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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 2017이 마무리됐다. CES는 한 해의 가전과 관련된 기술 트렌드를 볼 수 있는 전시회로, 그 내용이나 규모 면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행사다. 24만㎡에 달하는 광활한 전시장은 3천800여 개 기업이 새로운 제품과 기술들로 가득 채웠고, 어디를 가든 제대로 걸어 다니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참관객이 모여들었다.

CES 전시장 전경
CES 전시장 전경

CES 2017, 기술에서 경험으로 이동하는 가전

이렇게 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드는 이유는 결국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세상은 ‘혁신’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까지 바꾸는 자극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CES를 비롯한 큼직한 행사에 기대하는 부분도 ‘이전에 없던 놀라운 기술’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CES 2017에서는 혁신이라고 할 만한 새로운 기술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나 혁신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기업들은 박수만큼이나 ‘싱겁다’는 말을 따라 들어야 했다.

‘혁신’, 기술 아닌 경험에서 오다

그렇다고 이번 CES가 과연 ‘맹탕’이었을까? 2017년 CES의 가장 큰 흐름은 기술이 어떤 형태의 가전을 입고, 우리 생활에 들어오느냐에 대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기술만으로 접근한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선보였던 자율주행 자동차, OLED 디스플레이, 드론, 사물인터넷 등의 기술을 고스란히 다시 선보였다. 작년에 봤던 것과 거의 비슷한 제품들이 부스를 채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각 기술은 성숙기에 진입하고 있다. 성장 속도가 더뎌간다는 의미로 쓰이는 성숙(mature)이 아니라 기술이 제 옷을 찾아 입고 실제 소비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수준으로 익어간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자율주행 차량은 실험실에서, 혹은 철저히 통제되는 기술이 아니라 관람객을 태우고 달릴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자율주행 관련 컴퓨터는 손바닥 크기로 축소되었으며, 어떤 자동차 제조사든지 가져다 쓸 수 있는 플랫폼이 됐다.

더불어 새로운 기술보다는 각 기술이 더 재미있게 표현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드론이나 가상현실은 기술보다도 더 쉽고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들이 고민됐다.

가상현실 기기 체험
가상현실 기기 체험

OLED TV는 이제 명암 표현이 확실해진 HDR[footnote]High Dynamic Range[/footnote] 기술이 표준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프리미엄 소비자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오랫동안 거실 가전 시장의 숙제였던 홈 네트워크, 스마트 홈은 아마존 에코와 구글 어시스턴트 등 음성 인식 비서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드론 역시 기술은 더 정교해지고 가격이 내려가면서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전시된 드론들 사이로 미국 연방항공국(FAA)이 부스를 열고 안전과 규제 등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는 기술의 발전보다 드론의 활용에 대해 사회적인 고민이 이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론 안전에 대한 상담을 해주는 FAA
드론 안전에 대한 상담을 해주는 FAA

우리 생활을 에워싼 가전들이 이제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적절한 시나리오들을 토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그림들이 CES 곳곳에서 선보였다. 새롭고 비싼 기술이 아니라, 이제 서로 협력하고 표준과 개방을 통해 기술을 완성해 나가는 게 2017년의 기술 트렌드다. 포드와 아마존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자율주행 자동차

여전히 CES에서 가장 주목받은 주제는 스스로 운전하는 자동차다. 널찍한 CES 전시장 중에서 북쪽 전시관은 마치 모터쇼를 방불케 할 만큼 자동차 관련 부스로 가득 채워졌다. 하나하나 이름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중요한 것은 자율주행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느냐다. CES에 자율주행 차량이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게 2014년의 일이다. 목적지까지 스스로 주행하고, 주차까지 알아서 척척 해내는 마술 같은 차량이 소개됐지만, 이는 그저 ‘기술’일 뿐이었다.

현대자동차는 개막 전부터 제한된 미디어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자율주행을 시연했고, 엔비디아는 전시장 앞 주차장에 별도의 코스를 만들어 일반 관람객에게도 차량을 직접 타볼 수 있도록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각 자동차 제조사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차량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BMW의 콘셉트카인 아이인사이드퓨처
BMW의 콘셉트카인 아이인사이드퓨처

