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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그에게서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잠망경 제11호(2014. 11)에 실린 ‘이내창 이후의 세월호, 세월호 이후의 이내창’ 기사의 후속 기사입니다. 앞선 기사를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으면 더 좋습니다. (편집자)

가을비 내리는 주말 오후 광화문 광장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손에는 DSLR 카메라가 들려 있다. 그는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며 1인 시위하는 학생을 찍고 나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농성장 곳곳도 찍는다. 유가족들은 그런 그가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는다.

광화문

#1. 노용헌, 매일 세월호를 찍는 사람

그는 매일같이 광화문 광장에 나와 사진을 찍는다. 2014년 4월 30일 덕수궁 대한문에서 처음으로 세월호 촛불문화제가 열린 날부터 지금까지, 회사 일로 출장 갔던 며칠을 빼고는 하루도 거른 날이 없다. 휴가는 떠나지 않았고 명절도 광화문에서 지냈다.

2014년 7월 14일 세월호 유가족이 광화문에 천막 농성장을 설치할 때도,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46일간의 초인적인 단식 투쟁을 할 때도, 특별법이 통과되던 때도, 올해 1주기 경찰의 물대포와 캡사이신이 유가족을 향할 때도 그는 광화문에 있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내창이 형이 죽었대” 

1989년 여름, 스물한 살의 그는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의 한 도금공장에 있었다. 운동권 대학생이 방학이면 농촌으로, 공장으로, 빈민촌으로 들어가 연대활동을 펼치고 경험을 쌓던 시절이었다. 사진을 전공한 그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사진에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도금공장에서 ‘공활(공장현장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공활 시작한 지 2주쯤 지난 8월 15일, 그는 여느 때처럼 새벽 6시부터 출근해 화학약품이 만들어낸 연기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발암물질들이 널려있어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정이다.

“널 찾는 전화가 왔어.”

누굴까. 무슨 소식일까. 수화기를 받아든 그의 귀에 꽂힌 말,

“내창이 형이 죽었대.”

이내창(1962년 ~ 1989년, 출처: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온라인 사진전) https://flipboard.com/@keebaek/25%EB%85%84%EB%A7%8C%EC%9D%98-%ED%95%B4%ED%9B%84%2C-%EC%9D%B4%EB%82%B4%EC%B0%BD-%EC%82%AC%EC%A7%84%EC%A0%84-naechang.kr-8ljkf0g9y

이내창(1962년 ~ 1989년, 출처: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온라인 사진전)

내창이 형. 이내창.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예술대학 두 학번 위 선배. 내리의 조그마한 막걸릿집에서 함께 술 마시고 세상을 이야기하던 사람. 예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사랑한, 그래서 늘 예술 앞에 사회를 두던 사람. 같은 예술관을 공유한 예술 활동가. 로맨티시스트. 그런 내창이 형이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황망함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그는 거문도로 달려갈 수 없었다. 한 달이라는 일수를 채우기 전에 공장을 나올 수는 없었다. 2주를 더 보내고 8월 30일에야 학교로 향할 수 있었다. 개강 이후 한겨레에만 짤막하게 보도된 이내창의 죽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전국으로 뛰어다니는 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10월에야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행렬에서 그는 ‘각목조’였다. ‘풍물조’와 ‘운구조’ 사이에서 각목 들고 경찰로부터 운구를 지키는 조. 경찰이 의문사한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노용헌 그의 이름은 노용헌, 중앙대 사진학과 88학번이다. 선배를 떠나보낸 노용헌은 1995년부터 기자가 되어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7년을 한 회사에서 일하다 관두고, 대학원을 다녀오거나 다른 매체에서 일하다 2011년에 다시 처음의 회사로 돌아왔다.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 이내창추모사업회(이내창기념사업회의 전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게 마음의 빚이 됐다.

세월호에서 이내창을 보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비극의 시간. 그는 직장에 있었다. 언론사의 특징상 사내에는 여러 뉴스채널을 보여주는 TV들이 줄지어 있다. 미디어가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끔찍한 소식들과 한국 언론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그 최악의 오보를 노용헌은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당장 진도로 내려가지 못하는 처지의 스스로가 무력했다.

