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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서울비 님이 학교에서 느낀 하루하루의 깨달음, 학생들과 함께 배워가는 그 시간과 풍경을 ‘학교 이야기’에 담습니다. (편집자)[/box]

3월 모의고사를 치른 다음 날 밤, 우리 반 칠판이 서낭당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아이들의 사과문. 우리 반이 영어 꼴등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인용하며, 아이들이 칠판 가득 “선생님, 죄송해요.”라고 적습니다.

서울, 2015. photy by rosapark
rosapark, 무제, 서울: 2015.

– 송구하옵니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모의고사 죄송해요. 앞으로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세요.

– (우리에 대해?) 섭섭한 섭쌤.

– 이런 점수로 밥을 먹다니 저는 쓰레기예요.

– 쌤 죄송해요. ㅠㅠ 이번에 진짜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ㅠㅠ

– 영어 선생님이 담임이신데 영어 꼴등이라니 참으로 죄송스럽사옵니다.

– 영어 꼴등 죄송해요.

– 모의고사 성적ㅋ 죄송해요. 공부만 하겠습니다. 근데요 정말 .. 뒤에 서 계시면 집중이 안 돼요. 죄송해요.

– 선생님 많이 죄송해요. 앞으로 공부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ㅠㅠ

– 저두요 쌤

– 22222

– 많이 죄송해요. 영어 선생님이 담임일 자격이 없어요.

애들이 시험 못 봐서 어디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려나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성적 때문에 움츠러든 우리의 아이들이라니, 참교육은 어디 있느냐고 통탄할 타이밍도 아니죠. 사실 성적이 이미 중요한 환경에서 ‘너는 왜 성적 때문에 속상해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가볍게 던지는 말은 이미 입시를 통과한 성인의 기득권을 말할 뿐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난장은 속상한 마음을 달래달라고, 그래서 살풀이의 형식을 빌려 흰백색 보드 위에 흐르듯 써내려 간 아이들의 춤사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쁜 기운을 없애고 다시 의자에 앉기 위한 어떤 의식처럼 느껴졌어요.

알코올 냄새나는 마커들의 자욱들, 그 정신 사나운 그림을 전방에 두고 줄을 맞춰 다시 자리에 앉아 스걱스걱 펜으로 아이들이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을 때 대단히 대조적인 무언가가 교실에 동시에 있었습니다.

넌 누구니? 충성 맹세로 답한 아이들 

그리고 지난 방학 아이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이메일을 부탁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거의 어김없이 포함되었던 내용이 있었는데요. 그건 지난 자신의 나태함을 꾸짖으며 새로운 학기에는 학업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이었죠.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였는데 말이죠!

The Wandering Faun, CC BY SA https://flic.kr/p/hYRRtx
The Wandering Faun, CC BY SA

– 저 진짜 2학년 때는 진짜! 후회 없게 공부해보려고 해용! 3월모의고사 잘 못봐도,,,, 너무 뭐라고하진말아주세용…… ㅠㅠ힝ㅜㅜ열심히하겠습니다ㅠㅠㅠㅠㅠ

– 저는 그저 즐거움에 빠지고 나태해져 정작 중요한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합니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좀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 다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책을 많이 읽어도 글쓰는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 나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었지만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글쓰기 수상 경력이 현저하게 줄더군요.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에 햇살을 받으면서 오만과 편견을 읽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 보면 어린 것이 참 팔자가 좋았었네요.

–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많이 속상했고, 제가 하는 공부법이 맞는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힉년 때는 이런 고민 하지 않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공부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 주말에나 방학때는 학원에 가거나 주로 학교에 와서 자습실에 있는편이에요. 집에 있으면 자꾸 늘어지고 제 자신이 컨트롤이 잘 안되서 학교에 나오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아직은 너무 낮은 제 성적에 대해 2학년때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고 싶어서 요즘은 제 목표나 과목별 계획을 조금 세우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4년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 나라에서 앞으로 살아갈 내가 어떤 어른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좀 더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심오한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 내가 사람들을 대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며, 할 필요도 없는 걱정을 미리 하다보면 집중력이 떨어지곤 합니다. 2학년 때에는 집중력을 높여 공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이틀 밤을 세고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고 공부했던 중학교 때처럼의 간절함이 없어서 1학년 일 년 동안은 공부를 못했다고 말하기 전에 “안”했다고 반성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2학년 때부터는 당연히 아니여야 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도록 노력할께요 !

순서를 바꿔 읽어도 어색하지 않아요. 수십 통 메일을 마치 같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같은 의식을 공유합니다.

‘나’를 좀 보여달라는 정중한 요청에 아이들은 악귀를 물리치느라 바쁜 전투의 흔적들을 내보이며,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충성을 맹세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병사여, 그래서 당신은 누구요? 오늘은 또 하얀 벽에다가 무엇을 휘갈겨 놓았소?

Raul Lieberwirth, "shouting in the storm", CC BY-NC-ND https://flic.kr/p/7Gn1FX
Raul Lieberwirth, “shouting in the storm”, CC BY-NC-ND

병사가 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애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너희들은 규정되지 않는다.

너는 너다.

너인 너를, 사귀며 우리 한 해 동안 잘 만나자.

나는 나인 나로서만 너를 지켜볼게.

전쟁 같은 공부도 중요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춤 말고, 그냥 훌라춤 같은 걸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출 때 그런 장면에 너 많은 ‘너’가 담겨 있고 그것에 관해 더 자주 이야기할 수 있어야 건강해진다.

건강하고 즐겁고 솔직한 한 우리로 만나보자.

 

우리는 장애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질병의 경험을 건강의 담론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모든 인류는 질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며, 노인이 되면 결국 ‘장애’라고 공인될 정도의 몸 상태로 변화한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일탈’이라고 규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자기 몸을 긍정할 순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푸른숲, 2010년,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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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그렇다면 선생님들은 병사들의 지휘관이 되는게 맞을까요, 종군기자가 되는게 맞을까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해법이 공부라고 알고있는 병사들을 돌려보낼곳도 없는거 같아요. 지금 시대에 교사처럼 어려운 직업이 없는것 같습니다.

  2. 지휘관과 종군기자라니 딱 맞는 비유인 듯 합니다. 전쟁 가운데에서 당장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나,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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