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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전쟁: 4. 전장의 가장자리에서

2017년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은 데일 만큼 뜨거운 주제입니다. 함부로 끼어들지 못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침묵합니다. 갈등은 대화를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가두는 증오와 편견만을 끝없이 잉태합니다. ‘젠더 전쟁’ 4부작을 통해 작은 대화의 공간이나마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이 글 소재에 대한 다양한 보론과 비판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1. 전쟁으로 가는 길
  2. 또다시 갈라진 세계
  3. 메갈리아의 역설
  4. 전장의 가장자리에서

이 글은 젠더 문제가 현재 한국의 인터넷 사회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담론이 되어버린 기원과 이유를 찾으려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전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비겁자의 입장을 견지하며, 이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과연 젠더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1. 혐오의 미러링

일련의 젠더 전쟁을 관통하는 단어 하나가 있을까? 그야 당연히 ‘혐오’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논쟁이 오갔는데 대체로 그 논점은 이러했다.

  • 여성혐오는 무엇인가?
  • 메갈리아는 혐오 사이트인가?
  • (메갈리아나 메갈리아4와는 구별되는) 워마드만 반사회적 남성혐오를 하는가?

수많은 질문이 혐오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이 혐오라는 말이 지금의 젠더 전쟁에 관한 모든 담론을 큰 의미가 없는 공회전으로 만들고 있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혐오’가 아닌 것들도 다 여성혐오로 끌어들인다는 비판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다.

혐오 남자 여자 갈등 차별 싸움 증오

메갈리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메갈리아가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발언을 페미니즘적 가치를 지향하는 미러링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메갈리아의 발화는 반사회적 혐오발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규제되거나 지탄받아야 한다.

반면 메갈리아에 옹호적인 사람들은, 남성혐오는 현실의 권력관계에 대한 풍자이기 때문에 여성혐오와 같은 수준은 당연히 될 수 없을뿐더러 혐오라고 하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의 당당한 사례다. 나는 둘 다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혐오 발언이다 

첫째, ‘미러링’이라는 용어를 어떤 식으로 붙이든, 그 발언은 혐오 발언이 맞다. 미러링의 기원은 많은 경우 초창기 메갈리아 주류 그룹이 만들어낸 용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자 연예인 갤러리 등을 포함하는 초창기 메갈리아의 인적구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미러링은 결국 디시인사이드에서 유래한 다종다양한 ‘패드립’의 수많은 파생형에 불과하다.

미러링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남성혐오가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는 다른 디시인사이드 드립 또한 혐오 발언이나 반사회적 발언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가령 디시인사이드 일각에서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7년 4월 16일 발생한 미국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에서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1984~2007)

2007년 4월 16일 발생한 미국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에서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1984~2007)

일부 네티즌은 조승희를 “동양인의 구원자 제너럴 조”, “총 든 예수” 등의 별명을 붙이고, 총기 난사 사건을 동양인이 백인들에게 한 방 크게 먹인 “버지니아 대첩”이라고 추앙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아시아인이 미국 사회에서 명백히 소수자였고, 조승희는 어린 시절 인종 차별의 피해자였다. 조승희를 추앙하는 것은 반사회적인 백인혐오 발언인가, 아니면 인종 권력관계에 대한 미러링인가?

메갈리아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조어들은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말이다. 특히 그 발언들 전체가 다 혐오 발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저연령 남성을 뜻하는 “유충”은 혐오 발언인가, 아닌가? 인터넷 언어의 속성을 하나하나 가려내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워낙 빠르게 유행이 바뀌기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다. 물론 몇몇 발언들은 혐오 발언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수위에 따라서 어떤 것은 혐오 발언이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할 경우 기준이 극히 모호해진다. 혐오 발언은 그저 디시인사이드의 흔한 문화일 뿐이다. 메갈리아, 그 뒤 워마드가 만들어낸 어휘와 표현은 남성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적개심을 표출하면서 구성원 사이에서 사회적인 접착제로서 기능한다.

결속 단합 협력 단체 집단

전략으로서의 혐오 

혐오는 그런 면에서 하나의 전략이다. 인터넷 사회의 맥락에서 혐오는 대체로 두 가지 수준에서 전략적으로 기능한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혐오는 점점 더 창의적인 혐오 표현(‘패드립’)을 만들어내게끔 유인하며, 더 많은 사람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는 혐오 발언을 만들어냈을 때는 사회적, 심리적 보상이 주어진다.

