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상당히 유의미한 확률로 예외라는 것은 늘 존재하고, 이런 계층화를 완화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도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식이 현실에 엄존하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철의 공식’은 이후 사회에 진출하였을 때 경제적 격차로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서울대 나와도 취직이 안 된다’는 말이 많지만, 그렇다면 서울대, 아니 인서울도 못 나왔다면 어디로 가야한다는 말인가?

상층 세계화 vs. 하층 세계화

따라서 조국 딸의 입시를 둘러싼 논란은 단지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광복 이후 약 70년 간 발전해온 성과에 대한 점검이라는 차원에서 심원한 의미가 있다. 한 번 조씨가 한영외고를 거쳐 고려대, 의학전문대학원에 간 것에 어떠한 탈법, 불법 요소가 없었고, 그리하여 조국이 아무런 문제 없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고 치자. 설령 그렇다고 한들 ‘평범한’ 이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아니 존재 자체도 몰랐던 교수들 사이의 ‘자녀 스펙 품앗이’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본에 대해 죽창가를 선동하고, 민족주의의 폭풍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사람이 자녀 둘을 모두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 보내 교육시킨 것 또한 남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그가 ‘용이 되어 날아오르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고 선언한 것도 여전히 진실 아닌가. 마치 노멘클라투라들이 자본주의를 욕하며 누구보다 그들의 산물을 즐기고, 노동자 농민의 유토피아를 말하면서 누구보다 노동계급과 유리된 삶을 살고, 자녀들은 어떻게든 좋은 자리에 꽂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조국 후보자가 2012년 3월 2일에 작성한 트윗. https://twitter.com/patriamea/status/175491412169719808

조국 후보자가 2012년 3월 2일에 작성한 트윗.

솔직히 나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이 되든 말든, 그가 검찰 개혁을 하든 말든, 그런 것은 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와닿지 않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저 한 인간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정치 드라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대를 가로막는 386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로 386이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회 각지에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 조만간 한국 사회는 절대 부숴질 것 같지 않던 386의 철옹성을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혹은 어떻게 수비해야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겪지 않을까 기대된다. 즉, 이 문제는 다소 정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소련의 노멘클라투라 문제와 달리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고 개방적이기에 시간이 금세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은 마침내 백일하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거대한 계층화다. 이 흐름은 막을 수도 없고, 386을 쫓아낸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막대한 교육 투자와 인맥으로 무장한 엘리트들, 즉 386의 자녀들이 결국 그 자리를 이어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물론 결코 이전과 같은 형태가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이는 결국 앞서 자주 언급했던 이중의 세계화 문제와도 이어진다. 정말 거칠게 말해서, 세계 도시를 오가는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상층 세계화의 수혜자는 ‘86’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생산 시설이 이전하고 저개발국 이주민들과 경쟁해야하는 하층 세계화의 피해자들은 ‘6’의 자녀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의 집회는 사회적으로 과도한 관심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집회와 그 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폄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조국 입시 게이트’에서 그 입시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조명 되어야겠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그 입시 경쟁에 참여할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 ‘복학왕’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 내 생각이다.

'86'의 아이들은 상층 세계화의 혜택을 받는다.

상층 세계화의 수혜자는 ’86’의 자녀들이 될 테고, 하층 세계화의 피해자들은 ‘6’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평등’의 사회적 유익 

계층화 자체가 무엇이 문제냐고 누군가는 되려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조국이 문제가 있다 치더라도, 중산층이 막대한 교육 투자로 자식들에게 다양한 자본을 물려주고, 인적 자본을 축적시키는 행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나? 사실 이는 굉장히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어머니의 요식업이 15년 전부터 잘 풀려서 다른 또래들이 주야간 공장을 다닐 때 편하게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대다수 부모는 결국 계층에 상관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만큼’ 자녀를 지원한다. 어찌보면 소련의 노멘클라투라들도, 한국의 386들도 그 점에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집합적으로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개별 사회는 화석연료를 열심히 소모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것을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화석연료를 더 많이 소모하고자 경쟁한다면 지구는 점점 뜨거워져 전체 인간이 살기 힘들어진다. 평등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평등은 구성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범죄율을 낮춰주며, 전체 사회의 안정성을 높여준다. 과거 사민주의 전성기가 모든 것이 완벽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풍요롭고 평등하다는 환경 자체가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심리적 안정이 되어준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등의

개인이나 소수의 ‘합리적 선택’의 합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 평등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합은 아니지만, 그 사회적 효용은 분명하다.

