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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다. 몇 해 전부터 아이는 랩을 아주 좋아해 즐겨 듣기도 하고 곧잘 부르기도 한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중얼중얼 알아듣기 힘든 가사를 쉴 새 없이 읊조릴 때는 엄마아빠 귀에 소음공해로 들린다. 유별난 줄 알았더니 또래 중에 랩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랩 좋아하는 아들 지켜보는 ‘복잡한’ 마음

그렇게 랩을 좋아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복잡하다. 속사포처럼 가사를 내뱉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한데, 아이가 즐겨듣고 부르는 랩의 가사를 유의해서 들으면 걱정이 커진다. 욕설이 들어있지 않는 노래를 찾기 힘들고,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험한 말들도 가득하다. 대부분이 남성인 래퍼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해 부르는 노래도 흔하다.

‘플렉스(FLEX)하다’[footnote]플렉스(Flex): 1990년대 미국 힙합 문화에서 래퍼들이 부나 귀중품을 뽐내는 모습에서 유래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다, 뽐내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음.[/footnote]라는 유행어로 통하는 소비지향의 가사들도 요즘 랩의 두드러진 점이다. 온갖 명품 브랜드나 값비싼 차 이름이 랩 가사에 줄줄이 등장한다.

기리보이는 “나랑 같이 쇼핑 가자 용돈 갖고 와. F.L.E.X 질투와 시샘 받으면서 우리 멋있어지자”(flex)고 외치고, 심바 자와디는 “난 원했어 Rolex 원했어 Rolex yeah”(Rolex)라고 외친다. 슈퍼비는 “날 욕해도 원해 내가 되길, 왜냐면 내 차는 마세라티 너넨 라세티”라고 조롱하며 “내 몸에 지폐향 flavor”(+82 Bars)를 자랑하기도 한다. 덕분에 아이도 명품을 줄줄 외운다.

이렇다보니 아이가 마음껏 랩을 듣거나 부르도록 내버려두긴 힘들 게 됐다. 호기심에라도 ‘19금’ 딱지가 붙은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않도록 약속했고, 뮤직비디오나 래퍼들이 만드는 유튜브도 마음대로 보지 않기로 했다. 랩 가사에 따라서, 래퍼의 행실에 따라서 혹은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잘한 제약과 약속들이 갱신되기도 한다.

랩 래퍼

‘랩알못’도 흥미로운 [고등래퍼]

이런 상황에서 아이와 함께 별다른 제약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대상으로 서로 합의한 게 바로 엠넷(Mnet) [고등래퍼]다. 고등학생들이 만들어 방송에서 부르는 노래 가사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생각과 예전 우승자 김하온이 고등래퍼에서 보인 심성과 태도가 인상 깊었던 것도 합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매주 아이와 함께 보게 된 [고등래퍼4]는 ‘랩알못’인 내가 보기에도 꽤 재밌다. 예비 고1부터 고3까지의 출연자들을 보며 내 아이의 몇 년 뒤를 그려보게 되고, 아이가 자신의 꿈을 향해 뜨거운 열정으로 노력하는 출연자 형들을 본받았으면 싶기도 하다. 영어가 수두룩한 랩 가사를 외울 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함께 멋진 무대를 만들 때는 성인들의 경연을 보는 것과는 다른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고등래퍼

명품 광고장이 된 고등래퍼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게 된 경우가 몇 차례 있다. 가장 크게 놀란 건 멘토인 성인 래퍼들이 명품 로고가 선명하게, 그것도 옷 전체에 가득 새겨진 점퍼와 바지 등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방송 화면에 등장한 것을 보고서다. 카메라가 출연자를 클로즈업할 때면 그가 입은 옷의 명품 로고가 화면 전체를 거의 다 뒤덮고도 넘칠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1. 간접광고라면? 방송법 시행령 위반 

방송이나 광고에 대해 문외한은 아닌데 어떻게 저런 장면이 가능한지 도무지 모르겠다. 만약 저들이 입고 나온 옷이 간접광고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방송법 시행령 위반이다. 간접광고로 노출되는 상표 등의 크기가 화면의 1/4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반 여부를 떠나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에 저런 명품 광고를 하는 게 말이 안 된다.

멘토들이 입은 명품옷으로 화면을 '도배'한 고등래퍼 (출처: 고등래퍼 화면 갈무리)
멘토들이 입은 명품옷으로 화면을 ‘도배’한 고등래퍼 (출처: 고등래퍼 화면 갈무리)

2. 출연자가 입고 나왔다면? 방송심의규정 위반 

만약 출연자 각자가 알아서 입고 나온 경우라면? 방송심의규정에서는 ‘방송은 상표를 과도하게 부각하는 등 시청 흐름을 방해하거나 광고효과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며 ‘프로그램의 특성이나 내용 전개 또는 구성상 불가피한 경우에는 예외’로 정하고 있다.

저 정도의 노출이 과도하게 부각된 게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방송 구성상 불가피한 경우라 할 수 있을까. 굳이 고등학생의 프로그램에 명품 옷을 자랑하며 입고 나온 래퍼나 그걸 그대로 화면 가득히 보여준 방송이나 이미 ‘꼰대’가 된 탓인지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다.

“급식들” 반복, 프로그램 취지와 맞나 

이밖에 멘토로 나온 래퍼 염따가 경연 참가자들을 지칭하며 서슴없이 “급식들”, “급식답다”라는 따위의 말을 반복하고 그대로 방송한 것도 불편하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초·중·고 학생들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을 ‘세상에 외치는 10대들의 이야기’를 내세운 프로그램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방송한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고등래퍼]는 ‘15세 시청’ 딱지가 붙었지만 적지 않은 초등학생들도 보는 게 현실이다. 랩을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한다면 [쇼미더머니]까지 챙겨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제작하라는 건 아니다. 다만, 청소년을 주인공이자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라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 좋겠다.

“플렉스했지 뭐야”가 유행이고 문화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굳이 방송이 청소년에게까지 조장할 필요는 없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등래퍼가 멘토들의 힙합 레이블에 들어갈 또 다른 ‘(곧 성인) 래퍼’ 한 명을 발굴하는 프로그램이기보다는 힙합 문화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 된다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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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민언련이 기획한 [시시비비] 칼럼으로 신문, 방송, 포털, SNS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한 각 분야 전문가의 글입니다.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는 박진형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입니다. (민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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