그는 세월호에서 이내창을 봤다.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한 의문사야.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하라고 계속 구호를 외치는데, 25년 전과 지금이 내 머리 속에서 계속 중첩되는 거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도 같았고, 후배-유가족들이 전국으로 사건을 알리려 뛰어다녀야 했던 것도 같았다. 25년 전 이내창을 무력하게 잃은 노용헌에게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상이었다.

처음 광화문에 나온 얼마간은 유가족과 거리를 뒀다. 그냥 꾸준히 나왔다. 그러자 유가족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 가까워졌다. 그런 뒤에야 그는 유가족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술관 때문이다.

“뉴스에 앞서 휴머니즘이 있어.

사진가의 주제의식을 위해 교감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피사체를 촬영하는 것은 도둑질이지.”

그는 자기 사진에 저작권이 없다고 말한다. 사진의 주인은 찍은 사람이 아니라 찍힌 사람이라는 것이다. 26년 전 안성 내리의 그 막걸릿집에서 이내창과 대화하면서 형성한 예술관이다.

1년간 찍은 사진은 책으로 묶어 독립출판했다. 220페이지. 페이지 수 대신 날짜를 적어 넣었다. 책은 딱 한 권만 냈다. 그는 이 책을 ‘예은 아빠’ 유경근 씨에게 선물했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친해졌다. 노용헌은 세월호 투쟁이 3년은 가지 않겠냐고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3년상을 치르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세월호가 끝날 때까지는 찍어야겠지.”

#2. 조환준, 진실을 찾는 사람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 길 건너에 평화신문사가 부대끼고 창문 너머로 명동대성당이 내다보이는 이곳 빌딩 9층에 한 사람이 앉아 서류 뭉텅이를 살피고 있다. 그의 이름은 조환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86학번이다.

그의 머리 위로는 ‘피해자 지원 점검과’라는 안내패가 걸려있고, 뒤로는 피해자들의 신청을 기다린다는 노란색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곳은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사무실, 조환준은 특조위의 조사담당관이다.

2015년 5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모습. 정부 지원을 못 받아 제대로 된 조사활동을 시작조차 못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883186.html

2015년 5월 6일 오후 서울 중구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정부 지원을 못 받아 제대로 된 조사활동을 시작조차 못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특조위 출범하기까지 참 어려웠다. 특별법 제정, 시행령, 위원 구성, 사무처 직원 구성, 예산 지원. 그 모든 과정을 거쳐 2015년 8월에야 제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조사담당관으로 발령된 것은 2015년  7월 27일.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한여름 날의 지친 공기를 호흡했다. 그저 진실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이 이렇게 이루기 어려운 것인지, 위원장과 위원들은 정부와의 싸움에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 할 일을 묵묵히 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죽음, 하지만 찾아가지 못했다

1989년 8월 15일, 조환준은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군인이었다. 87년 12월에 입대해 14박 15일의 상병 정기휴가를 나와 있었다. 15일은 휴가의 절반을 돌던 날이었다. 즐거운 휴가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부산까지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차였다.

씻고 방바닥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저녁 아홉 시였다. 뉴스가 흘러나왔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씨가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귀를 후비고 다시 들었다. 하지만 브라운관은 같은 소식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내창이 죽었다.

조환준은 대학에 입학한 첫해 캠퍼스에서 수차례 마주친 강렬한 인상의 한 청년을 기억한다. 군데군데 물감 묻은 건빵 바지, 다 헤져버린 국방색 야상, 색이 바래가는 흰색 모자, 그리고 모자 사이로 삐져나와 숨길 수 없는 단발의 곱슬머리. 2학기에 동문회 가는 대성리행 기차에서 그 청년을 마주쳤다. 그보다 다섯 해 전에 먼저 모교인 중동고를 졸업한 선배라고 했다. 그가 이내창이었다.