이는 구성원이 커뮤니티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촉진제로 작용한다. 거시적 차원에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적에 대한 피해의식과 복수심을 자극해 집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외부와의 관계에서는 투쟁성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이 역시 집단의 대내외적 활동을 자극한다. 나는 그래서 워마드의 남성혐오를 미시적, 거시적 차원에서의 전략적 활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의 기원에 대한 몇몇 설명은 그것이 하나의 전략임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시사IN의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이라는 기사는 여성혐오가 하나의 전략이라고 지적한다. 이 기사는 한국 청년층의 성비 불균형 때문에 만들어진 남녀 시장 지위의 차이를, 남성이 ‘후려쳐서’ 이득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온라인 여성혐오, ‘김치녀’ 담론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 그래프는 각 연도에 출생한 남아가 그 4년 후에 출생한 여아보다 얼마나 많은지를 나타낸다. 1981년에 태어난 남성은 1985년에 태어난 여성보다 거의 14만 명이 더 ㅁ낳고, 2000년에 태어난 남성도 2004년에 태어난 여성보다 10만 명 이상 많다. (출처: 아이추판다, "그래도 안 생겨요", Null Moedl) http://nullmodel.egloos.com/v/3174806

이 그래프는 각 연도에 출생한 남아가 그 4년 후에 출생한 여아보다 얼마나 많은지를 나타낸다. 1981년에 태어난 남성은 1985년에 태어난 여성보다 거의 14만 명이 더 ㅁ낳고, 2000년에 태어난 남성도 2004년에 태어난 여성보다 10만 명 이상 많다. (출처: 아이추판다, “그래도 안 생겨요”, Null Moedl)

여기서 나는 남성혐오가 여성혐오와 같은 무게를 지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요점은 ‘혐오’와 ‘미러링’을 구분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에 있다. 한 집단에 대해 적개심을 담은 표현은 어떻게 구사하든 혐오다.

표피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 있는 것 

둘째, 메갈리아와 페미니스트에게 조금 더 공정해지자. 혐오가 하나의 전략이라면, 전략적 목표와 그 전략이 출현한 맥락에 대한 관찰과 평가를 빼놓으면 안 된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반대로 물어보고 싶다.

‘남성 혐오 발언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메갈리아에서 나오는 말들이 남성혐오든 인간혐오든, 발언 자체에 신경 쓰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 될 뿐이다. 문화가 대체로 그 기저에 있는 사회의 재화획득 방식의 표현형이듯, 말도 마찬가지다. A라는 대상에 관해 특정 집단이 혐오 발언을 내뱉고 그것이 강력한 지지를 얻는다면 적어도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조건이 있다.

왜 트럼프 지지자들은 하필이면 멕시코인을 제일 혐오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외국인이자 증가세가 가시적으로 뚜렷한 외국인이 멕시코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

혐오 발언을 일삼던 트럼프의 충격적인 대통령 당선

트럼트 지지자는 왜 멕시코인을 혐오하는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대로 말한다.

사회나 공동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혐오 발언이 특정 상황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냐에 대한 문제다. 소수 인종(한국적 맥락에서라면 다문화)에 대한 혐오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 그리고 여성혐오, 장애인 혐오는 분명히 문제다. 권력관계에 있어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자를 압박하면서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 이는 소수자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사회를 파괴하며 분열시킨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제너럴 조” 드립 같은 것도 있다. 이는 반사회적인 발언이 분명 맞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경우 굳이 전략의 의미를 더하자면, 내부를 결속하고 외부와의 투쟁성을 장려하는 거시적인 수준의 전략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미시적 수준의 기능이 더 클 것이다. 즉, 도덕을 같이 조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 간의 친밀감을 확인하고, 그로써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저질유머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서로 간 이런 이야기가 통할 것이라는 충분한 신뢰관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부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집단에서 쫓겨날 것이다. 역으로 유머를 공유한다는 것으로 신뢰관계를 쌓을 수도 있다.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는 같은가? 

그렇다면 남성혐오는 어떨까? 남성혐오는 거시적인 수준과 미시적인 수준 모두에서 전략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혐오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남성혐오는 현실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없고, 여성혐오와 같은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자기 아버지를 “애비충”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는가? 이 사회가 여성 상위 사회라 그것이 실제 세계에서의 폭력으로 이어지는가? 사회의 고위직 점유율을 비롯한 성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까지 여전히 이 사회는 남성적인 사회다. 그에 대한 혐오 발언이 소수자에 대한 다른 혐오 발언들과 전적으로 등치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문화, 그에 기인한 성차별, 성폭력 등 다양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겪는 갈등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성혐오와 여성혐오가 같은 것이라면, PLO와 이스라엘도 같아지고 흑표당과 KKK도 같아진다. 이런 식으로 권력관계와 맥락을 지우려는 것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강남역 핑크코끼리 사건이 뭇 남성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대단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오는 것을 강력히 권한다.

