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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사를 위한 인지언어학 18: 의미의 문법과 정신공간

지난 시간 우리는 시사만화 [장도리]를 통해 다양한 개념들을 순식간에 혼합하여(blending)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을 확인했습니다. 개념을 엮어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만화와 같은 시각 미디어 뿐 아니라 언어의 특징이기도 하죠.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인지언어학은 의미가 작동하는 방식에 큰 관심을 두는데요. 이 점에서 개념적 혼성이론(conceptual blending theory)은 형식(form)에 주로 관심을 두는 전통적 학교문법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형식이 아닌 ‘의미의 문법’을 지향하는 것이죠.

형식 중심의 전통 문법 예시

학교문법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영어의 타동사 문형을 S+V+O(주어+동사+목적어)로 기술합니다.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고 그다음에 목적어가 따라온다는 규칙이죠. 하지만 “S+V+O”라는 도식은 그저 형식을 제시할 뿐, 주어와 동사, 그리고 목적어의 의미적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다음을 봅시다.

[box type=”info”]
The boy broke the window.
(소년은 창문을 깼다.)

The document supported his opinion.
(그 문서는 우리의 의견을 뒷받침했다.)
[/box]

위의 예시에서 “The boy”와 “The document”는 모두 문장의 주어입니다. 하지만 이 두 명사구가 맡은 의미 역할은 전혀 다르죠.

“The boy”의 경우 창문을 깬 사람으로서 실제 행동을 한 주체(agent)이지만, “The document”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라면 문서 스스로가 자기를 설명함으로써 그의 의견을 뒷받침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문서를 읽고 이해한 주체는 “his”로 표현된 ‘그’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다음과 같은 “형용사+명사” 구문입니다.

[box type=”info”]
the safe distance
(안전한 거리)

the tall building
(높은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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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문법에서 위의 두 예문은 모두 “한정사+형용사+명사”로 이루어진 명사구로 분석됩니다.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형용사와 명사의 관계를 살피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위에서 거리(distance) 자체가 안전한(safe) 것은 아니지만, 건물(building)은 그 자체로 큽니다(tall). 똑같은 형식일지는 모르지만, 의미의 구조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상 두 가지 예는 형식적 기술이 포착하지 못하는 의미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의미의 구조: 정신공간(mental space)

개념적 혼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정신공간(mental space)의 개념을 살펴봅시다. 정신공간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은 인지언어학자 질 포코니에(Gilles Fauconnier)입니다.

질 포코니에(위키백과 공용)와 그의 저서 [Metal Spaces)
질 포코니에(위키백과 공용)와 그의 저서 [Metal Spaces)

그는 조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데요,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언어학으로 또다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 때문인지 그는 언어의 역동적 의미를 설명함에 있어서 논리적이며 수학적인 체계를 발전시키려 애씁니다. 그의 노력의 결실은 1980년대 중반 정신공간(mental space)이라는 이론으로 세상에 나오고, 개념적 혼성이론의 기초를 이루게 됩니다.

아래 예문을 통해 정신공간의 개념을 살펴보죠.

[box type=”info”]
In my dream, I am a film director.
(꿈속에서 나는 영화감독이다.)

In 1985, his theory was still in its infancy.
(1985년에 그의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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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장에서 “In my dream”은 하나의 정신적 공간입니다. 제가 만약 “I am a documentary producer”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앞에 “In my dream”을 붙이면 진실한 문장이 됩니다. “In my dream”으로 하나의 정신공간을 열었고, 이 속에서 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두 번째 문장에서 “In 1985”도 하나의 정신공간입니다. 이 경우에는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특정한 시기, 즉 1985년이라는 시간이 하나의 정신공간을 형성합니다.

포코니에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수많은 정신적 공간들이 상정되고, 이들의 구조가 만들어지며, 또 연결된다고 주장합니다.[footnote]포코니에, 1994, p.37[/footnote] 이렇게 새로운 정신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요소를 ‘공간 형성자(space builder)’라고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in my dream”이나 “in 1985”와 같은 다양한 전치사구, “possibly”나 “theoretically” 같은 부사, “Younghee believes”와 같은 “주어+동사 결합체” 등이 있습니다.[footnote]포코니에, 1997; 임지룡, 2000, p.39에서 재인용[/footnote]

담화 내에서 “Possibly”를 쓰는 순간 ‘추측’의 정신공간이 열리는 것이고, “theoretically”를 쓰면 ‘이론의 세계’라는 정신공간이 열리며, “Younghee believes”라고 말하는 순간 “영희가 믿는바”라는 정신공간이 열리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정신공간이론의 기본 가정은 담화 내에서 정신공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의미가 생성되고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명사구, 동사구, 전치사구 등 다양한 구조적 요소들이 문법 규칙에 따라 결합하듯이 말이죠.

문장 형식의 경우에는 구조주의 언어학과 변형생성문법을 거치면서 그 규칙이 상세히 기술되어 왔지만, 의미 생성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인지언어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8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식이 아닌 “의미의 문법”이 태동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사는 “어디까지가 주어인가?”와 같이 구조를 묻는 질문을 넘어 “이 문장에서는 어떤 정신공간이 열렸는가?”, “이 상황에서 왜 추측의 정신공간이 열려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box type=”note”]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필자)[/box]

참고문헌

  • 이기동 편저 (2000). [인지언어학]. 한국문화사 (Fauconnier, G. (1994), Mental Spaces: Aspects of Meaning Construction in Natural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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