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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치지 않고 글자를 빨아들인다. 취미가 독서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서 글을 읽고, 길거리 간판을 볼 때도 글을 자동으로 읽는다. 심지어 우리가 글을 읽고 싶지 않아도 글은 우리에게 읽.힌.다. 우리가 글을 읽는 일은 마치 그 작동원리를 생각하지도 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숨쉬는 것 같은 일이다. 우리는 그 메커니즘에 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읽는다.

간판(에 쓰인 한글)을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간판에 적힌 글자는 그냥 자동으로 우리에게 들어온다.
간판(글자)을 우리는 취사선택해 어떤 건 읽고, 어떤 건 읽지 않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간판(글자)은 그냥 저절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프랑스의 신경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Stanislas dehaene)[글 읽는 뇌] (학지사, 2017)는 우리가 어떻게 글을 읽을 수 있는지에 관해 탐구하는 책이다. 드앤은 우리가 눈을 통해 글을 읽는 행동에서 시작하여, 뇌에서 문자를 인식하고 그것을 발음하는 일, 그리고 그 문자의 의미와 연결시키는 법, 문자의 진화적 기원과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고 아동의 문자 학습과 난독증까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 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 하나만 소개해본다.

스타니슬라스 드앤 (출처: arretetonchar.fr) https://www.arretetonchar.fr/parcours-rayon-gamma-facteur-epsilon-lint%C3%A9r%C3%AAt-dapprendre-des-langues-anciennes-selon-stanislas-dehaene/
스타니슬라스 드앤 (출처: arretetonchar.fr)

인간은 어떻게 글을 읽을 수 있지? 

먼저 읽기의 신경적 기초는 제법 간단하다. 뇌 영상 기술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 공통적으로 활성화되는 부위를 대략적으로 읽기에 관여하는 곳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좌뇌의 후두측두부(left occipitotemporal region)에 위치한 이 곳은 추상화된 문자 기호를 판별하는 역할을 하는데, 드앤은 이를 ‘문자상자(letter box)’라고 부른다. 이 문자 상자는 놀랍도록 문자를 잘 기억해서, 서체나 크기의 차이를 모두 무시하고 핵심적 형태만 파악하여 음소와 의미를 담당하는 뉴런을 활성화시킨다.

만약 뇌졸중 등의 사고로 문자상자가 손상되거나 절개될 경우, ‘실독증’이라고 하는 읽기 장애가 생기는데 흥미로운 것은 숫자를 읽고 쓰는 작업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이에 아무거나 쓴다고 다 같은 게 아니고, 우리 뇌는 숫자와 글자를 분명히 다르게 처리한다는 증거다.

안구가 글자를 인식해서 문자상자가 점화되면, 뇌는 빠르게 두 가지 경로로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한다. 숙달된 성인의 읽기 능력은 굉장히 빨라서 단어를 그 철자로서 병렬적으로 동시에 파악하여 한 번에 인지한다. 예컨대 ‘병렬적인’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병.렬.적.인.’으로 읽지 않고 동시에 네 글자를 처리하여 ‘병렬적인’이라는 통합된 단어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문자상자에 불이 들어오면(
문자상자(좌뇌의 후두측두부)에 불이 들어오면(글자를 인식하면) 뇌는 그 글자(단어)를 분절하지 않고 ‘한번에'(통합적으로) 처리한다.

그 뒤 문자상자와 연결된 시냅스(synapse; 연접; 한 뉴런(신경계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 지점)는 해당 단어를 음소 단위로 파악하고 소리값을 읽어낸다. 동시에 다른 연결망은 의미를 담당하는 공간으로 가서, 해당 단어가 뇌 속에서 어떤 의미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탐색한다.

이 과정은 마치 바다의 밀물이 하천 쪽으로 들어가 하계망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는데, 드앤은 이를 ‘두뇌의 만조’라고 표현한다. 만조가 충분히 일어나면, 뇌는 다른 뉴런들과의 종합적 연결을 파악하여 눈으로 읽은 그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발음을 내는지를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적합성이 떨어지는 후보들은 더 적합성이 좋은 후보에게 자리를 내준다.

지구상의 모든 언어가 머릿속에서는 하나라고?!
우리가 글을 읽는 과정. 인간은 시냅스를 통해 소리와 의미를 통합적으로 처리한다.

