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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서[footnote]흔히 ‘마틴 루터 킹’이라고 부르고 쓰지만, 잘못된 표기로 볼 수 있겠다. ‘Luther’를 ‘루터’라고 표기하는 것은 독일어의 영향인 것 같다. 독일 종교개혁 지도자 Martin Luther는 (마틴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다. 영어(미국어)에서는 ‘루서’로 발음된다. 영어든 독일어든, ‘마틴 루터’는 윗도리와 아랫도리가 맞지 않는 표현. 한편 ‘Malcolm’은 발음 원칙상으로는 ‘맬컴’이 되어야 하지만, 흑인주의 영향 탓인지 대부분 ‘말콤’으로 발음하고 있다. 우리 같은 외국인이 듣기에는 그 차이가 미묘하긴 하다.[/footnote] 킹 데이’에 대해 들어본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미국 흑인운동 지도자의 생일을 기념하는 미국의 공식 휴일이다.

‘말콤 엑스 데이’라는 말을 들어본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역시 미국 흑인운동 지도자였던 말콤 엑스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인데, MLK 데이와는 달리 이날을 챙기는 곳은 미국에서 한 주(일리노이)와 도시 열댓 개에 지나지 않는다.

백인은 악마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종교지도자 말콤 엑스에게 백인은 악마와 동의어였다. 세상에 나쁜 백인, 좋은 백인 따위는 없었다. 백인 남자는 악마 남자였고 백인 여자는 악마 여자였으며 백인 아기는 악마 아기였다.

인권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선한 백인 따위는 없으므로, 그들이 흑인 인권운동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마틴 루서 킹처럼 다른 인종과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운동의 폭을 넓혀가던 흑인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커피에 크림을 넣는 것 말고는 흰색과 섞이지 않는다.” 이것이 말콤의 신념이었다. 사실은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커피에 크림을 넣어보라. 그 맛만 약해질 뿐이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신념이었다.

말콤 엑스(1925년 5월 19일~1965년 2월 21일). 사진은 1964년 당시 모습.
말콤 엑스(1925년 5월 19일~1965년 2월 21일). 사진은 1964년 당시 모습.

한때 탐닉했던 마약, 술, 담배, 방탕한 생활을 딱 끊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백인이 허용해 준 것들, 그 속에 백인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지독한 절제를 만들어냈다.

그는 적어도 신념과 행동의 일관성은 유지한 사람이다.

말콤이 흑인 이슬람 운동의 지도자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높여갈 때다. 동료 서너 명과 뉴욕의 한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금발의 백인 여대생이 막아섰다. 다음은 말콤의 자서전에 기반해 스파이크 리 감독이 영화로 만든 [말콤 엑스]에 나오는 한 장면이며 실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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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동영상

백인 여성: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엑스 씨. 안녕하세요! 당신이 쓴 연설문들을 읽었는데요, 당신이 말씀하신 많은 것이 진실이라고 진심으로 믿게 되었어요. 제 선조들이 끔찍한 일을 벌였지만,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조언을 듣고 싶어요. 저처럼 인종 편견이 없는 백인이 당신의 활동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말콤 엑스: 아무것도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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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의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열렬한 뜻을 품고 멀리서 찾아온 백인 여대생에게 말콤이 퉁명하게 던진 말은 단 한 마디, “Nothing”이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대생은 잠시 후 눈물을 쏟으며 거리로 달려나갔고,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아마도 말콤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을 새로 하나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때, 말콤은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었으며, 그런 일이 벌어져서 반갑다’고 발언했다.[footnote]1963년 12월 1일 말콤 엑스는 존 F. 케네디의 암살과 관련한 논평을 부탁받은 자리에서 “닭이 자신의 횃대에 돌아온 것과 같은 일”(영어: chickens coming home to roost), 즉 사필귀정이라고 답했다. 덧붙여 “닭이 횃대에 돌아온 일로 슬퍼할 수는 없지 않나. 이런 일은 언제나 즐겁다”고 말했다. (출처: 위키백과뉴욕타임스) [/footnote] 물론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또 어떤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는 상관없었다. 이 발언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말콤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자 종교, 사회, 정치 활동의 보루였던 이슬람계 흑인운동 조직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 NOI)으로부터도 징계를 받았다.

