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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가 막 넘어섰을 때였다. 한바탕 바쁜 일도 지나가고 병동 환자들도 몇 명을 빼고는 깊이 잠들었다. 그제야 나도 가까스로 병동 복도 끝에 마련된 당직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간만의 여유도 잠깐, 얄궂게도 응급실 호출은 항상 이럴 때 온다. 당직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리자마자 당직용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응급실을 의미하는 ‘ER’이라는 글자가 떴다. 밤늦게 전화한 응급실 레지던트 목소리에 미안함이 느껴진다.

병원

수술 거부하는 70세 응급실 환자 

70세 남자 환자가 낮부터 시작된 오른쪽 아랫배 통증으로 응급실에 왔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CT 촬영을 해보니 급성 충수염, 흔히들 맹장염이라고도 하는 상태가 의심되어 외과로 연결되었다.

충수염은 응급실에서 흔히 마주하는 진단이다. 사람의 대장이 시작하는 부분에는 손가락처럼 길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를 충수돌기라고 한다. 여기에 염증이 생긴 것을 충수염이라고 한다. 염증이 충수돌기에 머물러있는 상태에서는 한 시간 내외의 수술로 떼어내면 대부분 깔끔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이를 방치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염증으로 조직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언제든 그 부분이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장 속에 있는 찌꺼기와 잡균들이 복강으로 들어가서 광범위한 염증을 일으킨다.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호출을 받자마자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환자의 기록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이어서 환자를 만나 배를 만져보고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게 하면서 몇 가지를 확인했다. 역시 충수염이 틀림없었다.

의사

나는 환자에게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할 상황임을 알렸다. 그러자 환자는 굉장히 곤혹스러워하며 수술을 하면 며칠 입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내 대답을 들은 환자는 지금 수술을 받기는 곤란하니 그냥 아픈 것만 어떻게 해줄 수 없겠느냐고, 일단은 약만 지어서 퇴원했다가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되겠냐고 했다.

응급실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배탈이 심해서 약이나 좀 타러 왔더니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니. 당혹스러운 게 당연하다. 환자의 심정에 공감한다. 나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이유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다시 찬찬히 설명했다. 하지만 거듭된 설명에도 환자는 집에 돌아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가족이라면, 수술이 꼭 필요하다면…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귀가를 고집하는 상황은 의사의 입장에서도 꽤 곤혹스럽다. 의사의 치료 의무와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보통은 자기결정권이 이긴다. 의사도 웬만큼 설득하다가 안 되면 동의서를 받고 환자를 귀가하게 한다. 동의서에는 ‘환자가 의사로부터 충분히 설명을 듣고 치료 중단에 따르는 위험을 인지하였음에도 스스로 원해서 귀가함’이라는 내용을 담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치료 의무 쪽으로 끌어온다.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끈질기게 환자를 설득한다. 동의서를 받고 귀가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가족이라면, 수술이 필요하다면, 똑같이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 간호사 의사

그날도 나는 환자 옆에 쪼그려 앉아서 환자의 눈을 올려다보며 차근차근 다시 설명했다. 지금 수술을 받고 회복하기까지 길어야 며칠이면 되는데, 무리해서 귀가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부디 환자가 자신이 처한 위중함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이제 환자도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지금 수술을 못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응급실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던 환자는 그제야 진짜 사정을 털어놓았다.

응급실 환자 병원

그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근 법에 따라 최저임금이 오르고 경비원들 급여도 인상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곧바로 그에 상응하는 인원 감축이 단행되었다고 한다. 벌써 동료 경비원 몇 명이 그만두었다고 한다. 만약 입원하게 되어 다음 날 출근을 못 하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일자리를 잃을까 봐 걱정하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환자의 생명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수술을 하도록 끝까지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이고 뭐고 다 끝입니다. 그보다는 일단 수술을 받고 그 이후를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살아 있어야 일을 해도 할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아무래도 괜찮으니 약이나 지어달라고 고집을 피우던 환자는, 거듭된 설득에 결국 수술을 받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나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왔으면서도 통화 내내 미안해하던 그 환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역사를 돌아보면, 의학은 ‘수명 연장’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의학이라는 이름의 종교에서 사람의 수명을 늘리는 것은 ‘선’이고, 줄이는 것은 ‘악’이다.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6년 말에 발표된 통계청의 기대수명표에 따르면, 2015년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85살까지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46년 동안 기대수명이 20년 이상 늘었다. 이제 ‘100년의 삶’은 먼 미래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앞에 닥친 이야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100세 인생’이라는 꿈을 실현하는 동안 정작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진 않았는가. 은퇴 이후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혹시 갑갑한 빈곤과 고단한 노동의 쳇바퀴 같은 이어짐은 아닌가.

앞서 내가 만났던 70세 충수염 환자만 보아도 그렇다. 어떤 이들에게는 늘어난 수명이 고달픈 삶의 연장일 뿐이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일자리를 잃을지 모를까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들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지 모른다.

