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사회 » 세 가지 프리즘: 여성에 대한 일상적 억압에 관하여

세 가지 프리즘: 여성에 대한 일상적 억압에 관하여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이다.

“일상 속에서 성 평등이 실현되는 세상” 

1911년에 제2인터내셔널에서 시작하여, 오랜 시간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억압받고 제한받아 온 여성의 자유와 참정권, 인권 등을 생각하는 의미의 행사로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몇몇 국가들에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행사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대개 처음의 뜻을 이어가는 중이다.

올해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는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집회를 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한국사회에서 공론의 영역에 든 지도 짧지는 않으나, 2013년 한국의 성평등보고서에 따르면 특히 의사결정과 안전 부문에서 성평등 지수는 더 저조한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집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런 점들을 꼬집으며 성 평등 실현을 위한 몇 가지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상 속에서 성 평등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이었다.

여성 성평등 페미니즘 여성부

“여기를 남자들이 순결이라고 한다” 

일상 속의 여성 억압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친구 중 한 명이 지난 2013년 8월에 사장으로부터 심각한 성추행을 당하고 회사를 그만둔 일이 있었다. 사장은 걸음걸이가 단정치 못하다며 사무실 안에서 친구에게 걷기 연습을 시키면서 등과 배, 허리 등을 만지는가 하면, 허벅지 안쪽이 붙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길 남자들이 순결이라고 한다.”

친구의 집에 남자 어른이 없는 터라 내가 직접 그 사장과 통화하며 확인한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사장은 “곡진히 사과한 뒤 퇴직금과 이달 급여를 지불하겠다”고 내게 약속했지만, 이후 실제로 그가 한 행동에 ‘곡진한 사과’는 없었다.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사장은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뗐으며, ‘오해로 말미암아 불미스런 일이 생긴 것이 유감’이라는 말을 하였다.

남자이면서 연장자인 나와 통화하면서는 비굴할 정도로 자기변명을 하며 사과를 거듭하고, 여자인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 앞에선 그런 식으로 태도가 변하는 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그 사장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단초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 옷차림 트집 잡는 발언 

이런 태도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소식이 불거져 나오면 피해자 여성의 옷차림을 트집 잡는 비열한 발언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범의 처벌 수위 역시 공공연히 문제시되곤 하나, 언제 개선될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하는 행태는 ‘눈만 떴다 하면’ 보일 정도로 많다.

voice-043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제도적 제재를 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듯싶다. 물론 제도에는 인식을 생산하는 기능이 있기에 그것을 우선시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옷에 몸을 맞추는 일이 있다 하여도 맞지 않는 옷은 끝까지 맞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버젓이 그 업종은 성행하고 있질 않은가? 내가 사는 동네에만도 업소가 네 군데나 있다. 심지어 한 블록 건너에 경찰서가 있는데도 말이다. 성별에 따른 차별은 그러므로, 인식의 문제를 검토하는 일이 제도의 입안과 시행 못지않게,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여성 억압의 징후들을 포착하고 여성의 주체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의 스펙트럼이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은 그러한 스펙트럼 상에서 맺힌 결절점들이 다른 이념 정향과 만났을 때 발생한다. 말하자면 다른 이념 정향의 기저를 관류하는 인식의 스펙트럼과 여성에 대한 인식의 스펙트럼이 만나는 지점들이 각기 체계를 구축하여 명세화된 것들이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인 셈이다.

세 가지 프리즘 

사회가 어느 하나의 인식 틀로 설명될 수 없는 만큼, 그와 같은 접점이 발생한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인식 틀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 다른 인식 틀에서 제기되는 문제들과 충돌하기도 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난해에 이어 최근 이재명 시장의 페이스북 포스팅으로 다시금 불붙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논쟁이 그러하다.

해당 책의 저자뿐 아니라 오랫동안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온 윤명숙 박사 역시 공히 지적하듯, 위안부 문제에는 대단히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선 세 가지 프리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압이요, 둘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압이요, 마지막 하나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폭압이다. 이 세 가지 프리즘 중에서 가장 넓게 보는 접근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압이요, 두 번째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압이며, 가장 좁은 시각으로 보는 것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폭압이라고 생각한다.

오해를 피하고자 덧붙이자면, 여기서 좁은 시각이라는 것은 범주의 넓이를 가리키는 의미일 뿐 부정적 뉘앙스로 쓴 말은 전혀 아님을 밝혀둔다.

[제국의 위안부] 논쟁 

이 셋 중 어느 하나만이 부각되었을 경우 나머지 두 가지의 프리즘에서 보는 시각은 뒷방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책 [제국의 위안부]가 이 세 가지 프리즘을 얼마나 균형감 있게 채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각자 읽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셋 중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압이라는 시각이 가장 주된 것으로, 그리고 그다음으로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압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폭압이라는 시각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책에 대한 비판 중 저자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견해는 박노자 교수, 그리고 이재승 교수에게서 보이는데, 이들에 따르면 저자의 논지가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들이 말하는 ‘책임’이란 ‘법적 책임’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이재승 교수는 ‘법적으로 물을 것이 없다면 말할 것이 없다’는 표현을 통해 ‘법적 책임’과 ‘책임’을 동일시한다.

박노자 교수 역시 백인 노예 매매의 진압을 위한 국제협약(1910)을 근거로 일본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이것을 희석시킨다는 이유로 박유하 교수의 논지를 강하게 비판한다.

