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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강사다: 88만원 세대보다 힘든 ‘젊은 교수님’

나는 서른둘,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 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 원, 한 달에 80만 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 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 원 곱하기 8달, 560만 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 수료 때까지 꼬박 메꾼 학자금 대출에서 한 달에 20만 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과 공과금을 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 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고,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 후 전화기를 돌려놓는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 책 읽기 좋아하던 아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많이 읽었다.

책 읽기 좋아하던 아이는 결국 지방대학에 갔다 

내가 살던 서울 강북의 가난한 산 오름 동네에서는 “저 집 아이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면서?”, “밥도 안 먹고 본다던데?” 하는 오지랖 많은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이 항상 있었다. 내 부모님은 그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나도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자주 교보문고에 들러 고심해 고른 책 한 묶음을 내게 건넸고, 나는 그것을 전기구이 통닭만큼이나 반갑게 받아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습관이 수학과 영어 점수까지 담보해 주지는 못했다. 중학 시절까지는 어떻게 버텼으나 수학1, 지구과학, 물리, 화학 등으로 이과 기초 과목이 분화되며 나는 거의 항복해 버렸다. 국어, 역사, 사회 과목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결국, 수능 점수에 따라 꽤 먼 지방 대학교의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내려가며 ‘참 멀리도 간다’ 싶었지만, ‘인문학’이면 아무 대학이면 어떠랴, 하고 말았다.

출신 대학이나 강의하고 있는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아 ‘A대학’으로 하겠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면 행복할 거야’, 막연히 믿었던 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은 할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했다. 4년 내내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업이 많았지만, 한 학기에 하나 이상은 내게 자극을 주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대로 즐거웠다. 공통영어 성적이 여전히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2학기부터 8학기까지 나는 꾸준히 장학금을 받았다.

군대에 가기 전 지금은 내 지도교수가 된 분의 전공 강의를 수강하며, 나는 전에 없던 자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10년 넘게 연구해 이룬 성과를 우리에게 ‘즐겁게’ 이야기했다. 들으며 나 역시 즐거웠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허울이나 허상이 아니라 이렇게 실재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는 “가끔 대학원생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대학원에 가기로 결심하다  

나는 학기 말에 이르러 그의 연구실을 찾아 대학원 진학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대단히 반기며 선배를 한 분 추천해주셨는데, 교수가 전화기를 든 지 10분도 안 되어 대학원생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나는 저서 한 권을 선물로 받았고, 연구실을 나와 그 대학원생과 마주 앉았다. 그는 시내에서 밥을 먹다가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을 시켜 놓고 한 숟갈 먹을까 하던 찰나에 지도교수의 전화가 온 것이고, 그는 수저를 내려놓고 택시를 잡아타고 연구동까지 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 급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 네, 그러시군요”하고 말았다. 그는 내게 와서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고, 몇 가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주고 다시 밥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나는 곧 군대에 갔다.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도교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면, 그는 밥을 먹다 뛰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나는, 다시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내게 새로 쓴 저서 한 권을 줬고, 내년부터 석사생으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마지막 학기에 그가 개설한 전공 수업을 들으며 나는 역시나 즐거웠다.

유일한 걱정은 입학비까지 500만 원이 넘는 대학원 학비였다. 도저히 부모님께 대학원에 갈 테니 지원해 달라, 할 염치가 없었다.

26살,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다 

나는 그 후 대학원생들의 술자리에 한 번 간 일이 있다. 술자리는 시내 치킨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학비가 얼마나 되는지, 생활은 되는지 물었다. 그중 한 대학원생이 조교활동을 하면 등록금이 해결되고 연구 인건비를 받으며 한 달에 40만 원 정도의 용돈이 생길 거라고 했다.

어라… 그러니까 조교로 학교사무실에서 근무하면 등록금이 나오고 교수에게 연구 인건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생긴다는 거였다. 나는 두 생각하지 않고 대학원 입학원서를 썼다.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두 분이 놀라시기 전에 대학원 등록금부터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학부 때의 등록금은 300만 원 정도였는데 1/3 이상 장학금은 빼먹지 않고 받았다.

그래도 나와 동생의 등록금은 아버지가 외벌이하시는 우리 가계에 큰 부담이었을 것이고, 나는 대학원부터 공부에 필요한 돈을 내가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대학원 선배 둘과 한방을 쓰게 됐으니 1년 치 집세 150만 원만 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두말 않고 150만 원을 통장으로 부쳐 주셨다.

2008년 봄, 26살인 나는 그렇게 이 삶을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2. 대학원 조교, 다시 이등병이 되다 

2007년 12월, 대학원 입학이 예정되자 조교실장이 나를 포함한 그 해의 대학원 신입생 셋을 호출했다.