장수는 축복이 아닌 저주일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 장수는 축복이 아닌 저주일 수도 있다.

100세 인생, 축복인가 저주인가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 린다 그랜튼(Lynda Gratton)과 앤드루 스콧(Andrew Scott)은 [100세 인생] [footnote]원제 : The 100-Year Life | 린다 그래튼 , 앤드루 스콧 지음 | 안세민 옮김 | 클 | 2017년 04월 10일 출간[/footnote]에서 수명의 연장이 개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1945년, 1971년, 1998년에 각각 태어난 잭(Jack), 지미(Jimmy), 제인(Jane)이라는 가상 인물들을 모델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비교한다.

100세 인생

먼저, 1945년생인 잭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교육-일-은퇴’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3단계의 삶’을 살았다. 생애 초기에 배운 지식과 기술로 평생직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일하면서 꾸준히 저축한 돈에 연금을 더하여 은퇴 이후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3단계 삶’은 1971년생인 지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1998년생 제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된다. 1945년생은 3단계 삶을 살아가고, 1971년생은 어느 순간 3단계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1998년생은 처음부터 3단계를 배제하고 삶을 계획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첫째, 새로운 기술과 지식이 빠르게 등장했다.

예전에는 한 번 배운 기술과 지식으로 직업을 정해서 평생을 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한때 배운 것들이 금방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생애 초기 짧은 기간 동안 배운 것으로는 평생 먹고살 수가 없다. 안정적인 평생직장은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유목민처럼 불안정한 임시직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추세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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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연금 제도가 힘을 잃고 있다.

1945년 생인 잭이 은퇴 이후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이 연금 덕택이다. 그런데 사실 연금 제도는 다단계 피라미드와 비슷하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폰지 게임(Ponzi game)이라고 한다.

현재 은퇴자들이 연금으로 받는 돈의 상당 부분은 그들 자신이 과거에 냈던 돈이 아니다. 그들이 냈던 돈으로는 연금을 지탱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퇴자들이 받는 돈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실은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낸 돈을 은퇴자들이 가져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어린 사람들이 나중에 그들의 연금을 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알다시피,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에 따라 연금을 지탱하는 근로 가능 인구도 함께 줄어든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연금의 재원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1971년생 지미와 1998년생 제인은 잭이 누렸던 연금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셋째, 수명이 늘어나면서 은퇴 후에 살아가야 할 날이 더 길어졌다.

만약 잭, 지미, 제인이 똑같이 65세에 은퇴를 한다고 해보자. 1998년 생인 제인은 1971년 생인 지미보다, 그리고 지미는 1948년 생인 잭보다 은퇴 후 더 긴 시간을 살아야 한다.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연금이 줄어든 대신에 저축을 더 많이 해서 운 좋게 이전 세대와 비슷한 정도의 노후 자금을 마련하더라도, 이를 갖고 더 오래 버텨야 한다. 긴 수명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 빈곤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른 대안도 있기는 하다.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일의 족쇄에 매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살게 된 결과가 평생 일에 매여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요컨대, 수명은 점차 늘지만, 그것이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식과 기술의 유효기간이 줄어들고, 연금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며, 제한된 노후 자금으로 살아갈 날만 늘어난다.

선택받은 사람들 vs. 배제된 사람들 

그래서 저자들은 ‘교육-일-은퇴’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3단계의 삶’은 이제는 가능한 방식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들은 그 대안으로 ‘다단계의 삶’을 제시한다. 배우다가 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배우는 과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기도 하는 삶의 방식이 저자들이 말하는 ‘다단계의 삶’의 골자다. 저자들은 ‘다단계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고, 일과 휴식의 조화를 도모하며, 여가를 잘 활용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쓴 나나 그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나 ‘다단계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직 그 전 단계의 ‘3단계의 삶’조차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저자들은 교육, 직장, 노후가 비교적 안정적인 이들을 전제로 책을 썼지만, 세상에는 그런 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

노인 고독 외로움 슬픔 눈물 회상 과거 기억

정규 교육을 마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매년 계약서를 써야 하는 이들이 있다. 내년에도 같은 곳에 출근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은퇴 후에는 퇴직금을 털어서 등 떠밀리듯 자영업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있다. 퇴직금조차 없어, 빌딩과 아파트 경비원으로 한 달 내내 24시간씩 2교대로 일하고 95만 원, 136만 원, 148만 원… 돈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는 아직 ‘3단계의 삶’조차 진입하지 못한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 이웃이고, 가족이며,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더 시급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3단계’에서 ‘다단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 ‘교육-일-은퇴’라는 ‘3단계의 삶’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듬는 것이다. 우선은 모두가 ‘3단계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먼저다.

한 마디로, ‘내가 응급실에 만났던 70세 경비 아저씨가 마음 편히 충수염 수술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게 더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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