소리와 의미, 이 두 경로를 동시에 이용하기에 우리는 동음이의어를 구분해내거나 철자는 달라도 발음이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예컨대 ‘눈’이라는 단어를 보면 우리는 문맥에 따라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 혹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인지를 구분해내는데 이 과정에서 의미 처리 영역이 더 활성화된다. 영어에서 eye와 I를 구분해내고 eye를 ‘아이’로 읽는 말도 안 되는 철자법이 용납되는 것도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인간의 뇌는 같은 '소리값'을 가진 문자(단어)도 맥락에 따라 그 의미까지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를 구별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같은 ‘소리’와 ‘의미’라는 두 경로를 동시에 이용하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를 구별하거나 철자가 달라도 발음이 같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읽기의 역설 

흥미로운 것은 아동이 글읽기를 배움과 동시에 언어에서 음소[footnote]더 작게 나눌 수 없는 음운론상의 최소 단위. 달리 표현하면, 언어 사용자가 인식하는 소리의 최소 단위. 예를 들면, ‘물’, ‘불’, ‘풀’은 초성인 ‘ㅁ’, ‘ㅂ’, ‘ㅍ’에 의해 의미가 구별되므로 /ㅁ/, /ㅂ/, /ㅍ/은 각자 다른 음소다. 참고로 ‘음절’은 한 개 이상의 음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종합적인 음의 느낌을 주는 말소리의 단위로, 보통은 몇 개 이상의 음소가 결합하지만, 모음은 단독으로 한 음절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바다’의 ‘바’와 ‘다’ 따위가 음절이다. (참조: 위키백과, 나무위키, 국립국어원)[/footnote]를 아주 추상적 수준으로 분리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문맹자와 문해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에서 문해자들은 일관되게 자음 바꿔치기 과제나 유사 단어(그럴싸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아무 의미는 없는 단어) 읽기 과제를 훨씬 더 잘 수행해냈다. 문자에 관한 이해는 전체로서 인식되는 단어의 소리를 질서 있게 분리해 뜯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읽기의 역설’이 등장한다. 모든 인간은 문자 체계에 관계 없이 문자상자에 의존하여 글을 읽는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인데, 인류 진화의 역사는 수백만 년인데 문자 발명은 기껏해야 5천 년이었다는 ‘시간 차이’가 문제다. 인간의 뇌는 문자의 탄생을 예견하여 진화하지 않았고, 따라서 독자적으로 발명된 문자 체계를 인식하고 이용하는 신경계의 경로는 충분히 더 다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은 문자 체계의 종류나 발명의 역사에 관계 없이 똑같은 뇌 부위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드앤은 해당 부위를 영장류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그 열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영장류들은 그러면 무엇을 볼 때 좌뇌 후두측두부(인간의 문자상자)를 활용할까? 몇몇 실험은 이 부위가 영장류가 자연계에 흔치 않은 몇몇 기호들을 인식할 때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8, T, Y, O, △ 등이 그러하다. 이 기호들의 특징은 이렇다.

  1. 첫째, 자연계에서 그 모습을 찾기 힘들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뭇가지 더미를 공중에 아무렇게나 던졌을 때 T나 Y 모양을 맞춰 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2. 둘째, 이 같은 기호들은 접지기호로서 물체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탁자 위에 책을 한 권 쌓아보자. 책의 모서리와 탁자 면이 만나는 선분이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 어떤 물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윤곽선은 이 같은 접지기호들을 통해 빠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이는 우리의 시각이 대칭을 선호하고 빠르게 탐지하는 메커니즘과 흡사한데, 드앤은 대칭과 난독증에 대해서도 챕터 하나를 할애한다).

책

추상적 윤곽선을 잡아내는 문자상자(좌뇌 후두측두부)의 이 같은 특성 덕분에, 인간은 추상화 정도를 더하여 비슷한 기호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이를 라스코 동굴벽화를 비롯한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실 혈거인(穴居人: 동물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린 그림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이 그들이 그린 추상적인 선분이나 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때부터 여기에 무언가 의미를 담았을 것이고, 그 선분은 수메르의 문명사회에서는 행정편의를 위한 쐐기문자로 진화하는 발판이었다.

라스코 동굴. 기원전 15,000년~13,000년 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구석기 시대 그림이 유명하다.
라스코 동굴. 기원전 15,000년~13,000년 경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구석기 시대 그림이 유명하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읽기를 발명하면서 좌뇌 후두측두부의 뉴런들을 색다른 방식으로 재활용해, 전혀 예상치 못한 업무(기호를 만들어 의미를 연결하기)에 할당하게 된 것이다. 뇌가 문자를 예견하고 진화한 게 아니라, 문자가 피질에 맞춰 진화했다.

