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2일 토머스 오헤아 퀸타나(Tomas Ojea Quintana) 유엔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은 북한 귀순 병사의 수술 상황을 언론에 공개한 행위는 사생활 침해라고 지적했다(참고: 연합뉴스). 서울 유엔인권사무소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퀸타나 보고관은 북한 귀순 병사의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최근 비무장지대를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를 한국 당국이 공개적으로 다룬 방식에 대해 저는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운을 뗀 퀸타나 보고관은 “북한 병사의 수술 상황, 신체 상태를 참혹할 정도로 세밀하게 공개함으로써 그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한 사실은 인권 차원에서 용납할(tolerable)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귀순병사는 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그 책임은 당국에 있다는 사실도 관계자에게 전했다고 보고관은 밝혔다.
퀸타나 보고관의 지적으로, 이국종-김종대의 논쟁은 다시 조명받게 되었다. 귀순병사의 수술 상황, 특히 몸 속에서 꺼낸 기생충의 사진과 길이까지 보여주며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던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의 행태는 정의당 의원이자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의원의 ‘사생활 침해’ 비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여론은 오히려 김의원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활의 기로에 놓인 북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한 이 교수를 응원하지는 못할 망정 ‘인격 테러’, ‘범죄 행위’ 등의 용어를 써가며 인신 공격을 벌였다는 비난이었다.
의원 사퇴론까지 나올 정도로 여론의 뭇매가 거세지자 김 의원은 결국 사과와 유감 표명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국종 교수는 그에 반비례해 영웅으로, 심지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만큼 그 지위와 인기가 격상되었다. 여러 매체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뽑았고, 올해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 부족 – 언론
귀순 북한 병사의 의료 정보 공개를 둘러싼 이국종-김종대의 논쟁은, 그러나 논리나 사실보다 감정과 애국심, 그리고 ‘국민의 알권리’라는 명분에 휩쓸려, 사안의 핵심을 잃어버리고만 경우에 더 가깝다. 사안의 핵심은 이국종 교수의 정보 공개가, 그리고 정보 공개의 수준이, 한국의 의료법과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국종-김종대의 논쟁은 역으로 정보 프라이버시, 혹은 사생활 침해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부족을 드러낸 계기로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 부족은 다시 두 층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 층위는 언론을 포함한 일반의 인식 부족이고, 또 다른 층위는, 실상 다른 누구보다도 의료정보의 비밀성에 대해 투철한 인식과 의무감을 갖추고 있어야 할 의료인, 의료기관 종사자들의 인식 부족이다.
첫째, 개인정보와 개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일반, 특히 언론의 인식 부족이다. 언론은 저마다 ‘의료법’은 들먹이면서도, 정작 언론이 자주 참고해야 마땅한 ‘개인정보보호법’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거의 모든 사람과 기업, 기관의 이름까지 A, B, C, D로 환치하는 관습에 젖어들다보니,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한 ‘법’ 따위는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잘 안다고 과신한 탓이었을까?
의료법 제19조 (정보 누설 금지)는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 의료·조산 또는 간호 …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정보를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하며, ‘부당한 목적으로 사용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정보’는 그 맥락상 개인의 의료정보를 가리키고, 이는 ‘개인정보’에 포함된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르면 ‘개인정보’란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성명, 주민등록번호 및 영상 등을 통하여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해당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를 말한다.물론 개인정보라고 해서 모든 정보가 동일한 수준의 중요성이나 민감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료정보가 유독 더 높은 민감성을 가진다는 점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의료정보는 개인정보 중에서도 특히 더 민감하고 은밀하기 때문에, 그 공개 여부를 판단할 때는 – 더욱이 본인의 동의 없이 공개 – 그만큼 더 높고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야 마땅하다. 어쩔 수 없이 공개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결정한 경우에도, 정보 일체가 아니라 주어진 사안과 직결되는 일부 내용의 공개만으로 충분하다면 마땅히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국종 의사의 의료정보 공개가 지나치다고 판단되는 이유다.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 부족 – 의료인
둘째, 개인정보, 특히 개인의 의료정보가 가진 고도의 민감성과 비밀성에 대한 의료인들의 인식 부족이다. 굳이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의사-환자 간의 비밀 유지’가 거의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은 널리 인지된 바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놓고 한국의 의료계가 보여주는 반응을 보면, 과연 그들이 이를 가슴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이국종 의사를 두둔한다며 사안을 메르스 사태에 비유한 대한의사협회의 주장은 그들의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 의식을 되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궤변이었다. 의협의 대변인은 “북한 병사가 우리 국민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병을 갖고 있어 공개한 것을 의료법 위반이라고 한다면 메르스 사태 당시 환자를 공개했다고 해서 의료법 위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참조: 아주경제 11월 23일 자).
“북한 병사가 우리 국민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병을 갖고 있”다고? 몸속 회충이 메르스 같은 전염병이라는 말인가? 의협이라는 단체는 명백히 전문인들의 모임인데, 개인의 건강 문제와 공중 보건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메르스 사태는 시의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해 불필요하게 피해를 키우고 국민의 불안과 불신을 더욱 부추긴 실패 사례였다.
그런 실패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메르스 진원 환자 (“Patient Zero”)의 신원보다 진원지인 병원(!)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비밀주의 탓이었다. 전국적인 전염병 사태(pandemic)의 단초를 미리 읽고 대비하기 위한 공중보건 분야의 공중 감시(public surveillance)와 귀순 북한 병사 개인의 의료정보 공개 여부를 대비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공익인가, 개인 프라이버시인가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사항의 공개가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것이더라도 사생활과 관련된 사항이 공공의 이해와 관련돼 공중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항에 해당하고, 그 공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그 표현 내용ㆍ방법 등이 부당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
2013년 대법원 판례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핵심은 ‘공공의 이해’ (또는 이익)이라는 기다.
그렇다면 귀순 북한 병사의 수술 경과를 전하는 기자 회견에서, 이국종 교수가 공개한 내용은 과연 ‘공공의 이해’를 위한 것이었을까? 공익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적어도 여론의 향배만 놓고 보면 ‘그렇다’인 것 같다. 하지만 엄밀한 법의 잣대로, 객관적 시각으로 본다면 그 대답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법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이 교수는 수술 경과가 어땠는지, 따라서 북한 병사의 사활 여부는 어떤지, 부상 회복 가능성은 얼마나 높거나 낮은지 알려주는 수준에서 멈췄어야 마땅하다. 몸안의 기생충, 내장의 분변, 위장의 옥수수 얘기는 결코 ‘공익을 위해 불가피한’ 내용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교수의 언론 공개 내용이 지나쳤으며, 의료법의 시각, 개인정보보호법의 시각으로 볼 때, 부적절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누구나 ‘프라이버시에 대한 타당한 기대’(reasonable expectation of privacy)가 있다. 평균 수준의 지력과 논리력, 이성을 가진 성인이 볼 때 그럴 법하다고 판단하고 기대하는 프라이버시 보호 수준을 가리킨다. 이 기대에 비춰볼 때도, 이교수의 공개 수준은 부적절했다.
정작 당사자인 북한 병사는 자신에 대해 어떤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고 인구에 회자되었든 아무 상관 없다고, 그저 죽을 목숨을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프라이버시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귀순을 감행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의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정황과 조건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에서 일반인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국종 교수의 의료법 위반 행위를 판단할 때, 그의 살신성인적 태도, ‘인술’의 철학을 뒤섞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