폭력 페미니즘

하지만 남성혐오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그 현상 자체는 문제가 있다. 남성혐오가 대단히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이라서 내가 그것에 불쾌함을 느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덕적인 우려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남성혐오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설명하려고 해도 이것을 건전한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혐오, 남성혐오, 인터넷 젠더 전쟁은 그 선후 관계와 현실 권력관계의 차이를 비롯한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어쨌든 이 사회가 무언가 불만이 많은 사회, 적개심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지표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 우려해야 한다. 혐오 발언 자체에 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 발언을 낳는 사회적 긴장과 갈등의 골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젠더 전쟁의 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2. 전쟁을 끝내는 법?

젠더 전쟁은, 한국 사회의 많은 갈등이 그렇듯, 압축성장의 부산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만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보편성도 존재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격렬한 갈등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서구 사회의 많은 갈등처럼 세계화와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의 간접적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늘어만 가는 불평등과 별로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생활 수준, 그리고 안정적 일자리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은 혐오를 부추기기에 좋다.

거기에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가 늘어나면서 네트워크 간의 결집이 활발해졌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기 좋은 플랫폼들이 생겨났다. 이 또한 집단적 갈등 국면에 진입하는 문턱을 상당히 낮춰주었다. 따라서 한국의 압축성장이라는 특수한 맥락과 세계적 변화라는 보편적 맥락을 모두 고려해야 인터넷 젠더 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젠더 전쟁은 한국적 특수성과 인터넷이 가져온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변화라는 세계적 현상(보편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젠더 전쟁은 한국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인터넷이 가져온 커뮤니케이션의 질적 변화라는 세계적 보편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회문제가 그렇듯, 궁극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이며 손쉬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 문제 자체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구조적 원인은 사실상 해결이 불가능하다. 압축성장의 부작용과 스트레스는 압축성장의 놀라운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부담했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진보 

농업사회의 관념을 가진 기성세대를 모두 재교육 캠프에 집어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술진보를 막을 수도 없고, 인터넷을 검열할 수도 없다. 다만 궁극적으로 과거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차 죽고 새로운 세대들(특히 그 세대의 여성)이 한국 사회의 주류로 떠오를 때,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는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20대 한국 남성도 결국 똑같은 ‘한남충’이라고 주장할 것이지만, 실제로 기성세대보다 이들은 성 의식 면에서 확실히 진보적이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y) 결과를 분석한 김경희, 송리라의 연구(2016)에 따르면 남성의 성 의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은 세대다.

청년 남자 여자 연인

하지만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따지면 우린 모두 죽는다”라고 했다. 이런 답은 제대로 된 답이 될 수도 없고 무엇보다 무책임하다. 적어도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내가 메갈리아, 젠더 전쟁 등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만들어낸 모델이 타당하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조금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초점은 ‘혐오’가 아니다 

우선 메갈리아 현상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문제를 정녕 해결하고 싶다면 초점을 혐오에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혐오는 그저 근저에 있는 현상의 반영에 불과하다. 혐오가 보기 싫다고 그것을 원천적으로 틀어막는 것은 오히려 갈등을 일시적으로 은폐하는 것밖에 되지는 않는다.

워마드 등 전투적인 온라인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판단의 자유다. 다만 그들의 주장이 페미니즘도 아니며 단지 반사회적 혐오를 일삼는 이들에 불과하다고 과도하게 단순화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집단적 사회현상은 집단으로 공유하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대부분 사회의 아름다운 면보다는 어둡고 해결되어야 하는 면을 보여준다. 사회의 지향점은 듣기 싫은 소리를 막아야 하는가, 문제를 직시하고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가?

오히려 일시적으로 갈등을 감추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을 끝내는 법을 누군가 찾는다면, 나는 그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갈등의 뿌리를 그 본질에서 없애야지, 그 가지만 자른다고 이 갈등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갈등만 제거한다고 그 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이는 갈등만 제거한다고 그 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트럼프 당선시킨 ‘또라이’ 해결법?   

트럼프 현상을 한 번 살펴보자.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만 해도 그를 여성혐오, 외국인혐오 등을 일삼는 시정잡배로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또라이’로 여겨졌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들의 승리였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엄청난 인지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수많은 분석들을 만들어내고 공유했다.