알파벳의 발명 

그렇게 먼저 연결된 것은 의미였다. 처음에는 좌뇌 후두측두부가 관심을 기울이는 기호들 중에서 자연계에서 비교적 흔히 관찰될 수 있는 기호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어휘와 연결된 기호의 개수는 계속 늘어났는데, 어휘의 수에 비해 기호의 수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필경사들(직업으로 글씨 쓰는 사람)은 특정한 어휘가 어느 의미 집합에 있는지를 할당해주는 한정기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문자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그림문자’ 단계가 실은 놀랍도록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자나 이집트 문자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한자에서 그림과 직결되는 글자들은 점점 비중이 줄어갔고 추상화되었으며, 의미와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의 조합으로 체계를 확장시켰다.

이집트 문자는 얼핏 보면 마지막까지도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그림문자인 것처럼 보이나, 이는 많은 공력이 들어간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고, 필경사나 대중들은 곧바로 기호를 추상화시켜 알파벳 단계 직전까지 발전시키기도 했다(다른 문자체계에서는 거의 활용 안 되는 얼굴상으로 음절을 나타낸 마야 문자는 비교적 예외적인 편이다).

근동(서아시아)에서 이러한 발전은 추상화를 혁신적인 단계까지 밀어붙인 알파벳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이는 처음에 자음의 표기만으로 의미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셈어족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예컨대 ‘글 읽는 뇌’를 ‘ㄱㄹ ㅇㄹㄴㄴ ㄴ’로 간편하게 써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음소를 분리시키는 추상화 작업이 익숙치 않은 이들에게 모음을 따로 고안해내는 것은 아직은 상상력 밖의 일이었고, 일단은 좀 더 와닿는 자음의 음가를 추상적 기호와 연결시키는 일로 시작한 것이다(가령 페니키아 문자). 이 체계는 이후 그리스로 들어가 모음이라는 개념의 창안으로 이어졌으며, 완전한 알파벳으로 진화해 문자 혁신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페니키아 문자.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지역이다. 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원시 가나안 문자에서 비롯된 음소 문자로 자음문자다. 고대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용한 상업민족인 페니키아인이 페니키아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었다.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 그리스 문자, 로마자, 키릴 문자의 조상격이다.
페니키아 문자. 페니키아는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지역이다. 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원시 가나안 문자에서 비롯된 음소 문자(자음문자)다. 고대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용한 상업민족인 페니키아인이 페니키아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었다.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 그리스 문자, 로마자, 키릴 문자의 조상격이다.

드앤은 이 같은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신경적 기초를 전전두엽의 ‘전역 작업 공간(Global neuronal workspace)에서 찾았다. 뇌를 구성하는 다양한 모듈 간의 연결이 빈약한 영장류 사촌과 달리, 인간은 전전두엽을 중심으로 각종 모듈들이 이어지는 방대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전전두엽(빨강색 부분, 출처: 위키미디어, CC BY SA 2.1)
전전두엽(빨강색 부분, 출처: 위키미디어, CC BY SA 2.1)

드앤은 이 ‘전역 작업 공간’에서 다양한 감각기관에서 입력된 정보가 통합되고 색다른 방식으로 엮여 창의성의 불꽃이 튄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다른 종과는 차별화되는 신경가소성을 활용하여 새로운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학습하며, 그 덕분에 윤곽선을 파악하기 위한 자연의 접지기호를 문자에 할당할 수 있었다.

뇌

또 이 영역을 의미 영역, 소리 영역, 운동 영역과 연합하여 ‘글’이라는 것을 창조할 수 있었다. 우리의 손은 ‘글’이라는 글자를 쓰는 법을 기억하고 있고, 우리 입은 ‘글’이라는 글자를 발음하는 법을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 눈은 이것이 어떤 소리를 내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다.

드앤은 바로 이 수많은 모듈을 통합해내는 힘이 인간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숫자, 기호, 쐐기문자를 거쳐 알파벳까지 만들어냈으며, 바로 그 덕에 하얀 바탕 위의 검은 것이 우리에게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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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인간이 단어를 여러 구성성분으로 쪼개서 병렬적으로 처리한 뒤에 다시 다양한 정보들과 통합하여 인지하는 방식을 읽다보면, 테드 창의 SF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헵타포드’라는 외계인의 존재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는, 상호보완적이면서 모순되는 두 방식을 대비시킨다.