또, 개별 국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평등은 구성원 간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 의식의 기반이 되어준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상당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을 때, 그 집단에 대해 헌신적이고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어째서 소련인들은 조국을 위해서 그런 엄청난 고통을 감내했으며,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업적들을 동시에 달성해낼 수 있었을까? 사회가 평등한 것은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는 데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구 러시아 제국 같은 귀족 사회, 필리핀 같은 지주제 사회, 현대 미국 같은 새로운 계층 사회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같은 집단’이라는 동질감을 앗아간다. 엘리트들은 타국의 엘리트와 더 동질감을 느끼고, 대중들과 심리, 정서 면에서 점차 유리된다. 이 골이 누적되면 결국 국가의 정치적 안정성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결국, 노멘클라투라들도 나중에는 인민을 버리고 올리가르히가 된 것이고, 그 올리가르히에 분노한 러시아인들은 푸틴을 뽑아주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

상하층 계층화와 엘리트 과잉생산

음울한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피터 터친은 변경 지대에 위치한 평등한 사회가 제국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발전을 일정 수준까지 이룩하면, 제국은 발전의 동력이 되었던 여러 요소를 상실하여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했다. 첫째 요인은 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발전에서 더 많은 과실을 누린 지도층이 등장하고, 세습이 시작되면서 사회 연대의식이 약화되는 것에 있었다.

터친은 그런 와중에 사회가 완숙하여 발전의 속도가 느려질 국면이 되나 엘리트층의 재생산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엘리트가 과잉생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과거에는 엘리트를 위해 제공되는 100의 파이를 10명의 엘리트가 나눠먹었다. 그런데 10명의 엘리트가 20명으로 불어났고, 엘리트들의 눈높이는 이제 20을 바라고 있는데, 파이는 겨우 150으로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John Walker, CC BY

John Walker, CC BY

터친은 이런 국면에서 엘리트 간의 갈등도 더욱 심해진다고 분석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이는 곧 내전을 의미했고,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안정화된 정치적 혼란 정도를 의미한 것이었고 말이다. 이번 서울대생들과 고려대생의 집회는 그런 ‘엘리트 과잉생산’도 우리 사회에 감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울대생들이 (그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도 팍팍하게 살고 있는데’ 그 규칙을 위반한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인서울 명문대생들의 반감과 그렇지 못한 다수 청년의 반감은 미묘하게 구분되는 점이 있다고 본다. 상층과 하층의 계층화라는 첫 번째 골과, 과잉생산된 엘리트들의 내부 투쟁이라는 두 번째 골로 말이다.

즉, 이러한 점을 종합했을 때 당분간 한국 사회는 계층 문제로 더욱 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을 것 같다. 저성장 국면에서 계층 문제는 이민, 젠더 갈등의 문제를 심화시켜 반엘리트 정서를 충족시켜주는 정치인들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만큼 계층화의 역사가 길지 않고(1953년에 모든 것이 초기화 되었기에) 이민 문제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으며, 기성 정치권의 지도력이 아직은 견고하기에 이 모든 것은 기우일 수 있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나이 조국이 가족들까지 모두 조사받고 그 위선이 손가락질 받게 될 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니면 철의 장막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레닌의 유훈을 받들어 모시던 공산당 관료들이 하루 아침에 국가 재산을 훔치는 강도들로 변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서로 다른 종류의 인간 

그렇다면 이런 위기가 닥쳐오기 전에 한국 사회가 이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사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역사학자 발터 샤이델은 [불평등의 역사(The Great Leveller)]에서 인류 역사상 불평등을 장기간에 걸쳐 유의미하게 줄인 요인은 오직 네 가지 대재앙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총력전, 공산주의 혁명, 대규모 전염병, 국가 붕괴가 각각 그것이다. 한국과 소련을 포함해 상당수 국가들이 총력전과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몹시 평등한 사회로 이행했고, 그를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 누가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파괴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평등 사회를 이룩하자고 주장할 것인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룰수 조차 없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주도성장이 불평등 해소에 실패한 것은 어찌보면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장기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대부분의 정책들은 그다지 가시적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한 번 소련과 한국에서 평행선처럼 통용되었던 공식을 떠올리자. 사회가 발전하면 차등적으로 이득이 돌아가며, 더 많은 이득을 확보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녀에게 그 자원을 투자한다. 이 과정에서 공식적 교육과 비공식적 인맥이 개입하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다. 조국 딸이 그렇게 어이 없게 논문의 제1저자로 등극하게 되는 과정을 당시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조국 후보자의 임명을 둘러싼 이 모든 이슈가 너무 재미 있었음에도, 다소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 86과 6 사이에 벌어진 분기점에서 출발해 끝내 그들 자녀 세대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벌어진 계층화가 이토록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는 당분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1인당 GDP 3만 달러의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데 이 모든 일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일이었다는 점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것은, 역사적 선례와 주변 선진국의 상황을 보았을 때 이 같은 상황에 개선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이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수준으로 엘리트와 나머지의 격차가 커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한 00년대생들 사이에서 그 격차는 더 클 것이고, 그 뒤는 아예 서로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을까? 386 세대가 천년왕국을 건설해 결국 한국도 소련의 운명을 따라가게 될까? 아니면 어찌어찌 적응은 해서 더 역동적이지만, 영국과 미국 같이 신분제가 형성되는 사회로 안착할까? 그 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모른다’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386도 아니고, 386이 만들어준 레일 위만 달려온 청년들도 아닌 다른 누군가들이 만들 수 있는 길 말이다.

왕관 귀족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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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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