출처: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온라인 사진전

출처: 25년만의 해후, 이내창 온라인 사진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둘은 금세 친해졌다. 뒤늦게 학생운동에 입문한 조환준에게 “데모 잘하는 것도 좋은데, 필요하면 문학으로 (사상을) 풀어보라”고 권한 것도 이내창이었다. 정작 자신은 총학생회장이 되어 ‘침묵하는 학우들을 세 번씩’ 만나느라 조소에 매진하지 못했으면서. 그랬던 이내창이 죽었다.

조환준은 다음 날 학교로 향했다. 혼란, 어수선함, 착잡함 같은 감정들이 뒤섞였지만, 그는 여수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신분의 제약 탓이었다. 죽음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며칠 뒤 그는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전화 한 통 하기 어려운 강원도 원통에서 군 생활한 조환준은 90년 3월 말년휴가를 나와서야 죽음의 진실을 알았다. 뒤늦은 분노가 응어리져 가슴 속에 쌓였다. 이후 그는 93년 말까지 학생회 활동에 몰두한다.

인생 2막, 민간조사관이 되다

조환준 씨는 졸업하고 광고기획사에 다니다 98년도 외환위기 사태 때 떠밀리듯 해고됐다. 마음도 몸도 차가웠던 그해 겨울, 그는 여의도 국회 앞 천막 농성장을 찾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가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이곳엔 이내창추모사업회도 있었다.

422일에 걸친 유가협의 투쟁으로 2000년 10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출범했다. 조환준은 12월부터 이곳의 민간조사관이 됐다. 인생 2막이 시작된 것이다. 뒤틀린 과거의 편린을 긁어모아 진실을 현재에 드러내는, 승산이 적어 보이는 싸움에 조환준은 기꺼이 뛰어들었다.

1기 의문사위는 반쪽짜리 성과만을 냈다. 이내창의 죽음도 규명해내지 못했다. 정보기관은 불협조로 일관했다. 하지만 89년도 당시에 수집한 것들보다 더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1기가 끝나고 조환준은 마음속에 되새겼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 가자.”

밝히고 또 밝히다 보면… 

이후 민간조사관 한 길을 걸어왔다. 2006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이곳에서는 이내창 사건을 직접 다룰 수 있었다. 2011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거쳐 마침내 특조위에 다다랐다.

세월호 진상규명이 금방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의문사위부터 지금까지 특별 조사기구가 왔잖아, 마치 내가 걸어온 인생처럼. 보니까 정부 부처에서도 이것들에 대한 대처 노하우가 좀 생긴 것 같아.”

법과 예산을 쥐고 흔들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마냥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가용한 무기는 전부 다 써볼 계획이야.”

조환준에겐 믿음이 있다. 진화위에서 이내창 사건을 다룰 때 그 믿음의 근거를 봤다.

“같은 사건을 계속 다뤄도 과거에는 부각되지 않은 사건들이 조금씩 나오더라고. 나 말고 누가 또 하면 그런 게 또 나올 거 같아.”

세월호도 그럴 것이다. 밝히고 또 밝히다 보면 모든 진상이 규명될 것이다. 그는 오늘도 서류 뭉텅이를 뒤적거리고 있다.

세월호. 일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3. 다시 한 해가 간다

노용헌에게 물었다. 이내창이 죽지 않았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으냐고.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지.”

조환준에게 물었다. 이내창이 제시한 길을 걸어온 것이냐고.

“부정할 수는 없지.”

한 사람의 죽음은 때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꿔놓는다.

오늘도 노용헌은 광화문 광장에 있을 것이고, 조환준은 특조위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오늘도 세월호 유가족은 광화문 광장에 있을 것이고, 특조위 활동을 보장하라며 싸우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 해가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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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버드나무
초대필자. 대학생

중앙대학교 독립언론 '독립저널 잠망경'의 필자다. 두산 인수 직후인 2009년에 입학해 지금까지 세 번의 구조조정, 세 번의 천막농성, 두 번의 총장실 점거를 경험했다. 8차 학기를 마쳤지만 졸업은 여전히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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