BMW는 1월 3일 인텔, 모빌아이(Mobileye)와 함께 콘셉트 차량 ‘아이인사이드퓨처(i Inside Future)’를 발표했다. 이 차량은 대부분 부품을 나무로 만들었고, 실내 분위기도 자동차의 시트가 아니라 거실에 놓은 의자와 비슷한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꾸몄다. 이 차량의 핵심은 전기 모터로 움직이는 차량, 그리고 스스로 운전하는 차량은 당연한 것이고, 실제도 그 기술들이 완성된 이후에 자동차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새 기술이 완성됐을 때 자동차가 공간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차량 안에는 운전과 관련한 부분이 최소화되고 뒷자리에는 콘텐츠를 즐기는 용도의 큼직한 디스플레이가 놓인다. 자리는 조금 더 편하게 배치되고, 각 자리에는 개인용 스피커와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강조된다. 그리고 책꽂이와 잔디까지 놓았다. 딱 이런 차라는 의미보다도 ‘차량이 이동 수단에서 제2의 주거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자율주행 기술에 대한 고민이나 의심보다는 이제 이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기술에 대한 고민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자리가 잡히고 있다는 분위기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BMW 그룹 이사회의 클라우스 프뢸리히(Klaus Fröhlich)는 “2021년이면 안전하고 완전한 수준의 자율주행 차량을 내놓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때가 되면 운전자는 차량에 탈 때마다 운전을 직접 할지, 차량에 맡길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Jen-Hsun Huang) CEO 역시 기조연설을 통해 2020년이면 자율주행 차량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BMW보다도 1년을 더 앞당긴 셈이다. 중요한 건 시점의 문제가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명확히 제품을 내놓을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이 발전했고, 비로소 그 끝이 보인다는 부분이 중요하다. 엔비디아가 발표한 자율주행 차량 BB-8은 실제로 관람객들이 탑승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발전했다.

엔비디아가 발표한 자율주행 차량 BB-8
엔비디아가 발표한 자율주행 차량 BB-8

앞서 BMW가 아이인사이드퓨처를 발표하던 자리에서도 핵심은 언제 차를 내놓겠다는 게 아니라 센서 기술과 반도체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자동차 회사와 손잡고 기술을 다져간다는 점, 그리고 그 기술이 개방과 표준화를 거쳐, BMW 그룹이 아닌 다른 자동차 회사, 그리고 다른 부품 공급 업체들이 필요에 따라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엔비디아도 키노트를 통해 자율주행용 컴퓨터 PX-2를 발표하면서 아우디, 보쉬, ZF 등 파트너십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이 기술이 비단 아우디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덧붙였다.

‘나만의 기술’로 차별화를 꾀하던 업계가 기술을 더 개방하고 끌어안는 표준화를 표방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게 더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차량은 아직도 많은 숙제를 품고 있다. 사고를 내지 않고 달리는 기술은 몇 년 안에 완성된다. 하지만 그건 차량 한 대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법·제도나 보험, 그리고 혼자 굴러가는 차량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을 차량 제조사들이 각각 풀어내는 건 비효율적이다. 결국, 혼란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개발 단계부터 기술을 표준화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업계보다 보수적으로 인식되어온 자동차 업계가 매우 빠르게 흘러가는 기술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비스 플랫폼’의 의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음성 인식으로 완성된 가전 통합

거실은 가정에서 가장 평온한 공간이지만 가전 업계에는 가장 살벌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거실은 가족이 모이는 공간이고, 가장 활기찬 공간이기도 하다. 집 안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이른바 스마트 홈의 중심도 자연스레 거실로 꼽혔다.

소파에 앉아 TV를 만지듯 조명을 조정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로봇 청소기에 청소를 시키는 그림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벌써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기술들은 늘 가전과 관련된 전시회에서 꾸려져 왔다. 남은 문제는 ‘가정의 모든 제어권을 어떤 기기에 줄 것이냐’다.

TV는 그동안 가장 유력한 환경이었다. 화면이 있고, 사람들은 그 리모컨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홈시어터 PC를 비롯해 홈 서버, 심지어 최근의 스마트TV까지 TV를 중심으로 한 허브는 모조리 실패했다. TV가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사이에 사람들의 컴퓨팅 환경은 더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기기가 아니라 서비스가 중심에 올라섰다. 바로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 알렉사 같은 시스템이 그 자리를 차지할 다음 후보가 됐다.

구글 홈과 아마존 에코

사실 이 기술들도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마존 에코, 구글 홈 같은 특정 기기를 통해서 가정에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결국, 기기가 필요했고, 어떤 기기의 형태를 가질 것이냐는 고민에 두 회사가 택한 것은 ‘스피커’였다.

하지만 CES 2017에서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는 그 형체를 완전히 포기했다. 대신 클라우드와 서비스 그 자체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방법을 택했다.