강덕경 위안부

“내 나이 열여섯. 일본인 선생님의 강요로 가게 된 근로정신대.
고된 노동과 극심한 배고픔에 친구들이 죽거나 미쳐버리던 어느 날.
도망치다 헌병에게 잡혀 그 길로 군 위안부가 되었다오.
서러운 시절, 힘없이 짓밟혔던 우리를 잊지 말아주오.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부디 힘을 모아주오.” – 고 강덕경(1929년~1997년) 할머니의 글과 그림(“배를 따는 일본군”)

일본 vs. 한국 / 국가 vs. 개인 / 남성 vs. 여성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제대로 책임을 묻는 것이라는 견해와 일본에 ‘도의적 책임’을 물으며 ‘입법’이 아닌 ‘국회결의안’을 촉구하는(이것은 2014년 4월 심포지엄에서 저자인 박유하 교수가 내놓은 견해이기도 하다) 견해가 엇갈리는 지점은 어디일까? 앞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이 다른 이념 정향과 충돌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러한 견해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지난 70년대 일본의 우먼리브 운동에서는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와의 관련 속에서 운동주체를 세웠던 이유로, 일본인 위안부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지 못했던 것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구도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도와 충돌하면서 ‘탈국가적 담론 형성’에 도달하지는 못한 셈이다.

제국의 위안부

ㄴㅇㄹ

이와 달리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문제의 줄기를 일본의 공창제에서 찾음으로써,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을 전쟁에 동원된 위안부로서 한 맥락상에 놓은 뒤 그 안에서 있었던 일본인과 조선인 간 차별을 비판한다. 일단 (현재 그어진) 국경을 넘어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의 맥락을 짚고, 이후 ‘국가 대 국가 구도에서의 폭력’을 같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프리즘 채택의 차이가 해결방안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차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다시는 국가 차원의 그러한 폭력, 여성에 대한 그와 같은 폭력이 없게끔 하는 방안은 현재로선 입법이 유일한 방안일지 모른다. 한편,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갖은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반드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는 ‘또다시 국가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이 더 나은 방안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두 견해의 차이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간략히 검토함으로써, 여성주의가 다른 이념 정향들과 부딪치는 양태의 예시를 살펴보려 한 것이다.

일상 속 우리 사회의 성 평등 의식 

이런 양태들은 기본적으로 여성주의라는 프리즘으로 나타나는 인식의 스펙트럼이 다른 이념들의 스펙트럼과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과 어떤 해결방안을 지지하는지가 스펙트럼과 스펙트럼이 만나는 인식의 좌표를 암시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좌표는 일상생활에서 노골적으로 혹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다시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 평등’으로 돌아가 보자. 여성주의라는 프리즘에 비추어 볼 때 우리(한국사회의 대중) 중 대다수의 인식은 어느 정도의 스펙트럼에 위치할까? 이 위치가 곧, 앞서 말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집단적 역량의 차이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연히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기획이 만연하며 이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 성폭력 피해자 여성을 향해 옷차림이나 그 행동을 트집 잡는 비열한 작태가 여전히 쉽게 보이는 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역량은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Romuald Bokej, CC BY SA

Romuald Bokej, CC BY SA

된장녀? 김치녀? 

어떤 이들은 ‘된장녀’나 ‘김치녀’로 불리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며 여성 상위 운운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이런 명칭들은 명예나 경제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남성들에 빌붙으려는 여성들을 가리켜 비꼬는 데 쓰인다. 우선 현실 속에서 그런 여성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설령 그런 여성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한들 이들이 여권신장과 관계가 있기는 하겠는가?

만일 그런 여성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이들은 여성의 주체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전리품화’하는 여성들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여성의 대상화’를 자기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인 셈이다. 따라서 ‘김치녀’나 ‘된장녀’라고 불릴만한 행태를 보이는 여성들은 성 평등이나 여성 상위에 하등 도움되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 본위적 사회의 유지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뿐이다.

무엇보다 ‘김치녀’ 혹은 ‘된장녀’라는 표현 자체가 남성본위 사회의 적반하장격 횡포다.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 

한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집단적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그 사회의 건강함을 가늠할 수 있다는 식의 전망까지는 나는 할 수 없다.

1995년 베이징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했던 ‘여성의 권리가 곧 인권’이라는 제목의 연설은 내겐 무척이나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렇게까지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깊은 이해가 내게 있는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나는 남성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적어도 그 이해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뿌리 깊은 여성억압의 역사가 개선되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줄어들 것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음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질 않은가.

때로는 앞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기존의 다른 시각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인식의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하니 그 충돌 지점들도 다양할 것으로 예상한다.

“남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어떤 경우엔 앞에서 든 예시(우먼리브 운동)처럼 여성주의 의제가 운동주체 형성에서의 한계로 인해 ‘보편적 여성인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성매매 담론에서 성매매 여성의 자발성을 말하는 것이 급진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그러한 예시로 볼 수 있다.

사회가 모종의 인식 틀에 따른 말글로 모두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이상, 나는 어떤 특정한 정향의 이념이 채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엠마 왓슨이 지난해 UN에서 밝힌 바대로 “남녀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고 싶다.

결국, 특정한 이념 정향이란 인식의 아날로그적 차이가 결절을 맺는 지점에서 구축된 하나의 체계다. 그 체계의 외벽이 강고할 때 그것은 이미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여성주의의 근본정신은 논리체계의 그 같은 강고함과 그에 따르는 배제적 담론을 경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던가.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서윤
초대필자. 대중예술인

전산과 전산수학을 공부했다. 만화로 전향한 뒤 카툰과 웹 일러스트레이션, 게임 원화 등을 하며 여러 분야에 촉수를 두고 독학 중이다.

작성 기사 수 : 14개
필자의 페이스북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유)슬로우미디어 | 전화: 070-4320-3690 | 등록번호: 경기, 아51089 | 등록일자 : 2014. 10. 27 | 제호: 슬로우뉴스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발행소: 경기 부천시 소사로 700번길 47 1동 506호 (원종동, 삼신) | 발행일자: 2012. 3. 26 | 개인정보관리/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