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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ense] 2015년 11월. 학원 고2 국어 반에 필리핀에서 살다가 온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 당시 고2 교실에는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습의 주도적 태도라는 것 자체가 없고 무엇보다도 주체적으로 듣는 연습이 안 돼 있어서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 일어나야 할 ‘자기 언어의 정보처리 과정’이 없었다.

난 수업이 재미없었다. 존재는 없고 교과만 있는 느낌의 답답함. 지난 1년간 설득과 교정을 끊임없이 해왔지만, 학생들의 수동적 태도의 완고함은 늘 나보다 강했다. 개선의 여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던 당시의 내 무력감은 꽤나 무거웠다. 쉬운 공부를 원했던 아이들은 학원을 떠나기도 했다.

교실

그 상황에 새로 들어온 이 학생은 첫 수업의 첫 대답만으로 단번에 본인의 존재감-어느 정도로 언어를 다듬어 왔는지-를 드러냈다. 첫 수업은 시 수업이었는데 내용 분석에 대한 질문을 하면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자기 언어를 구성해 냈다. 교사의 설명을 듣는 과정에 자기 언어를 구성하고 있어야 함을 모르는 학생이 대부분이고, 이 상태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사람도 많은데, 이 친구는 내가 말하는 동안 생각을 구성하며 듣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있다가 질문이 떨어진 다음에 질문이 뭐였는지 그제야 생각하고 맥락을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이미 끝난 얘기를 다시 설명해 달라는 일이 잦았던 다른 친구들은 새 학생을 보고서야 그동안 내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날, 그 친구는 단번에 수업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구체적 주도를 하거나 의도적 노력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평소의 언어 습관으로 또래 학습자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그 친구의 국어 지식수준은 또래 친구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낮았다.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할 줄 아는 것. 그뿐이었다. 전학 온 후 순식간에 학교에서 내신과 수능 모의고사 점수가 정점을 찍었다.

변해버린 아이 

그렇게 교실 분위기가 바뀌고 여전한 고군분투를 이어가며 겨울이 지나고 새해를 맞아 새 학기를 시작한 지 두 달여 지난 어느 봄, 이 친구의 언어 태도와 습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우물쭈물하고 눈치를 보고 맥락을 놓치고 당황했다. 대답의 질이 달라진 건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도 느끼고 있었다. 자유롭게 생각을 구성하던 습성이 사라지고 자꾸만 정답을 내려고 애를 썼다. 특유의 언어적 특성이 사라지고 전형적인 한국형 학생이 되어 있었다. 개인 면담을 했다.

“너 요즘 이상하다… 들을 때, 말을 다 튕겨내고 있고 질문을 하면 정답을 알아내려고 하네… 그냥 너 생각을 말해야지. 혹시 요즘에 다른 거 집중해서 하는 거 있니?”

“아니요.”

“그럼… 하던 걸 안 하는 게 있니?”

“아. 이전 학교에서는 글쓰기를 계속 시키셨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글을 아예 안 써요.”

“아… 그거네. 너 요즘 일기도 안 써?”

“네…”

“내 생각엔 너 요즘 아예 머리를 멈추고 사는 것 같아.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고 차라리 그냥 책을 읽어. 국어 공부하지 말고. 너 네가 변하고 있는 거 인지하고 있었니?”

“아니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의식을 못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많이 변했어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 친구 말로는 외국에서 다녔던 재외국민들이 다니는 한국 학교와 한국의 학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어쩌면 특별히 이 학생이 다녔던 학교만 분위기가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글쓰기나 발표 수업이 많았고 교사들 간의 협력 수업도 많았다고 했다. 재외국민 특별 전형으로 조금 더 쉽게 대학에 가는 길도 있었지만 ‘공부다운 공부’를 해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다시 전학을 온 것이었는데 와서 너무 당황하고 실망했다는 말을 했다. ‘공부’하는 것 같지가 않다고…

우리는 농담처럼 대한민국 공교육의 위력은 대단하다며 웃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듣기만 하고 표현할 기회는 차단당한 채 생각할 일도 심오한 대화를 나눌 일도 없이 보낸 3개월 만에 이 친구의 언어 감각은 무뎌져 버렸다. 아무래도 성적에 변화가 있을 것이 예상됐다. 사고체계가 어설프게 변했는데 한국 학생들처럼 무조건 암기하는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역시 중간고사 점수는 전 과목이 떨어졌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통 기다림 슬픔 출구 손 성희롱 피해자 절규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거듭하던 중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계절이 왔다. 재외국민 특별전형 준비 시기는 일반 수시보다 빨라서 각국의 지인들을 통해 도와달라는 요청이 오곤 한다. 외국 학교에서 공부해본 학생들과 국내 학생들의 자소서를 비교해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국내 학생들의 자소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의 부재와 글쓰기의 막막함, 자소서라는 글의 장르에 대한 몰이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대화 단절이 만들어낸 기괴한 글의 흐름. 그것이 우리 학생들이 쓰는 자소서 초고의 현실이다.

