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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조그만 시골 학교였다. 한 학년에 200명이 채 못 되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타지에서 왔는데, 그러다 보니 대부분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 방 하나에 12명이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면 무릎 높이의 평상이 절반을 차지했고, 안쪽으로 개인당 하나씩 배정된 목제 사물함이 일렬로 놓여있었다. 그 위로 각자 쓸 이불을 개어 올렸다. 한 사람당 폭 50cm에 길이 2m 정도의 개인 공간이 주어졌다. 밤에 잘 때 서로의 이불이 조금씩 겹쳐지기도 했다. 쉽게 말해, 군대 내무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육군의 내무반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K_Army_Soldier%27s_Squadroom_1.jpg
내가 다닌 고등학교 기숙사는 군대 내무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고 3이 시작될 즈음 기숙사에서 살던 친구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자취하러 나갔다. 대학 입시라는 중요한 관문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이 아무래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즈음 학교 주변 자취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학교 정문 맞은편 언덕에 있는 조그만 방을 자취방으로 정했다.

고등학교 3학년, 자취방의 추억 

내가 거기서 살았으니 자취방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어떤 할머니가 사는 시골집에 달린 허름한 창고였다. 거기에 싱크대 같은 집기를 욱여넣어서 겨우 한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곳이었다. 한 평이 조금 넘을 정도나 될까. 이불을 펴면 남는 공간도 없었다. 게다가 방구석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서 축축한 냄새도 났다.

시골의 3월은 아직 밤이 쌀쌀했다. 슬리퍼를 끌고 방 뒤쪽으로 가서 기름보일러를 틀어두어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을 정도였다. “징~”하며 기름을 태우는 보일러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나았다. 문제는 새벽 서너 시가 되면 아침잠이 없는 집주인 할머니가 일어나서 기름을 아낄 생각으로 보일러를 꺼버린다는 점이다. 나는 4월이 지나기 전까지 종종 한기를 느끼며 새벽에 눈을 떴다.

집 방 마루 벽

깊은 밤에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천장의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뭔가가 후두두 하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집주인 할머니가 기르는 강아지가 크게 “멍!”하고 짖으면 다시 그 후두두 하는 소리가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그렇다. 천장 어딘가에는 쥐들도 살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지내는 동안 그 쥐들과 직접 인사할 일이 없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자취방이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마당에 나가면 저 아래로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청명한 시골 공기를 깊게 들이쉬면 기분까지 상쾌했다.

자취방에 적응할 즈음, 무덥고 습한 8월이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방학이었지만, 고3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날도 보충수업 때문에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지루함을 달래려고 간간이 교실 창밖을 보는데,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날씨가 흐려지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급기야 창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태풍이 온다더니 그런가 보다 했다.

Hartwig HKD, "Waiting:, CC BY https://flic.kr/p/5gfGK7
Hartwig HKD, “Waiting”, CC BY

오후가 되어 보충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섰다. 우산은 없었지만, 다행히 비가 멎었다. 잠시나마 이불을 펴고 낮잠을 잘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가방을 들쳐 메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교문 앞 문방구를 지나서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에 다다랐다. 그곳은 시멘트로 대충 포장된 경사가 있는 골목인데, 얼마나 가파른지 10m 정도는 두 손을 다 사용해서 거의 기다시피 해서 올라가야 한다.

후다닥 기어 올라가서 허리를 펴고 앞을 보았다. 그런데 눈앞에 뭔가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길에 뭉텅뭉텅 찢어진 책들이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부는 비가 만든 웅덩이에 처박힌 채로 젖어 있었다. 허리를 숙여 자세히 살펴보니 수능 문제집이었다.

‘누가 문제집을 이렇게 아무 데나 버린 거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자취방으로 향할수록 그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버려진 책 쓰레기

자취방에 도착한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 자취방 천장이 뜯겨 있었다. 세찬 태풍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내 자취방 천장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오던 길에 본 책들은 다름 아닌 내 책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취방 앞으로 내 수능 문제집과 정리 노트들이 정신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집주인 할머니도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멋쩍게 웃으며 난장판이 된 방바닥을 물걸레로 닦고 있었다.

