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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점가에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펴낸 지 몇 달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를 뿌리고 있다. 이 책은 서점가와 방송가에서 여러 좋은 글로 지평이 넓은 작가가 써낸 책이었다. 이 책의 뒤 표지와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10년 전 봄,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했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오랜 꿈에서 멀어졌고,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버튼 하나를 누를 힘이 없었지만, 〈빨강머리 앤〉 50부작 애니메이션을 봤다. 끝까지 따라 부를 수 있는 내 인생 유일한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이마가 툭 불거져 나온 이 수다쟁이 소녀는 내게 쉬지 않고 말이란 걸 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스톱 버튼! 눈물이 핑.
앤의 말을 한 번, 두 번, 세 번 더 들었다.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출처: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대사는 ’10년 전 50화 전편을 보다가 저 장면에서 영상 중지 버튼을 눌렀다’는 작가의 말과는 달리, 작가가 보고 감동했다는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1979년)에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2009년에 39화에 걸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의 프리퀄 [안녕, 앤](Before Green Gables)의 1화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 닛폰 애니메이션
© 닛폰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100주년 기념 팬픽, [Before Green Gables]

YouTube 동영상

참고로 이 장면에서 앤이 언급하는 ‘엘리자’는 앤이 고아원에 가기 전 거주하고 있던 토마스 집안의 장녀 엘리자 토마스를 가리키는데, 이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작 [빨강머리 앤] 시리즈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안녕, 앤]은 [빨강머리 앤]의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에 감동한 캐나다 작가 버지 윌슨이 2008년에 [빨강머리 앤] 100주년 탄생 기념으로 내놓은 소설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Before Green Gables)의 내용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캐나다 “빨강머리 앤 협회”의 공식작으로 인정받아 출간되었다.

좌측은 영어판, 우측은 한글판 표지
좌측은 영어판, 우측은 한글판 표지

서점가에서 이 에세이가 베스트셀러로 진입하게 된 데에는 작가의 집필 역량도 우선했겠지만, 그 보다는 원작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안녕, 앤] 역시 화제를 모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작품이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일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에 40주년을 맞이한 "세계명작극장", (© 닛폰 애니메이션) 당신이 선택하는 베스트 오브 세계명작극장, 당신이 좋아하는 작품은?
2015년에 40주년을 맞이한 “세계명작극장”, (© 닛폰 애니메이션) 당신이 선택하는 베스트 오브 세계명작극장, 당신이 좋아하는 작품은?

“세계명작극장”의 출발

“세계명작극장”은 본래 일본의 음료 회사 ‘칼피스’의 후원을 받아 1969년부터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방영된 시리즈로 당시 일본 내에서 제작비 부족과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곤욕을 치르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해결책의 하나로 내놓았다. ‘일본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닌 해외에서도 통하는 이야기’의 결과물, 즉 해외의 널리 알려진 고전 명작 소설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수출을 꾀한 것이다.

이 음료를 만든 회사입니다.
이 음료를 만든 회사입니다.

토베 얀손의 유명한 그래픽노블 [무민]을 시작으로 50여 화를 제작해 큰 호응을 얻은 “칼피스 만화극장”은 이후 “칼피스 어린이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칼피스 패밀리 극장”을 거쳐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제작되어 전 세계적인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그래픽노블 [무민] © 토베 얀손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그래픽노블 [무민] © 토베 얀손

“세계명작극장”의 매력은 단순히 매우 잘 알려진 원작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덜 알려진 이야기나 액자 소설 형태의 짤막한 이야기에 창의력과 재해석을 붙이고 전 세계 어디서나 공감을 얻고자 했던 무난한 그림체가 각고의 배경 조사와 재현력에 의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걸작이 되었다.

[플랜더스의 개] 한 장면. © 닛폰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한 장면. © 닛폰 애니메이션

방송국을 마비시켰던 [플랜더스의 개] 소동

1975년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작품 [플랜더스의 개]는 당시 스폰서였던 칼피스 사장의 아이디어가 마지막 회 내용으로 들어가는 등 제작진이었던 닛폰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이 총력을 기울여 만든 결과물이었다. 마지막 화를 앞두고 있던 후지 TV 애니메이션 방송국은 제발 극 중 어린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 달라는 애정 어린 항의에 시달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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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 방영된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어로 번안된 주제가만 해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유명 가수들까지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부를 정도로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랑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벨기에 안트워프 지방을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은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리며 그 지역에서 친숙함을 느끼지만 정작 그 지역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은 물론 해당 소설을 잘 몰라서 서로 서먹해지는 해프닝이 일어난다고도 한다.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aCAfM2ixuQ

10년 늦게 소개된 [빨강머리 앤]의 위력

1980년 군부에 의한 방송 통폐합의 악영향으로 순조롭게 한국에 소개되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수입의 흐름이 끊기게 된다. 그리고 1989년에 이르러서야 1979년의 일본 방영작 [빨강머리 앤]을 뒷북 수입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0년 늦게 안방 TV에 선보인 [빨강머리 앤]은 놀라운 위력을 발휘해 수많은 한국 사람들을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에 푹 빠지게 했고 2016년에 이르러서는 관련 수필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게 된다.