그들이 최초로 시도하는 것은 늘 신화창조다. 그들이 쓴 소설에 가까운 소개서에는 전무후무한, 놓쳐선 안 되는, 너무나 완벽한, 십대 해결사가 묘사돼 있다. 대학에 갈 필요가 없어 보일 지경으로 완벽한 사람의 창조. 첫 자소서를 쓰는 대부분의 학생이 생각하는 ‘자기소개서’는 그런 느낌이다.

이 학생의 경우에도 몇 번이나 어떻게든 써와 보라고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애걸복걸, 협박, 닦달을 하고서야 겨우 자소서 초고를 가져왔다. 가관이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압박과 그런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 싸우느라 앞뒤가 안 맞으면서 방황하는 문장들… 한줄한줄에 서린 고통이 절절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누구의 마음에도 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대학에 가고 싶은 간절함. 몇 번에 걸친 교정 과정에서 내가 준 피드백은 한결같았다. 그냥 네 얘기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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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 본 적 없는 글쓰기의 고통

자소서… 자기소개서

이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외국에서는 학생들의 학습과정과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쓰는 글을 에세이라고 부른다. 자기 성찰의 글이라는 인식이 명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소개서’라는 말은 글의 목적이 ‘자랑 거리의 나열’이나 객관적 사실의 나열인 것처럼 느껴지기 쉽다. 자소서를 쓰는 글쓰기 상황이 매우 경쟁적이고 그 경쟁적 상황이 자소서를 쓰는 최초의 경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욱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청소년들에게 편안하게 자기를 소개할 기회를 제공해 왔고 교육해 왔는가. 그리고 그 자기소개서라는 글의 내용이 어때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왔는가. 소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이해시키고 가르쳤는가. 아니… 우리 어른들은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소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고민하고 토론하고 결론을 내본 단 한 번의 경험이라도 있는가.

우리 청소년들은 얼마나 자주, 일상 속에서 일정한 단위의 간격을 두고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고 글을 쓰는 어른들과 교류하는가. 그것의 중요성을 체험적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일 기회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한 번도 배워본 적 없고, 들어본 적 없이, 전혀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의 사고 체계를 훈련받아온 끝에서 이제까지 달려온 모든 것을 결정짓는 시험을 몇 개월 앞두고서야 느닷없이 요구받는 글쓰기의 고통.

로봇 외로움 정신병 사이코 격리 고통 슬픔

설명문도 논설문도 아닌, 가장 숙련된 성찰의 습관과 지나간 역사의 기록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나에 관한 에세이’를 쓰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소개서를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왜 자기를 소개할 수 없는가.

상실된 인식의 시간

자소서를 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려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삶의 중요한 경험들을 해체하고 읽어내고 매듭을 지을 기회가 수시로 있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내 경험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래서 그런 과정들을 통해 설명되는 나라는 사람의 특성은 무엇인지.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수준을 이루어 냈는지 돌아보고 인식할 기회가 있어야 자신에 대한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잠깐 동안 미국에 있는 경영대학원 과정인 MBA 지원을 돕는 컨설턴트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학과 기업에 몸담고 있는, 스펙이 화려한 인재들의 에세이를 읽고 피드백을 했다. 지원하는 대학에 내는 에세이는 영문 에세이지만, 그전에 국문 에세이로 컨설팅을 받고, 그 뒤에 다시 영문으로 작성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외국에서 요구하는 에세이 양식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나는 각 대학이 요구하는 에세이의 질문들을 보고 좀 황당했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작문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완전히 같은 내용이었다. 지도해야 할 내용도 고등학생들 입시 자소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이슈에 대한 대단한 글이 아니라 그냥 고등학교 때 쓰는 대학 지원용 자기소개서 수준의 글이 하버드나 스탠퍼드나 UCLA 의 경영대학원이 요구하는 에세이라니…