수능까지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때까지 풀었던 문제집과 정리했던 노트도 거의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순간 어떤 오기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잃어버린 책들을 새로 사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난장판이 된 방을 정리하고 나니 벌써 밤이 되었다. 뻥 뚫린 천장 너머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달빛에 스며든 밤공기는 한여름치고 꽤 선선했다. 이렇게 밤하늘의 별을 세면서 잠을 잔 게 언제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밤하늘

새로 발견한 게 있는 반면에 사라진 것도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천장 위를 뛰어다니는 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마 태풍에 같이 날아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짐작만 할 뿐이다.

거의 20년이 지난 일이다. 나는 요즘도 창밖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생각한다. 하긴, 요즘 세상에 태풍으로 집 천장이 날아가는 일을 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산다. 층간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있지만, 천장 자체가 날아갈 걱정은 하지 않는다. 휴가를 내고 캠핑을 가지 않는 이상, 밤하늘을 보면서 잠을 잘 일은 없다.

반면에 인류 역사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와 다른 시기 같은 공간을 살다간 원시인들은 매일 밤이면 비바람을 피할 동굴을 찾아다녀야 했고, 태풍이 부는 날이면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압도되어 공포심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이 모든 게 문명의 힘 덕분이다. 문명은 지구상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만 누리는 특권이다. 문명 덕분에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생명체가 되었다.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동물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문명을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바로 인간의 지적 능력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인간의 세 가지 지적 능력 

그렇다면 인간의 지적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과 다른 동물의 운명을 갈라놓았는가. 이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한다. 이성적 사고는 인간과 여타 동물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인간의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인간은 그들 앞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해한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한지 끊임없이 검토하고 확인한다.

아이디어 생각 사람

둘째, 인간에게는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함께 힘을 합쳐서 도시를 세우고 우주선을 쏘아 올린다. 물론 꿀벌이나 하이에나 같은 다른 많은 동물도 서로 집단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들에게도 협력하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거버넌스 협력 협치

하지만 인간의 협력과 다른 동물의 협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다른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협력한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협력한다. 동물의 협력은 유전자에 따라 미리 정해진 것인 반면, 인간의 협력은 각각 상황에 따른 적응의 결과다.

셋째, 인간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고 믿는다. 이른바 허구적 개념이다. 이것은 추상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돈, 종교, 정치 같은 것들이 그렇다.

생각 아이디어 소녀 아이

당신이 1만 원짜리 지폐로 점심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당신과 음식점 주인 모두가 그 지폐에 그런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말에 교회에 가서 헌금하는 것은 성경에 적힌 내용을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대통령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지위의 정당성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믿음과 동의가 무너진다면 돈, 종교, 정치 권력은 존속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자연물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허구적 개념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따를 때, 허구적 개념은 협력의 원동력이 된다.

요컨대, 인간은 이런 허구적 개념들을 발명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힘을 뭉치고 협력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생명체가 되었다. 도시를 세우고 과학을 발달시켰다. 식량의 생산을 크게 늘렸고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했다. 물자가 풍부해지면서 약탈을 목적으로 한 전쟁도 그 전에 비하여 줄어들었다. 인류는 오래도록 그들을 괴롭히던 굶주림, 전염병, 전쟁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일구어온 문명의 실체이다.

호모데우스, ‘신이 된 인간’ 

그렇다면 앞으로 인류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호모 데우스] [footnote]원제 : Homo Deus | 유발 하라리 지음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05월 19일 출간[/footnote]에서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특히 인공지능의 출현을 중심으로 미래의 인류는 어떤 길을 가게 될지 가늠해본다.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는 굶주림, 전염병, 전쟁 같은 절박한 문제를 해결한 인류가 그 다음 단계로 불멸, 행복을 추구할 것이며 최종적으로 스스로 신의 지위를 얻길 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모 데우스]에서 데우스(Deus)는 라틴어로 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신이란 기독교 같은 일신론의 신은 아니다. 그보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 같은 다신론의 신에 가깝다. 따라서 ‘신이 된 인간’에서 ‘신’은 종교적인 의미의 신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초능력과 같은 막강한 힘을 얻게 된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줄 기술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명공학을 들 수 있다. 생명공학은 인간의 동물적 특성을 직접 강화한다.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신체의 기능을 향상시킨다.

