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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사는 집을 혐오하는 사람들, 자기 집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럼에도 소득의 대부분을 집에 털어넣어야 하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았다.” (350쪽)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남성들은 잠긴 문 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 밖으로 내몰렸다.” (140쪽)

“도심 빈민가에서는 유년기에 벌어지는 큰 사건들이 대체로 인생을 결정한다. 더 크고 난 뒤에는 손에 꼽을 좋은 일이 전혀 없을 수도 있었다.” (358쪽)

-매튜 데스몬드, [쫓겨난 사람들] (동녘, 2016) 중에서  (강조는 편집자)

이번 주말에 이 책만 읽었다. 내 취향대로 아늑하게 꾸민 새 아파트에서 푹 쉬면서, 계속 퇴거당하며 최악의 집들을 전전하는 세입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좀 민망했다. 고교 시절, 내 대학 전공이 될 사회학에 관해 가졌던 첫인상이 이랬다. 도시의 구조적인 빈곤 문제를 치열하게 실천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이미지.

저자인 사회학자 매튜 데스몬드2008년 5월부터 약 1년 6개월 동안 미국 밀워키시의 게토(노스사이드)와 백인 저소득 세입자들이 사는 트레일러 단지에서 직접 거주하면서 주로 정부 보조금(우리나라의 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 장애수당 등) 수령자들의 주거 불안의 현실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말미에 간략히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 아무래도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직후라 저소득층 세입자들의 주거 불만이 여느 때보다 심각했으리라는 점은 감안하고 봐야할 듯 하다.

[쫓겨난 사람들: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 매튜 데스몬드 저/황성원 역 | 동녘 | 2016년 12월 06일
[쫓겨난 사람들: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 매튜 데스몬드 저/황성원 역 | 동녘 | 2016년 12월 06일

‘교통권’ 관점에서 본 임차인의 협상력 

난 미국의 인종간 주거 구역 분리문화, 저소득층을 상대로 한 민간임대주택시장, 기초복지수당에 의존하는 도시빈민 가구가 많게는 수당의 70~80%를 주거비로 지출하는 현실, 밀워키주의 세입자 퇴거 관련 사법제도[footnote]”경찰이 세입자의 행동에 문제가 있을 경우 집주인을 처벌하는 ‘소란부동산조례(nuisance property ordinance)’가 탄생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일정한 시간 범위 안에 911에 전화를 너무 많이 걸었다는 이유로 부동산들이 ‘소란 장소’라는 지적을 받았다. 밀워키에서는 그 기준이 30일 동안 세 번 이상이었다. 이 조례는 부동산 소유주들이 ‘소란 행위를 경감시키지 않으면’ 그들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그들의 (주택임대사업)면허를 취소하거나, 부동산을 박탈하거나, 심할 경우 그들을 투옥까지 시켰다. 조례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조례가 있으면 경찰은 우선순위가 높은 범죄에 인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돈을 절약하고 값진 자원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대대수의 사건(83%)에서 가정폭력 때문에 소란부동산 소환장을 받게 된 집주인들은 세입자를 퇴거시키거나 앞으로 경찰에 전화하면 퇴거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263쪽) [/footnote] 등에 관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았다. 책 내용을 요약하기도 어려운데 뭔가를 평하긴 조심스럽지만, 이것 하나는 지적하고 싶다.

데스몬드 교수가 제시하는 ‘비자발적 강제이주’의 추정치는 과연 타당한가. 게토 지역 내의 단위 면적당 임차료가 외곽보다 높은 이유는 임대인의 폭리보다 미국의 열약한 대중교통시스템 때문에 차가 없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구역이 제한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임차인의 협상력이 약한 게 아닐까? 참고로, 이 책에 나오는 주거가 불안한 세입자들 대부분 차가 없다.

그렇다면 시정부와 연방정부가 버스나 트램과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확충해서 차가 없는 저소득층의 출퇴근 가능 구역을 늘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비정하다. 미국의 부유한 동네들은 빈민들이 쉽게 오지 못하도록 자기네 동네로 연결된 대중교통 확충을 반대한다고 한다.

대중교통은 선택재가 아니라 보편적 사회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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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권’이란?

“교통권은 국민들이 보편적 교통 서비스를 제공받아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말한다. 국민 누구든 경제적, 지역적, 신체적, 사회적 여건에 상관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이기도 하다. 저소득층, 낙후지역, 장애인, 소외계층을 위한 교통대책과 사회 통합을 위한 교통정책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헌법을 개정해 교통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해야 한다.” (모창환, ‘헌법에 교통권도 기본권으로’, 경향신문, 2017. 6. 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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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그나마… 

우리나라의 임대주택소유주가 임대차목적물을 훼손하거나 임차료를 내지 않는 세입자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기본적인 법절차는 다음과 같다.

  1. 부동산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신청 및 집행관의 집행(2~3주)
  2. 인도소송(4~6개월)
  3. 집행관 인도 집행(2개월).

아무리 빨라도 세입자를 합법적으로 내보내려면 반 년 정도가 소요된다. 송달이 잘 안되면 더 걸릴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임대주택 시장에서는 세입자 보호가 훨씬 취약하다. 월세가 밀린 세입자가 5일(5 day notice), 4주(4 weeks notice)와 같은 짧은 통지기간 내에 구할 수 있는 집이 어떨지는 뻔하지 않은가.

주거는 미국처럼 민간 임대주택시장이 중심이지만, 매번 원가 이하라고 비난받는 우리나라의 전기요금, 상하수도요금, 난방 및 취사용 도시가스요금, 대중교통요금이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티나지 않지만 꿋꿋히 역할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집 주택 보험 안전 공공

또, 우리나라 민사집행법 시행령의 압류금지 최저금액은 185만 원인데, 미국은 1,000달러밖에 안된다. 소송촉진특례법상 법정이율은 내가 로스쿨에서 배울 때만 해도 연 20%였는데, 올해(2019) 5월부터는 미국과 같은 연 12%로 낮아졌다. 변호사 시장에는 좋지 않지만, 인도소송에 피소된 저소득임차인들은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공익법무관의 조력을 받을 수도 있다. 최악을 보고 차악이라 그나마 낫다고 보는 걸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공공영역이 잘하고 있는 분야도 있다고 수긍하게 된다.

푸드 스탬프(Food Stamp; 미국 빈곤층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일부)[footnote]푸드 스탬프(Food Stamp): 식료품 구입비 지원 대책으로 시작된 바우처의 일환. 2008년 SNAP(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footnote]처럼 주거 바우처를 저소득층 기초생계급여에서 별도로 분리하자는 데스몬드 교수의 제안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푸드 스탬프처럼 바우처를 받은 사람이 술이나 담배로 바꿔서 팔아먹는 일은 없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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