자신에 관해 인식하고,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쓸 수 있도록 성찰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정해진 답'만을 강요하는 한국 교육
자신에 관해 인식하고,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쓸 수 있도록 성찰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정해진 답’만을 강요하는 한국 교육

황당함과 동시에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어떤 공부를 하는데 적당한 사람인지 보기 위해 우리는 학습자의 무엇을 봐야 할까. 바로 학습자의 역사다. 학습자의 성향, 학습자가 했던 실수, 그 실수를 통해 배운 것, 그것을 다음 도전에 적용하는 자세, 주변 사람과 함께 일해본 경험, 주변 사람과 갈등해 본 경험, 그 갈등의 내용, 그 갈등에 대한 성찰의 내용. 앞의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학습자가 추구하기에 마땅한 관심 분야. 이 모든 것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학습자의 조화로움…

한국의 일류 대학과 일류 기업 출신이며 영어 점수가 어마어마하고 기타 등등 프로필이 어마어마했던 지원자들은 하나 같이 외국 대학들이 원하는, 고등학교 때 배우는 -하지만 아무도 배워본 적 없는 듯한- 저런 내용의 글들을 전혀 써내지 못했다. 사실 에세이에서 번호 붙여 요구하는 주제가 뭘 원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컨설턴트들이 하나하나 지원 대학의 성격, 특징, 이 주제가 의미하는 것 등을 설명해 주면 열심히 적어가고, 그다음에 무언가 써서 보냈다. 그러면 컨설턴트는 그걸 다시 조언해서 고치게 하고… 이 일의 반복이었다. 왜 그들은 그런 것을 스스로 하지 못할까.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국 교육이 문제가 심각하며 우리나라가 완전히 ‘공갈빵’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성찰할 줄도 몰랐고, 성찰할 ‘자기’도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교육이 인간의 평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사람에 대한 글 –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다

컨설턴트로 채용되기 전에 3차, 4차까지 심사를 거쳤었다. 그때, 난 경영대학원에 지원한다는 가정 하에 에세이를 써서 내야 했다. ‘내가 경영대학원에 가야 하나?’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 내용이 차고 넘쳤다.

대학 졸업 후 혼자서 시나 소설 분석법을 연구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이론을 정립해 나갔던 과정, 문학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과정의 실수들, 대학교 때 외국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공동체의 지도자로 살면서 쌓은 실수와 성공의 소재들, 대학교 축제 때 음식 백화점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경험, 팀워크의 어려움, 갈등의 사례, 극복 사례, 9년 간 밴드를 하면서 익혀온 멤버십 형성 노하우, 종교 단체에서 수도 없이 기획하고 실천하고 업데이트해온 각종 행사 진행 경험…

대학들이 원하는 다양한 에세이 주제들에 대해서 쓸 수 있는 에피소드가 차고 넘쳤다. 글을 쓰는 기술 자체나 문장의 유려함은 중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글 속에 담겨 있는 ‘사람’이다.

컨설턴트 중에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주거나 인터뷰를 고려해 하나하나 훈련을 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난감했다. 도저히 나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이루고 인정받아온 그들에겐 학습의 성취 외엔 아무 경험도 없었다. 거의 모든 지원자가 쓸 경험이 없다고 했다. 경험이 있다 해도 그것을 기억하고 읽어내는 ‘자기’가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큰 돈을 주고 '컨설턴트'에게 교육받고, 에피소드마저 '발명'해주는 한국 교육
나는 누구입니까?

그들이 이 컨설팅을 받는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우리 교육은 그렇다. 완전히 이분화되어 자기를 만드는 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종국에는 ‘자기’조차 누군가에게 돈을 내고 배우고 외우고 익히고 잊어버리게 만들어버린 거였다. 어떤 시기가 지나버리면 아마 그런 상태가 능력 있음의 증거라고 믿게 될지 모르겠다. 난 그 거짓말 공장을 금방 나왔다.

인간이 언제까지 누군가에게 자기를 주입받을 수 있을까. 인간이 얼마나 아둔하게 교육되면 죽을 때까지 자기 인식을 포기하고 살 수 있을까. 난 교육 현장에서 절감한다. 인간은 아주 쉽게 자기를 포기한다. 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 수도 있다. 아니 자기를 만든다는 것이 이제는 공포가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시 묻고 싶다. 지도자가 돼라. 상위권이 돼라. 남보다 앞서라. 수도 없이 배워온 그 말의 뜻이 정말로 궁금해지는 날. 남과 나를 구분할 줄이나 알까. 언제까지 세상이 정한 멋진 사람의 모습을 듣고 쓰고 밑줄 치고 외워서 흉내 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자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다음에 컨설턴트가 의미 있는 것이다.