메카 순례 그리고 ’12년의 대가’ 

말콤은 NOI 지도자들과 불화를 겪고 쫓겨나다시피 조직을 떠난 뒤, 종교 성지인 메카를 순례했다. 32일간의 이 여행은 그가 완전히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모든 백인을 악으로 규정하고 흑인에 의한 국가 장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던 믿음을 완전히 바꾸었다. 백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이 순례를 와서 진실하게 평화와 화해를 갈구하며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흑인 분리주의나 흑인 우월주의[footnote]편견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거나 궤변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흑인 우월주의(black supremacy)’ 같은 것은 없거나 그런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현실이 중요하지 않다.[/footnote] 같은 주장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그가 가족과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러한 인식 전환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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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성스러운 땅, 아브라함과 마호메트와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고향인 이곳에서 나는 피부색이나 인종을 넘어서 진실한 환대와 진정한 형제애가 넘실거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평생 처음 봅니다. 지난주 동안 나는 내 주변에서 온갖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주는 친절함에 완전히 말을 잊었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례 여정에 대한 단락 생략)

전 세계로부터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였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금발 순례자로부터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 순례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종이 다 왔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고, 인종의 벽을 넘어 단결과 형제애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내가 겪은 경험 때문에, 나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슬람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에서라면 ‘백인’으로 간주될 사람들을 만났고 대화했으며 심지어 함께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백인의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인종에 속한 사람들이 피부색과 상관없이 그처럼 신실하고 진실한 형제애를 가진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런 말을 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순례에서 보고 겪은 일들 때문에, 과거에 내가 지녔던 사고방식 대부분을 재조정하고 그동안 가져왔던 믿음 중 일부를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게 있어 이런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지만, 동시에 늘 사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 제시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나는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아왔으며, 이러한 열린 마음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모든 형태의 현명한 모색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사고의 유연함을 갖추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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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은 모두 악마이며 이들과 어울릴 수 없고 총을 들고 싸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왔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로는 충분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말콤이 소총을 들고 있는 이 사진은 사실 백인에 대항하는 장면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NOI 조직원들의 공격에 대비하던 상황에서 찍힌 것이다. 하지만 말콤의 전투적인 노선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널리 사용된다.
말콤이 소총을 들고 있는 이 사진은 사실 백인에 대항하는 장면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NOI 조직원들의 공격에 대비하던 상황에서 찍힌 것이다. 하지만 말콤의 전투적인 노선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널리 사용된다.

말콤은 이름까지 갈았다. 흑인주의 정신이 강하게 반영된 ‘말콤 엑스'[footnote]말콤의 원래 성은 ‘리틀'(Little)이었다. 엑스는 그가 온갖 범죄를 저질러 들어간 감옥에서 새 사람으로 재탄생한 뒤 붙인 성이다. 백인이 준 성을 버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아프리카 조상으로부터 받은 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다.[/footnote]를 버리고 이슬람 정신을 담은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아랍어: الحاجّ مالك الشباز)를 새로 얻었다.

금발 백인 여대생을 만나 퉁명스럽게 내쳐버린 일은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말콤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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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것이 후회된다.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면, 혹은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알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백인들이 진지한 태도로 다가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지금의 내가 전해주는 새로운 대답 말이다.

(책의 다른 곳에서)

그 사건을 오랫동안 후회하며 살아왔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곳에서 백인 학생들이 흑인 주민을 돕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런 실천은 잡다한 주장을 일거에 패퇴시킨다. 누구든 바보가 될 권리가 있다. 그 대가를 지불할 자세가 되어있다면 말이다. 나의 경우 12년의 세월이 그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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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거부하는 운동 

동아일보 - “생물학적 여성만 오라”… 분노의 붉은 옷 1만여명 도심 메웠다 (김은지, 2018. 5. 21.) 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180521/90171479/1
동아일보 – “생물학적 여성만 오라”… 분노의 붉은 옷 1만여명 도심 메웠다 (김은지, 2018. 5. 21.)

어떤 사회적 주장을 대중적으로 추구하면서 외부 연대를 거부하고 그 참여자를 생물적 기준에 따라 제한하는 것으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말콤 엑스가 벌인 흑인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그를 촉발시킨 상징적 계기이자 그와 켤레 쌍이라고 할 수 있는 KKK 운동뿐이다. 물론 역사상의 어떤 시점에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는 그와 유사한 원시적인 운동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제외하면, 개체가 선택하지 않은 생물적 기준에 따라 참여자를 배제한 운동과 혁명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적대 그룹까지 포함한 다른 계급이나 세력에서 공모자를 만들고 조직하고 참여시키려는 것이 상식이다. 운동이 겨냥하는 적대 그룹은 사실 첫 번째 대상이기도 하다. 적대 세력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은 운동의 정당성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 증거이며, 운동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징후이기도 하다.