SF 소설 작가 테드 창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역, 엘리, 2016)
SF 소설 작가 테드 창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역, 엘리, 2016)

인간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분리하여 인식한다. ‘분리’라는 단어를 ‘ㅂ ㅜ ㄴ ㄹ ㅣ’로 쪼갠 뒤 소리, 의미와 함께 다시 합쳐서 파악하는 식이다. 자연스레 사고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전개된다. 우리의 처리가 병렬적으로 빠르게 일어나서 전체적인 모습으로 단어를 파악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실은 그저 분리, 인식, 통합이라는 과제를 엄청난 속도로 수행하는 것일뿐이다.

반면 헵타포드의 인지 방식은 전일적(하나가 전체로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들이 쓰는 어의문자는 몇 개 구성성분으로 쪼개질 수가 없고, 환원될 수 없는 전체상이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주인공은 헵타포드의 문자를 보면서, 앞에 쓰는 글자의 모양이 뒤에 쓰는 글자의 모양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시간순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마치 미래를 알고 글을 쓰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 헵타포드의 시간은 순차적이 아니고, 그들은 원인과 결과로 세상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언어나 행동은 자신이 이미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에 가깝다.

여기서 완벽한 언어 체계에 대한 테드 창의 사고실험을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지구라는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개체들을 연속된 그물망 속에서 분리해내고 명확하게 읽어내는 인식체계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세계 내지 우주는 연속적인 모습도 갖추고 있다. 거시적 차원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되먹임하는 복잡계라는 점이 그렇고, 에너지나 질량을 명확히 정의할 순 없고 다만 스펙트럼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그렇다.

사실 이를 인간의 환원적, 분석적, 순차적 시간에 따른 인과라는 인지 방식으로 온전히 파악해내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일주의(holism)인데, 전 체계를 하나의 상으로 파악하여 개체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특질을 파악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 과학이 이 같은 접근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한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반면 헵타포드는 지면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대류하는 유체를 떠도는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전후좌우의 구분이 없는 시야를 발전시켰다. 테드 창은 이러한 형태의 생명체가 지성을 갖추게 되면 세계를 환원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전체상을 인식하게 되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순차적인 시간관 속에서, 맞지도 않는 인과관계에 메달리는 인간의 인식체계를 갖춘 주인공이 전일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헵타포드의 인식체계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 싶다고 갈망하는 데서 테드 창이 어떤 인식체계를 더 ‘완전’하게 여기는지 그 실마리가 존재하리라. 테드 창의 또다른 단편 [이해]에서 초지능을 가진 주인공은 헵타포드의 어의문자 같은 것을 궁극의 아름다움을 표상하는 방법론으로 설정하고 탐구한다는 데서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체계가 만들어내는 대표적 환상인 ‘자유의지’가 헵타포드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헵타포드는 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결정론을 따라 그대로 세계를 받아들여 행동한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 드니 빌뇌브, 2016)에서는 이 같은 인식체계의 차이가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헵타포드가 인간에게 지극히 단순한 수체계를 엄청나게 어렵게 표현하는 것에서 지나가는 듯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소설을 주의깊게 읽은 관객이 아니라면 이를 영화에서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글 읽기에 대한 책을 읽다보니, 테드 창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이 두 인식체계를 얼마나 세심하게 다뤘는지 새삼 그 깊이에 감탄하게 된다.

YouTube 동영상

끝으로 하나만 더.

로마자를 쓰는 곳에서는 문자를 가르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1. 하나는 파닉스(Phonics: 단어가 가진 소리, 발음을 배우는 교수법)다. 각각 알파벳이 발음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연습시키는 방법론이다.
  2. 다른 하나는 ‘전체 단어법’이다. 전체 단어(whole language)로, 단어의 철자와 발음을 외우기보다는 전체 단어의 상을 그대로 뇌가 인식하도록 교육시키는 방법론이다.

인간이 헵타포드가 아닌 이상 ‘전체 단어법’이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고, 아이의 학습 부담을 덜고 흥미로운 참여적 읽기 수업을 한다는 몇몇 교사의 꿈은 산산조각났다. 해당 교수법을 채택한 모든 주에서 일관되게 읽기 성적이 떨어진 것이다. 특히 영어는 발음과 철자법의 연계가 극악하여 숙달된 독해 능력을 갖추기 굉장히 힘든 언어다.

드앤은 현재까지는 파닉스를 더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인지방식과 부합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차라리 손으로 글자 모양을 따라 쓰게 하여 운동영역과의 신경연합을 긴밀하게 하는 교수법 정도가 보조적으로 채택될만 하다고 말한다.

역시 인간은 인간이지 헵타포드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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