자소서를 잘 쓰고 싶다면

자소서 쓰기, 자소서 학원, 자소서 과외… 이런 단어를 검색해본 당신. 지금 고3이라면 또는 고3의 부모라면 사실 너무 늦었다. 입시용 자소서에서는 학습자 학습의 역사와 학교 내외 활동의 역사를 묻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 살아왔어야 한다. 하지만 꼭 입시 때문이 아니라 어느 날 직업을 구할 자신을 위해, 또는 중요한 사람에게 나를 설명해야 할 어느 날을 위해 이제부터라도 ‘자기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부탁하고 싶다.

자기소개서를 잘 쓰느 다른 방법은 없다. 자기를 잘 아는 사람만 자기를 잘 소개한다. 거의 모든 자기소개서의 주제가 자기 실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자기 주도적으로 자기 일을 처리하며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타인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4개월이든 6개월이든 정기적으로, 친구끼리든 선배와 함께든 또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든 서로의 성찰을 도울 누군가와 함께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고, 그 기록된 역사를 의식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쌓아 나가는 일상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입시에 자기소개서가 포함된 이유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거기에 맞춰서 먹힐 만한 활동들만 골라 잡아 해치우거나 지어내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학원에 있는 동안 나와 함께 독서 클럽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면서 문화 공동체라는 것을 함께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협력 학습이 무엇인지 배워나간 학생들이 있었다. 그중엔 한국어를 영어 번역문처럼 쓰는 학생도 있었고, 책 한번 읽지 않은 학생도 있었고, 중간에 떨어져 나간 학생도 있었다. 남과 얘기할 때 눈을 안 쳐다보거나 약속을 안 지키거나 문서 작성을 할 줄 모르거나 국어를 너무 못하는 등등의 문제를 골고루 나누어 가진 멤버들이었다.

3년이 지나고 입시철이 되었을 때 하나같이 자기소개서에 쓸 자기의 삶이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겼었다. 문장력도 좋아졌고 피드백도 금방 알아들었다. 지어서 쓰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미화하고, 신화화하는 실수는 똑같이 했지만, 바로바로 문제점을 고쳐나갔다. 그들에게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스스로 내용을 구성했다.

공부 책상 시계 시간 추억 학생

앞에서 말한 필리핀에서 온 학생이 다시 문장력과 사고력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시도한 학습 방법은 대화였다. 보호자의 동의를 받고, 정기적으로 카페에서 만나 서너 시간씩 대화했다. 고1 때 썼던 책 리뷰를 읽고, 그 시절의 생각을 더듬어 보거나 몇 줄의 글이라도 써보게 한 다음에 그렇게 쓰게 된 이유를 추적하면서 자꾸만 언어적 자극을 시도했다.

그냥 사는 얘기를 하기도 했고 내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친구의 스트레스나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 서로 알아가고 정리해갈 수 있었다. 무엇을 쓰고 뺄 것인지는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했다. 자기 자랑을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고 난 후에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자꾸만 주입하고 정형화된 무엇을 따라가게 하면 완전히 망가져버릴 친구였다. 원래 할 줄 알던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데 긴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다시 감을 잡았다. 입시를 몇 개월 앞두고 난 학원을 그만두었고, 이 친구는 재외국민 전형을 응시하는 입시생은 필수로 거친다는 전문 학원이나 논술 학원은 따로 가지 않고 혼자 공부했다.

카페 글쓰기

앞에서 말한 북클럽 멤버들도 그리고 이 필리핀에서 온 학생도 무사히 입시를 통과했다. 통과하지 못해도 그 시간들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행히 각자가 원했던 입시에 성공했다. 지금도 그들은 꾸준히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서로의 성찰을 돕고 자기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이 일상이어야 함을 언젠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함을 인지하고 보내온 시간 속에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가르친 적 없고 생각할 기회를 준 적도 없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열심히 공부만 시키다가 어느 날 입시철이 되면 클릭 한 번에 출력되는 프린트를 뽑아내듯 자소서를 써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입시를 치르는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 한 시대를 마무리하며 자기 성찰을 할 기회 조차 단기간에 벼락치기하듯 날려버리는 것은 개인에게도 비극이고, 이 시대에도 비극이다.

자기소개서의 본질은 글이 아니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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