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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장과 대형 마트(혹은 백화점)는 정말로 공존할 수 없을까?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넓게 보아도 대형 마트가 없는 곳은 거의 없는데, 그렇다면 이제 곧 전통 시장은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리스본에서 만난 벼룩시장들은 이런 면에서 분명 경쟁력이 있다. 리스본의 벼룩시장들을 통해 우리 전통 시장의 살길을 생각해봤다.

리스본에는 여러 벼룩시장이 있지만,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은 일명 도둑시장이(‘Feira da Ladra’)이다.[footnote]Ladra에는 벌레라는 의미도 있어 ‘골동품에서 나온 벌레’에서 파생된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footnote] 도둑시장은 13세기부터 몇몇 도둑들이 장물을 늘어놓고 팔면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지고 재미난 볼거리도 많아 리스본에 온 여행자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리스본 사람들도 아주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고서는 마트나 백화점에 가기 전에 우선 이 시장을 둘러본다고 하니 단순한 관광 명소의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리스본에도 대형 마트와 백화점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룩시장이 긴 세월을 버텨왔다는 점은 나름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뜻일 터. 그리고 그 경쟁력은 차별성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리스본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는 도둑시장(Feira da Ladra)
리스본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는 도둑시장(Feira da Ladra)

개성 넘치는 물건들이 가득

우선 이곳엔 대형 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 있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포르투갈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화려한 타일과 찻잔, 앤틱 소품들과 각종 액세서리, 책과 잡지, 옛 시절을 간직한 우표와 동전은 물론이고 개성 넘치는 수공예품들도 보이며 군용물품까지 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고 해도 될 법하다.

게다가 ‘저런 걸 누가 사?’ 싶은 물건들도 누군가는 집어 들고 꼼꼼히 살피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 먹거리와 의류를 주로 취급하며, 그나마도 비슷비슷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즐비한 우리의 전통 시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아래 이미지는 누르면 커집니다.)  

시장에서만 가능한 경험들

시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요소들 또한 하나의 차별점이 될 수 있다. 벼룩시장의 특성상 대형 마트처럼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지는 않아 내가 원하는 물건을 한눈에 찾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재미로 다가온다. 손님은 주인에게 이러저러한 물건 있냐며 말을 걸고, 주인 또한 싹싹하게 대답해준다. 그런 물건은 없고 대신 이런 게 있다든지, 지금은 없는데 다음번에 들고나오겠다든지, 혹은 옆집으로 가보라든지 등의 대화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문 상인도 물론 있긴 하지만 물건들 대부분이 누군가의 집에서 나온 것들이라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매력적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이런 접시를 사용하는군’, ‘카페에서 쓰던 커피잔이 잔뜩 있는걸 보니 근처 카페 하나가 문을 닫았나 보군’, ‘이 집의 애들은 어느덧 훌쩍 커버려서 더는 이런 장난감이 필요 없어졌나 보군’ 하는 식의 사연들도 눈치껏 알게 된다.

한 쪽에서는 작은 공연이 열리기도 하는 등 시장은 이미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이상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
한 쪽에서는 작은 공연이 열리기도 하는 등 시장은 이미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이상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

흥정 대신 협상

도둑시장의 물건은 대형 마트의 물건처럼 정형화된 것은 아니라서 흥정은 기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흥정’은 부르는 족족 물건값이 깎인다거나, 처음에 부른 가격보다 싼 값에 구매하지 못하면 바가지를 쓴 호구가 된다는 그런 식의 흥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개를 같이 내놓았지만 하나만 필요하니 하나만 사겠다든지, 전혀 관련 없는 물건이지만 함께 살 테니 가격을 조금 깎아달라든지 하는 식으로, 일종의 ‘협상’에 가깝다.

물건 상태는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상태인 것부터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까지 무척 다양해 용도에 따라 꼼꼼히 확인하고 구매하는 것이 좋은데 이 역시 흥정의 요소다. 물론 비슷한 품질의 물건일 경우, 대형 마트나 백화점보다는 벼룩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잘하면 뭔가를 덤으로 더 얻을 수도 있다. 실제로 찻잔을 구매하기 위해 열심히 찾아다닌 적이 있는데 커다란 찻주전자를 구매하면 찻잔은 그냥 주겠다는, 아주 적극적인 제안을 받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이야기가 생겨난다

한국의 전통 시장과 리스본의 벼룩시장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에는 분명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형 마트와 전통 시장은 상생하려면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며, ‘어떻게 다른 길을 갈까’ 하는 고민에 대해서는 분명 리스본의 벼룩시장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대형 마트에서는 절대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을 전통 시장에서는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집중할 수 있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애당초 빠르고 효율적인 쇼핑은 어려운 구조다.
애당초 빠르고 효율적인 쇼핑은 어려운 구조다.

대형 마트가 아무리 편리하다 해도 손때 묻은 물건에서만 찾아낼 수 있는 이야기까지 전해주지는 못한다. 누군가에겐 쓸모가 없어져 내다 팔기로 결심한 물건들 더미에서 나만의 보물을 찾아내는 재미 역시 그렇다.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이야기가 생겨나고, 그곳에선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는데 대형 마트에서는 이 부분을 기대하기 어렵다.

고로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당길 수 있는 관광 명소를 만들어내고 영세상인의 살길을 찾는다는 경제적인 논리뿐 아니라 즐겁고 재미난 우리의 일상을 위해서도 전통 시장의 차별화와 활성화는 꼭 필요하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우리만의 전통 시장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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