나는 사교성이 없다 

나는 학과사무실에서 함께 신입생이 된 K와 S를 처음 만났다. 둘은 나보다 한두 살씩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어느새 서로 꽤 친해져 있었다. 내가 인사하자 둘은 반갑게 맞아주기는 했으나, 뭔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닌 것을 서로 알았다. K는 술자리를 주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

K: 오빠 내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조용히 밥만 먹을게.

나: 니가 조용하니까 참 좋다.

내가 원체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동기들과의 사이는 애초부터 별로 좋을 수가 없었다.

조교실장은 박사과정생으로 나보다 5살쯤 많았다. 박사과정생인 조교실장이 있고, 그 밑에 박사 석사 과정생들이 조교가 되어 학과 사무실의 행정을 보는 시스템이었다. (학과장이나 직원이 행정을 주로 책임지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러하다.) 조교실장은 조교시스템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5일 오전 8시~오후 6시 무급 근무

그는 우리에게 반드시 조교 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조교 활동을 해야 등록금을 보전받을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기에,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 셋을 무척 당황케 했다. 요컨대 주5일 근무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급근무를 방학 내내, 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싶어서 신입생이 셋이니 로테이션으로 근무하면 안 될지 물었다. 그러자 사무실 소파에 앉아 이쪽을 귀담아듣고 있었던지, 2학기쯤 위의 여선배 하나가 나직이 “쟤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했다. 조교실장은 이것이 대학원의 전통이라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학원 측에서 신입생들에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꽤 긴 시간 동안 훈계가 이어졌다.

공부해라, 얼마나 좋으냐,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대학원 선배들이 어디 있냐, 이런 공간 내주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동기인 K는 자신은 가족과 매번 3박 4일의 휴가를 다녀오니 그때의 근무를 조정해달라고 했는데, 조교실장은 “올해는 못 가는 거지 뭐”하고 무심히 답했다. 학과사무실에서 나온 우리 셋은 모두 짜증이 나 있었다. K와 S는 이게 말이 되느냐고 입을 삐쭉거리며 함께 어디론가 갔고, 나는 자취방으로 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대학원 조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8시에 반드시 문을 열어야 한다 

나는 학교에서 도보로 약 30분 떨어진 곳에 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생 형님 둘, B(30)와 L(28)과 같이 자취했는데, 두 분은 모두 차가 있었고 나는 자전거 한 대뿐이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제안으로 같이 살게 된 것이었다. B와 L 모두 학부 때 적당히 안면이 있는 선배들이기도 했고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그들은 학교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8시 전까지 학교에 올라갈 것이니 아무 차나 골라 타고 같이 가면 되지 않겠느냐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출근 첫날 둘은 8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성격이 조금 부드러운 B를 먼저 조심스레 깨웠는데, 그는 짜증을 내며 돌아누웠다. 그래서 L을 깨우자 그는 어쨌든 나를 8시 5분까지 데려다 주었다.

8시 5분에 사무실 문을 열자 동기 둘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조교실장을 포함한 선배 둘이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왜 늦었는지 내게 물었고, 나는 늦잠을 잤다고 답했다. 걸레를 빨며 잠시 이등병 생활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룸메이트들을 깨우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7시에 일어나 씻고 짐을 챙기고 7시 반에 자전거를 탔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노트북을 들고 눈길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노트북이 박살 나기도 했다. 그래도 8시까지 사무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이등병 시절과 다를 것 없는 신임 조교

사무실 청소는 메뉴얼이 있었다.

문을 열어 소화기로 고정시키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일단 빗자루로 바닥을 ‘잘’ 쓸고, 대걸레를 빨아 와 바닥을 ‘잘’ 닦고, 걸레로 눈이 닦는 모든 곳을 ‘잘’ 훔쳐내고, 교수와 강사들을 응대할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 공문을 확인해 출력해 놓고, 화분에 물을 주고 등등, 지금은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두 배는 더 메뉴얼이 있었다.

8시에 청소를 시작하면 거의 30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 번은 청소하고 있는데 3학기 위의 석사과정생 J가 들어와 이렇게 말한 뒤 나가기도 했다.

“예전에는 흰 장갑을 끼고 형광등 위를 훑어 보고 까맣게 되면 욕 먹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그지?”

대학원의 갑을 관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는 원래 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좋게 말하는 법이 없어서 그저 이렇게 저렇게 잘하면 된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하면 죽는다”라며 내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이등병 군대 훈련병

이건 군대에 갓 들어온 이등병을 갈굴 때 선임들이 기를 죽이기 위해 주로 하는 수법이었다. 이런 것을 당하며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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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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