LG전자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 알렉사

LG전자는 냉장고에 알렉사를 품었다. 냉장고에 말을 걸면 음악을 들려주고, 우유를 주문할 수 있다. 아마존 에코 기반의 가전제품이 있다면 냉장고에 말하는 것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오븐을 데울 수 있다. 마당의 로봇 잔디깎기가 동작을 시작하는 시나리오로 LG전자는 큰 박수를 받은 바 있다.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는 자동차에도 들어간다. 목적지를 음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점을 예약하고, 시간에 맞춰 요리를 주문해 놓을 수도 있다.

이는 이 음성 어시스턴트들이 개방형 플랫폼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글과 아마존은 애초 음성 비서를 개발하면서 관련 API를 완전히 개방했다. 가전이나 자동차 업계가 이를 이용해 서비스를 개발하면 알렉사와 구글 어시스턴트가 자연어 인식을 통해 말을 알아듣고, 내부적으로 약속한 명령을 처리해준다.

포드는 자체 음성 인식 서비스인 ‘싱크(Sync)’와 아마존의 ‘알렉사’를 하나의 시스템에 통합했다. 음성 비서 서비스는 기기 간, 제조사 간 장벽을 허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포드의 자체 음성 인식 서비스 ‘싱크’
포드의 자체 음성 인식 서비스 ‘싱크’

가전, 자동차 업계는 이를 이용해서 서비스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럼 순식간에 높은 수준의 음성 인식 서비스를 갖게 된다. 또한 ‘브랜드’라는 장벽도 허물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스마트홈 솔루션을 이용하려면 집안의 모든 가전을 삼성전자로 맞추는 게 그동안의 불문율이었다. 심지어 몇몇 제품은 출시 연도까지 맞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제3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구글이나 아마존의 플랫폼을 이용하면 제조사나 브랜드와 관계없이 통합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

음성 인식 시스템의 발달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2011년부터 애플의 시리를 통해 음성 인식 기술에 대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계와 이야기하는 게 어색할 뿐, 기술적으로는 일정 수준에 올라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존의 알렉사나 구글 어시스턴트가 CES 2017을 통해 선보인 것은 또 하나의 음성 인식 기술이 아니라 음성 인식을 기반으로 어떤 옷을 입고,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등 여러 고민에 대한 답이 되었다.

반도체, 제2의 전성시대

결국 CES의 궁극적인 목표는 가전제품이 더 똑똑해지는 것이다. 가전 업계는 여전히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습관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알아서 움직이는 가전제품을 만드는 오랜 숙제를 풀어가고 있다. 가전제품이 똑똑해지려면 결국 그 자체로 하나의 컴퓨터가 되어야 한다. 반도체 기술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다.

그럼 이제까지는 컴퓨터가 없어서 똑똑한 가전을 못 만들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문제는 형태에 있다. PC는 그동안 가전의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더 멋진 디자인을 고안하기도 했고, 몸집도 줄여봤다. TV보다 예쁜 일체형 PC도 나왔다. 하지만 가전은 가전이고, PC는 PC였다.

모바일을 통해 성장하기 시작한 저전력, 소형 프로세서들, 그리고 낸드 플래시 메모리 등의 기술은 손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TV에 더해지기도 했고, 냉장고에 들어가기도 한다. 전기밥솥이나 세탁기에도 들어간다. 로봇 청소기는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로봇이다. 이 제품들에는 결국 스스로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센서와 환경을 받아들이는 딥러닝, 그리고 이를 모두 제어할 수 있는 프로세서가 필요하다.

자동차 업계가 자율주행을 완성하기 위해 인텔이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가전 업계가 스마트 가전을 위해 반도체 계약을 늘리는 건 단순한 현상은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의 상황을 돌아보면 입장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간 스마트 가전을 요구했던 건 반도체 업계였다. 반도체를 쭉쭉 빨아들이던 PC는 성장 정체에 이르렀고, 스마트폰 이후 폭발적인 컴퓨팅의 성장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스마트TV는 그 답을 못 주었고, 다른 가전도 마찬가지였다. 가전 업계가 컴퓨팅을 품어야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분위기는 달라졌다. 소비자들에게 음식 보관 잘하는 냉장고나 빨래 잘하는 세탁기는 이제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근본적으로 가전제품이 나오기 시작한 이유, ‘내가 할 일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본질에 손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가전 산업이 새로운 서비스와 플랫폼을 원했고, 처리할 일이 늘어날수록 더 성능이 높은 반도체와 더 많은 메모리를 요구하게 된다.

CES 2017은 딱 그 흐름을 보여주었다. 인텔과 엔비디아, 퀄컴은 전시장에서 가장 빛나는 회사들이었고, 전시장 어디를 가나 이 회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컴퓨터, 그 오랜 꿈이 냉장고를 통해, 자동차를 통해 만들어진다. 바야흐로 가전의 발전은 반도체의 전성시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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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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