국내에 소개된 극장판 제목은 [빨간머리 앤]이다.
국내에 소개된 극장판 제목은 [빨간머리 앤]이다.

“세계명작극장”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전화위복의 길을 마련했을뿐더러 그 제작현장에서 생겨났던 장인정신이 불세출의 애니메이터들을 길러내는 행운까지도 만들어냈다.

많은 애니메이션 장인들을 길러낸 문화 콘텐츠의 요람

미야자키 하야오 (이미지 출처: 시네프리미어)
미야자키 하야오 (이미지 출처: 시네프리미어)

전 세계에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로 ‘세계명작극장’의 수많은 시리즈에서 작화 감독을 맡아 이야기 속에 보이지 않았던 생생한 배경과 인물의 위치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를 발현한 동작 지정까지 구상했던 인물이었고, 그와 손을 잡고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립한 동료이자 선의의 라이벌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빨강머리 앤]을 통해 인상적인 연출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다카하타 이사오 (이미지 출처: 망가델부에노)
다카하타 이사오 (이미지 출처: 망가델부에노)

그들은 이탈리아 아미치스의 소설 [사랑의 학교]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이야기였던 [엄마 찾아 삼만리[footnote]일본에서는 삼천리로 표기됐다.[/footnote]]를 장편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 유럽을 로케이션한 끝에 주인공 마르코의 심경을 TV 화면 속에 절절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건 스튜디오 지브리의 걸작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들 때, 그 당시 로케이션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유럽의 정취를 꼬마 마녀의 성장 이야기에 담아 절세의 페미니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걸기도 했다.

엄마 찾아 삼만리. © 닛폰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리. © 닛폰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 © 스튜디오 지브리
마녀 배달부 키키. ©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명작극장”은 끝났지만, 그 시도는 계승됐다.

저가의 수출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활로를 틔우는 데 성공했던 “세계명작극장”은 30년 동안 그 행진을 계속하는 가운데 본래의 목적인 수익 창출보다 오히려 일종의 의무감에 시달리며 수익보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는 악전고투를 거듭하게 된다.

1997년에 이미 제작이 끝났던 “세계명작극장”은 시리즈가 배출한 업계 거장들의 노력과 전 세계 팬의 성원에 힘입어 종영 10주년을 맞아 [레미제라블, 소녀 코제트], [포르피의 기나긴 여행], [안녕, 앤]을 삼 년 연속으로 선보인 뒤 최종적으로 28편의 원작 기반 타이틀, 1,382화의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footnote]참고로 제작사인 닛폰 애니메이션은 26편을 공식 타이틀로 세우고 있다.[/footnote]

한국뿐 아닌 전 세계에,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에 ‘굳이 일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라면 어디의 누가 만든 것이든 좋다’는 상식을 남긴 “세계명작극장”의 정신은 지금도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에서 끊임없는 시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작 [추억의 마니]는 "세계명작극장"의 초심을 재연하는 데 성공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걸작으로 원작은 1967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2014년 작 [추억의 마니]는 “세계명작극장”의 초심을 재연하는 데 성공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걸작으로 원작은 1967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세계명작극장”의 교훈: 한국 콘텐츠는 꼭 한국적이어야만 할까?

애니메이션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미쉐린 가이드와 빕 구르밍 선정이 많은 뉴스를 낳는 중 외국인이 우수하게 평가한 한국의 식당이나 레스토랑에 한식이 아닌 일식, 이탈리아 음식, 타이 음식 등이 들어간 것이 이채로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오래도록 큰 힘을 발휘하는 문화 콘텐츠가 꼭 자국의 문화나 토속적인 이야기만을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음식이나 애니메이션이나 비슷한 교훈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2016년의 한국 사회에서 제작된 지 30년도 넘은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캐나다 작가 원작의 일본 TV 애니메이션임에도 우리의 공감 문화 중 하나로 여겨지며 열광적인 사랑을 받듯.

© 닛폰 애니메이션
© 닛폰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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