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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맞다/틀리다’에 관하여

“이제 와서 26년의 질적 함량을 문제삼으며 허지웅이 맞았다는 의견들에 대해: 이런 이야기 꼭 영화뿐만 아니라 디워든 나꼼수든 깨시민 논쟁이든 많이 듣는데, 그럴거면 지금 그럴 게 아니라 당시 그냥 “나는 왜 욕먹는지 모르겠네” 정도라도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지웅)

우연히 허지웅 씨 페이스북 단상을 접했다. 지웅 씨의 단상이 내 단상의 발아점인 셈이다.

1.
어떤 문화 텍스트에 관한 해석에 대해 ‘맞다’는 진술, 그리고 그 당연하게 전제된 짝말, 대립항으로서 ‘틀리다’는 표현은 손쉽게 관용적으로 쓰인다. 나는 이런 일상 표현이야말로 당대의 문화적 풍경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맞다’는 말, 이 일상적인 표현은, 좀 과장해보자, 21세기 남한의 달콤하지만 동시에 살벌무쌍한 천민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어떤 경향, 그 편협성, 그 천박함, 지긋지긋하게 촌스럽고 선정적인 진리 독점주의, 그런 문화적 강퍅함을 증거하는 흔적들 가운데 하나다. 물론 나는 스스로 ‘이건 좀 과장이잖아’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난 정말 과장하고 있는 건가’라며 또 저항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 문화적 텍스트에 대해 ‘맞다/틀리다’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하고, 쓰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또 다른 도그마가 될 염려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 해석’이라는 왕국에서 ‘맞다/틀리다’는 신민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왕국이 피폐해지거나 상처받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인용이든 재인용이든 아니면 직접 자신이 한 말이든 불문하고 그렇다.

언젠가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위대한 비평가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은, 첫째 자신과 반대되는 이론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며, 둘째로는 자신이나 상대방을 어떤 특정 카테고리 속에 집어 넣어 분류하려고 하는 태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비평이란 저자와 비평가의 대화, 텍스트 상호의 대화, 그리고 반대 이론끼리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T. 토도로프)

2.
다시 지웅 씨 페북 단상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평론가도 사람이다. 지웅 씨의 억울함에 대해선 십분 공감할만하다. 누구든 안 그렇겠나. 자신은 솔직하게 자신의 관점으로 어떤 영화를 해석했을 뿐인데, 그 해석을 “틀리다”고 공격하는 태도에 대해 ‘그래요. 제가 틀렸네요.’라고 바보처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쿨한 젊은 평론가다. 그 쿨함과 위악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브랜딩이고, 포지셔닝인 바에야 더욱 그럴 수 없겠다 싶다. (사족. 자신을 삼인칭으로 표현하는 일은 스스로도 어색하겠지만, 보는 사람도 어색하다.)

각설하고, 일상적인 관용어구로서 문화적 해석에 있어 ‘맞다/틀리다’라는 표현은 자칭 타칭 평론가라면, 페이스북과 같은 가벼운 일상적 메모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삼가야 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지웅 씨 페북에서 ‘맞았다’는 표현은 누군가의 트윗(들)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발화의 출처는 지웅 씨가 아니고, 지웅 씨의 ‘어떤 독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 트윗을 자기 위로의 증거로 삼아 붙잡고 싶었나 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치 초등학교 동급생이 된 것 같은 감상적인 연민이 생길 지경이다. 물론 나보다 불쌍한 사람은 이 세계에 거의 확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3.
무의식적인 언어 습관이 곧 평론과 해석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 글쟁이라는 표지로 일하고, 돈 버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쓰는 글에 대해선 아무리 사소한 글에도 도덕적 책무가 뒤따른다. 굳이 ‘책임’이 아니라 책무라고 쓴 건 이것이 바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계약상 책임’으로 당연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평론가라는 타이틀에 쉽게 영향받는 순응적이고 관습적 독자는 평론가의 관점에 쉽게 물들기 쉽다. 그런 독자의 태도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나 역시 그런 순응적, 관습적 독자로서 함께 경계하고자 굳이 부연한 것에 불과하다.

4.
우리 시대에 영화 평론가라는 존재는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극소수 몇몇은 여전히 관습적인 매체, TV 방송과 종이신문, 그리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온라인매체에 글을 쓰고 ‘평론가입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기꺼운 독자들은 점점 더 사라져간다. 아주 오래전, 정영일이 마치 정답을 이야기하듯 짧게 나와 주말의 영화를 소개했던 그 권위, 혹은 수많은 영화광을 양산해냈던 정은임과 정성일 콤비의 ‘FM 영화 음악’이 만들어냈던 그 ‘시네마 천국’은 이제 없다.

Nuovo Cinema Paradiso (1988, Giuseppe Tornatore)  © 1998 - Miramax

Nuovo Cinema Paradiso (1988, Giuseppe Tornatore) © 1998 – Miramax
아직 우리에게 ‘시네마 천국’은 남아 있는 걸까.
물론 영화 [시네마 천국]은 그 꿈이 왜곡된 기억이라고, 기만적인 현실일 뿐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이제 누구나 평론가니까. 그건 한편으론 자연스럽다. 그건 한편으론 아주 민주주의스럽잖아. 좋은 거 아냐. 하지만 평론가 고 김현 투로 이야기하면, 누구나 시인이고, 누구나 시를 쓰지만, 누구나 시집을 내는 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론가라는 직업이 살아남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선 갑남을녀의 문화적 심미안과 감수성을 좀 더 풍성하게 해줄 ‘성찰’이 그 해석에 깃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은 언어와 언어로 재현되는 세계와 그렇게 재현되는 세계로서의 주관적인 진실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그 경건하고 설레는 두려움이 없다면, 그가 누구든, 그는 평론을 해선 안 된다.

참고 문헌
김성곤, ‘츠베탕 토도로프; 탈구조주의와 문학비평의 새 지평’ , [미로속의 언어], pp.157, 158. 중에서, 민음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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