한편, 우리는 또 다른 기술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도 생명공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능력을 향상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에 힘입어 발전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 핵심인 지적 능력을 그 향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더욱 야심 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로봇 인공지능 A.I. 인간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오늘날 우리가 인공지능의 출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 새로운 능력을 갖추게 되리라는 기대감 위로 불안감이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인공지능을 두려워 하는가. 가장 흔한 대답은,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지적 능력 자체가 두려움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전자계산기는 인간보다 계산이라는 지적 능력 자체에서는 월등히 뛰어나지만, 전자계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이 두려운 이유 

따라서 인공지능이 두려운 이유는 지적 능력 때문이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인공지능이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자아의식을 갖고 인간을 도구화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물어보자. 왜 인공지능이 자아의식을 가지면 인간을 함부로 도구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것이라고 짐작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높은 지능이나 자아의식이 배타적 성향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배타적으로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근거를 지금 우리 인간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떠올려보자.

말 동물 가축

지구상에는 인간보다 많은 소와 닭 그리고 돼지들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을 박탈당한 채 인간의 식량이 되기 위해서 한 생애를 살다 간다.

다수의 연구를 종합한 결과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대형 동물을 저울에 올리면 1억 톤 정도라고 한다. (대형 동물이란 소, 닭, 돼지처럼 무게를 kg 단위로 잴 수 있는 크기의 동물을 말한다.) 한편, 인간을 모두 저울에 올리면 3억 톤 정도, 인간이 기르는 가축은 7억 톤 정도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가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을 위해 사육되는 가축이다.

문제는 가축을 기르는 환경이 인간의 필요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동물 입장에서는 아주 열악하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동물이 평생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조그만 철장 안에서 살을 찌우다가 도살장으로 옮겨질 때에야 겨우 그곳을 벗어난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동물들은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같은 전염병에도 취약해진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면 그 원인이 된 비위생적이고 생산 위주의 사육 환경을 고치는 게 아니다. 병든 혹은 앞으로 병들지 모르는 동물을 산채로 땅에 파묻는다.

요컨대 우리 인간들은 그동안 높은 지적 능력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지적 능력이 낮은 다른 동물들을 철저히 도구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느낄 감정과 생명의 존엄성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그들의 삶을 삶이 아닌 듯이 여겼다.

인간 인공지능

이제 우리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이 나타날 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언젠가는 인간처럼 자아의식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와 돼지 그리고 닭에게 했듯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게 우리가 인공지능에 느끼는 공포의 근원이다. 우리가 다른 동물을 희생시켰듯, 우리도 희생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구제역 파동 때마다 굴착기로 땅에 파묻히는 아기 돼지들의 신음 속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에 지배당하는 우리 인간의 미래 모습을 미리 경험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우리를 괴롭히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기에 앞서 우리부터 약한 존재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 그게 먼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하던 대로 돌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매우 이해하기 쉽고 간단한 이야기다. 삼단논법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인간이 만든 것에는 인간의 가치관이 반영된다. 둘째,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다. 셋째, 인간의 가치관은 인공지능에 반영된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도구로 삼았던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은, 인간의 그러한 습성을 이어받아서, 결국 거꾸로 인간을 도구로 삼을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당신이 인공지능으로부터 도구로 대우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도구가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 약한 상대가 동물이건, 아니면 같은 인간이건 말이다.

JD Hancock, Big Fear, CC BY https://flic.kr/p/85Mum2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는 결국 인간 자신에 대한 공포다. (출처: JD Hancock, “Big Fear”,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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