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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승과 좋은 비평가는 물론 같지 않으며 같을 수도 없겠으나 비슷한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아졸라와 블랑제 

탱고 음악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탱고보다 더 고상한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새벽 서너 시가 될 때까지 탱고 클럽에서 연주하고, 낮이면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라벨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을 공부하며 틈틈이 작곡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피아졸라에게 드디어 프랑스 유학길이 열렸다. 프랑스 정부가 그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최고의 음악교육자로 손꼽히는 나디아 블랑제를 찾아갔다.

나디아 불랑제 (Juliette Nadia Boulanger,1887~1979)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1189&PHPSESSID=f031fbae618d1a6fd75fcc7b4560145b
나디아 불랑제 (Juliette Nadia Boulanger,1887~1979)

블랑제 앞에서 피아졸라는 자신이 지난 10년간 갈고 닦은 곡들을 연주했다. 그러나 블랑제는 그의 악보들을 살피더니 “여기는 스트라빈스키, 여기는 바르토크, 여기는 라벨”이 있을 뿐이라며 어디에도 피아졸라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아졸라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불랑제는 피아졸라에게 어떤 음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지 물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이 연주하는 탱고는 수준 낮은 음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부끄러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밤에 클럽에서 탱고를 연주한다고 말했다. 나디아 블랑제는 피아졸라에게 탱고를 연주하도록 권했다.

피아졸라의 연주를 듣고 난 뒤 블랑제는 외쳤다.

“이 바보야! 이게 바로 피아졸라야.”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Ástor Pantaleón Piazzolla, 1921년~1992년)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C%8A%A4%ED%86%A0%EB%A5%B4_%ED%94%BC%EC%95%84%EC%A1%B8%EB%9D%BC
아스토르 판탈레온 피아졸라(Ástor Pantaleón Piazzolla, 1921년~1992년) “El Gran Ástor” (위대한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그 순간에 자신이 10년간 한 모든 곡들을 내버렸다고 회고록에서 고백했다. 블랑제는 미국의 조지 거슈인에게도 브람스를 흉내내며 2등으로 살지 말고, 1등의 거슈인이 되라고 충고해주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일화들을 접하노라면 무협지 세계의 사부 같은 존재가 실제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판타지와 무협지: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 

언젠가 이에 대해선 [무협지 세계의 조화]란 글로 말한 적이 있다.

무협지는 전형을 지닌다는 점에서 장르문학이다. 무협의 세계는 균형과 조화를 깨뜨리는 세력에 의해 갈등이 고조되다가 특별한 인연으로 훈련을 쌓은 절대 고수에 의해 다시 균형과 조화를 찾는 것으로 종결된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가리켜 스페이스 판타지라 부르는 것은 당연히 J.R.R.톨킨의 판타지 문학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지만, [스타워즈]에는 그에 못지 않게 동양의 무협지적인 세계관이 녹아들어 있다.

톨킨(1916)과 스타워즈 시리즈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 톨킨(1916년 당시 모습)과 스타워즈 시리즈

서양문학이 만들어낸 카니발적 탈출구가 ‘판타지 문학’이었다면, 동양에서 만들어낸 카니발적 탈출구는 ‘무협지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판타지와 무협지의 세계는 반드시 권선징악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신비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엘프나 신선들처럼 혹은 [스타워즈]의 제다이처럼 자신의 운명과 사명에 대해 명확하게 깨우치고 있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판타지와 무협지의 세계는 루카치가 말했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황금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은 일종의 오마주(hommage; 존경, 헌정) 라고 할 수 있다.

G. 루카치 (헝가리어: Lukács György, 1885년~1971년)
G. 루카치 (헝가리어: Lukács György, 1885년~1971년)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 G. 루카치, [소설의 이론](1915)

인간의 이성과 감성, 인간과 자연이, 인간의 영성이 자연의 신성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 못지 않게 형이하학의 세계 또한 충분한 발언권을 얻어 공존공영하는 세계다. 무협에서 육체는 정신 못지 않게 단련하고 수련을 쌓아야 하는 대상이다.

이 세계에서 육체는 이성보다 천대받을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련하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도록 단련해야 하는 대상이다. 루카치는 황금시대의 종말로부터 장편소설이 출발한다고 말한다.

세계의 화평을 위해 주인공이 만나야 하는 스승 

주인공이 몸담은 세계의 조화(혹은 중국식 ‘화평’)를 깨뜨리는 존재, 사건에 의해 주인공은 조화로운 세계로부터 갑작스럽게 부조화의 세계로 끌려 나온다. 현재의 주인공에게는 부조화를 다시 조화로 돌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주인공의 세계를 조화로운 화평의 세계로 되돌리기 위해 그는 ‘스승’을 만나야만 한다. 스승의 존재는 무협지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마치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사 간달프처럼 한눈에 선과 악, 미래를 예견할 수 있으며 주인공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에 대해서도 예견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2001) © 2001 - New Line Productions, Inc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2001) © 2001 – New Line Productions, Inc
그러나 모든 무협지 속의 스승은 쉽사리 비급을 건네주지 않는다. 실제로 주인공이 강호에 등장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의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스승은 주인공을 확실한 깨우침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그런 점에서 무협지의 세계에 등장하는 고수(스승)는 고전적인 세계의 진리관과 연결된다.

무협지의 세계가 그토록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세계를 여전히 동경하는 이유는 단순함, 명확함에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언제나 옳으며 스승의 가르침대로 행할 수만 있다면 주인공은 그가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 단순명료함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의 세계는 조화가 균형을 잡고 있는 세상으로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이형태(異形態)인 셈이다. 현실 속의 어딘가에는 여전히 우리가 넘볼 수 없는 고수들이 살고 있기를, 그들이 강호로 돌아와 주길 희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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