특히 미국 백인 블루칼라층의 경제적인 몰락이 그들의 분노와 혐오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시각은 타당하다고 본다. 나아질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분노의 화살을 소수자에게도 돌린 것이며 기성 정치권에게도 돌린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그들을 무식하고 덜떨어진 인간들로 깎아내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내가 봐온 분석들은 그보다는, 많은 경우 그들이 대체로 무식하고 덜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분배 정의 실현과 새로운 사회계약, 정치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들이 많았다.

힐빌리('백인 촌뜨기) 출신의 보수주의자(J. D. Vance)가 쓴 [힐빌리의 애가: 위기에 처한 어느 가족과 문화에 관한 기록](왼쪽)과 트럼프.

힐빌리(‘백인 촌뜨기) 출신의 보수주의자(J. D. Vance)가 쓴 [힐빌리의 애가: 위기에 처한 어느 가족과 문화에 관한 기록](왼쪽)과 트럼프. (관련 기사: 힐빌리의 마약, 트럼프)

갈등, 은폐할 것인가 드러내 해소할 것인가 

왜 비슷한 시각이 워마드나 메갈리아에 적용될 수는 없는가? 여기서는 그들이 올바르다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석과 해법을 갈등 은폐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갈등 해소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전쟁을 끝내자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여성은 절대 이 문제에 만족할 수 없으며 입 다물라고 해서 그들은 입을 다물지도 않을 것이다. 이 불만은 성희롱과 성폭력에 국한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제도나 관행, 혹은 복지제도의 유형이 여성의 생애주기에 불리하게 작동하여 저소득과 빈곤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전략 부재

내가 보기에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등장, 젠더 이슈의 성장은 페미니스트가 노력한 결과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젠더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계속 극단화했다는 신호다. 메갈리아 이전부터 인터넷에서는 분명 그런 신호들이 있었다.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메갈리아와 온라인 페미니즘의 물결이 촉발했다는 사실은 기존에 존재하던 여성운동, 혹은 페미니즘 전략이 문제였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요컨대 기존 페미니즘 운동이 다수 여성이 실질적으로 공유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거나, 혹은 포괄하는 집단이 여성 내부에서도 극히 소수였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과연 그들이 갈등의 당사자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를 대변하고 해소할 가능성을 보여주었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실제로 과거 페미니즘은 분명 효과적인 정치적 운동의 근거가 되어준 사상이었다(과거 페미니즘이 진짜고 지금은 페미니즘도 아니다라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수 여성이 민주국가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를 갈망했을 때 서프러제트(1860년대부터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 운동가들과 여성은 그것을 쟁취해냈다.

1912년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 (2015, 사라 개브론)

1912년 영국을 배경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 (2015, 사라 개브론)

후에 그들은 성희롱, 성추행 등을 모두 포괄하는 성폭력 일반을 범죄 행위로 규정해냈다. 그리고 여성을 단순히 가부장에 귀속된 재산으로 보는 식의 시각을 거부하고 그들 역시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자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런 성공적인 의제들 모두 여성 일반이 공감하고 동의하며 간절히 원해온 것들이었고, 목표가 구체적이며, 확실했다는 데 있다.

여성 ‘다수’를 대변하려면, ‘서로 다른’ 여성을 대변해야 

만약 페미니즘이 이런 성과를 내고자 한다면 여성 다수를 대변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 다수를 대변하고자 한다면 우선 여성이라는 거대한 집합이 세부적으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디에 서 있는’ 여성이냐에 따라서 여성이기에 겪는 차별과 폭력도 달라지며 그들이 원하는 바와 해결을 위해서 생각하는 전략도 달라진다.

하지만 극히 소수를 대변하면서 모두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만 한다면, 링컨이 했다는 말밖에는 들려줄 것이 없다.

“많은 사람을 짧은 시간 속이는 건 가능하다. 일부를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남자들은 여성들을 영원히 속이는 것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은 충분히 많은 사람이었고, 그들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드러났다. 마찬가지 말이 여성 내부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워마드를 비롯한 젠더 전쟁의 주요 참여자에 대한 진지한 사회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 데이터를 통해서 청년층 여성 집단이 어떻게 분화했고, 어떤 인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에게 정의의 죽창을 꽂는 단일한 여성집단은 상상의 산물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 치하에 있었을 때 모든 조선인들이 독립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는 것과 같은 신화화된 서사에 불과하다.