1987년 6월, 청년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벌이면서 ‘백만학도만 참석’이라고 한정하고,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쁘띠 브루주아’ 회사원들이나 영세한 상공업에 종사하던 소자본가 자영업자들을 배제했다면 6월 항쟁 같은 민주주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서 흑백 갈등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지만, 흑인 인권운동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백인들이 피부색을 이유로 하여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면, 지금 흑백 갈등의 양상은 말콤 엑스 때와 마찬가지로 내전 수준이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시민이 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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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호주 시드니 시내에서 무장인질극이 벌어졌다. 이슬람 테러조직을 추종하는 이란 출신 남자가 카페를 점거해 손님과 직원 수십 명을 인질로 잡았다. 경찰은 무장인질극을 진압했지만, 카페 매니저와 여성 변호사가 범인의 총에 맞아 숨지는 비극까지 막지는 못했다. 매니저는 총을 빼앗으려고 범인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변호사는 임신한 친구를 보호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이 긴급 뉴스로 인질극을 현장 중계하던 시각, 시드니 시내 전차에서 어떤 여자가 조용히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모슬렘 여성들이 쓰는 헤자브(hijab)였다. 그가 역에 내렸을 때 백인 여자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시 헤자브를 쓰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걸어갈게요.” 모슬렘 여인은 백인 여자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다가 혼자서 역을 떠났다. 두려움에 떠는 이웃을 위로했던 백인 여자는 그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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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백인 여성이 이슬람교도 여성에게 “이 살인마 종자야! 너도 똑같아. 네 나라로 돌아가란 말이다!”라고 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다정하게 말을 거는 백인 여성에게 이슬람교도 여성이 “닥쳐, 너희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거야? 저리 꺼져!” 하고 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시민이 책에 쓸 소재가 하나 사라졌을 것도 안타깝지만, 공감 대신 상호 적대와 대결로 얼룩지는 현실은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연대와 단결 

인종적 평등을 요구하는 1965년 시위 장면
인종적 평등을 요구하는 1965년 시위 장면 (재인용 출처: goodnet.org)
마틴 루서 킹의 워싱턴 평화 행진 연설(1963. 8.23)에 참석한 청중의 모습.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의 역사적인 연설(1963년 8월 28일)이 있었던 워싱턴 평화 대행진. 그 행진에 참석해 손을 맞잡은 시민들의 모습 (재인용 출처: goodnet.org)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 개혁 의식을 공유하는 자들의 단결. 이것은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사회 운동의 정신이고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그런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참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그런 목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연대를 포기하고 동료 인류를 생물 기준에 따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시위는, 입으로 외치는 구호를 실제로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혐오와 증오와 대결을 재생산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연스레 가지게 한다. 생물적 여성만 참석한다는 명목 아래, 지지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 못지않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까지 원천적으로 배제한 것은 이 시위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말콤 엑스도 흑인 지도자고 마틴 루서 킹도 흑인 지도자다. 두 사람은 3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암살당했다. 나이도 똑같이 39세 때였다. 하지만 미국 도시에는 말콤 엑스 거리보다 마틴 루서 킹 거리가 훨씬 많다. 마틴 루서 킹 데이는 국가 공휴일인 데 비해 말콤 엑스 데이는 일리노이주와 몇 개의 도시에서만 기념일로 챙겨진다. 왜 그런 차이가 벌어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부디 앞으로 벌어질 운동에서는 ‘생물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차별과 고통에 저항하는 여성에 연대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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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이와 관련해 이런 기사[footnote]조선닷컴, “한국 페미니즘은 왜 남성을 혐오하나” 페미니즘 전문가 4인에게 물었다 (안소영, 이다비, 2018. 5. 28.)[/footnote]에서 논평을 하고 의견을 내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편견과 나태함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견강부회된 각종 예시의 억지는 빼고 보더라도 말이다. 운동가들은 옳든 그르든 강한 의견을 가져야 존재할 수 있으니 그렇다 치자. 명색 학자들이 논란이 되는 사회 현상에 대해 ‘그런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다양할 수 있으니 그냥 수용해야 한다’ ‘그런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하면 안 된다’ 같은 이야기나 하며 이념과 행위에 절대선을 상정하고 비판의 말문을 막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가 현실과의 대결에서 얼마나 안일하고 비겁한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나에게는 이런 태도가 ‘김정일 개새끼 해봐’ 하는 인식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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