여자 여성 비밀

여성집단은 명백히 사회경제적으로 분화했다. 남성 중심 문화에 적응해 사는 여성,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여성, 그리고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여성 등으로 말이다. 그리고 계층분화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들이 겪는 차별이 계층에 따라서 다르게 전개될 수 있음을, 그에 따라서 때로는 다른 대책과 우선순위 배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며: 2008년 촛불을 기억하라  

만약 갈등을 만들어내는 왕성한 정치적 에너지가 특정한 목표점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분출되기만 한다면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동력은 곧 소진되어 사라진다. 효능감을 얻지 못하면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좌절감이다. 2008년 촛불시위가 딱 그랬다.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

당시 시위대는 두서없이 이명박 정권의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전부 다 반대했었고, 그 핵심 논거였던 광우병은 근거가 딱히 없는 도시 전설임이 밝혀졌다. 결국, 얻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정치적 궤적이 박근혜 당선으로 귀결되자 2016년까지 무려 8년 동안이나 속수무책의 무력감이 진보진영을 지배했다.

페미니즘이나 2008년 촛불시위나 그것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당시 정국 운영 방식은 분명히 집단적인 저항을 촉발할 만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인습들과 성차별적인 문화는 페미니즘이라는 저항운동을 만들어낼 만했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한 결과를 내는 ‘유능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바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스스로가 유능한 운동임을 입증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지지자를 잃고 표류할 것이고, 어느 순간 무력감과 대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유능한’ 정치운동이 되려면 

소라넷 폐쇄와 같은 것은 분명 쾌거이긴 하나, 쾌거가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각각의 여성집단이 이루고자 하는 쾌거들은 서로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쾌거들의 우선순위들은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 남인순의 문캠프 합류에 대해서 여초 카페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지의 페미니스트들과 워마드는 벌써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유능한 저항운동 혹은 정치운동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지금 존재하는 갈등을 잘 반영해야 한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무엇을 갈등으로 파악하고,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의제화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표현 하나하나의 성차별성과 ‘미소지니’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갈등을 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Romuald Bokej, CC BY SA

Romuald Bokej, CC BY SA

대체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할 의미 없는 고담준론도 마찬가지다. 가령, 뤼스 이리가레에 대한 심오한 세미나도 좋지만, 열악한 2차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성폭력 대책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철저한 외부자인 내가 둘 중 무엇이 더 핵심이 되어야 하느냐를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여성의 분노와 갈등을 잘 반영할 수 있을지 만큼은 계속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 인터넷에 반영되는 여성 집단의 분화에 관해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이준석은 “여러분 세상은 키보드 밖에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키보드는 적어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니터를 통해 세계에 반영한다.

이준석 진중권

키보드(로 표현된 표현과 사유)는 세계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또 반영한다. 하지만 키보드가 세상의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워마드는 회원을 다 끌어 모아봐야 인구가 3만밖에 안 되며, 메갈리아4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2만 5천 명이 안 된다.

이들이 전체 한국 여성을 충실히 대변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저 거대한 빙산 일부분만을 인터넷을 통해서 들여다본 것에 불과하다.

과연 지역에 따라서, 세대에 따라서, 직종에 따라서 여성 내부에 어떤 차이들이 존재할 것인가? 그들은 무엇을 공유하며 어떤 것에서 생각을 달리할 것인가? 해답이 필요한 질문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페미니즘이 여성을 대변하고 싶다면 데이터, 통계, 세대와 지역에 기반을 둔 여성의 삶에 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끝나지 않은 혁명 

누가 무엇에 불만을 품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택하는가, 그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을 먼저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해결책의 출발선으로 삼아야한다.

복지국가 유형에 대한 석학인 스웨덴의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은 최근 몇십 년 간 선진국에서 여성의 역할과 삶이 혁명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노동시장에 진출하여 독자적인 주체로 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혁명이 “끝나지 않은 혁명(Incomplete Revolution)”이라고 지적했다.

끝나지 않은 혁명

에스핑 안데르센에 따르면, 이 혁명이 완수되지 못한 것은 1) 남성의 전통적인 젠더 규범이 바뀌는 속도가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해 사회가 바뀌는 속도보다 더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혁명이 미완인 이유를 하나 더 꼽는다. 2) 바로 계층에 따라서 혁명의 파급효과가 차이를 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들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둘이었다.

나는 ‘내부자’가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부족할 수는 있으며, 내가 영원히 알지 못할 것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인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외부인의 시야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이제 다양한 독자의 판단으로 남겨두고, 글을 마친다. (끝)

참고문헌

  • 김경희, 송리라. 2016. 민주주의 의식과 젠더 의식의 군집 유형과 영향 요인에 관한 탐구. 페미니즘 연구 16(2). 3-39
  •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 2014, [끝나지 않은 혁명], 나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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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풍호
초대필자

글쓰기의 비결은 리듬, 파워 그리고 집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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