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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과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거부 사건

박원순은 2014년 12월 10일 성 소수자 시민단체 활동가와 비공개 회동 직후 페이스북에 한 게시물을 올렸다. 인권헌장 논란에 관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식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한 게시물이다.

시민여러분들과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시민위원님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 드립니다.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이것은 사과인가?

사과가 아니다. 인권헌장을 둘러싼 서울시민과 서울시 사이의 주요 사실은 지극히 단순하다.

  1. 서울시민(시민위원회)은 인권헌장을 정당한 절차에 의해 채택했다.
  2. 서울시는 서울시민이 정당하게 채택한 헌장을 선포하지 않았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 외의 논란은 부차적이다. 그 서울시의 책임에 대해 많은 시민이 서울시 수장 박원순에게 항의하고, 박원순을 비판했다. 박원순이라는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하나씩 살펴보자.

1. 삶의 부정 vs. 존재의 부정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중

이번 인권헌장 사태로 동성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나는 남자 이성애자다. 하지만 내가 동성애자로 태어났다고 가정해본다. 그저 희망 고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에 존재를 올려놓고, 결국 존재를 부정했다. 이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박원순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괴로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동성애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인권의 명단’에 올라갈 자격이 없다고 통보받았다. 그것도 인권변호사 출신의 서울시장에 의해 언론에 자극적으로 떠벌려지며 존재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당했다.

2. 합의 과정이 중요하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은 법률과는 달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사회적 협약이자 약속이니만큼
서로 간의 합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중

4개월 동안 시민들이 모여 그 ‘합의 과정’을 충실하게 절차적으로 수행했다. 그 합의과정을 부인하고, 폐기한 건 서울시와 박원순이다.

서울시는 시민의 자율성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전원합의’를 종용했다(6차 회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신라의 화백 제도라도 하자는 말인가? 인권헌장 채택을 부인해야 할 절차적 흠결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채택의 정당성을 부인해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제발 부탁이다, 알려주시라.

서울시민은 충실한 합의 과정을 거쳐서 인권헌장을 채택했다. 이를 서울시는 ‘전원합의’라는 핑계로 거부했다. 누가 누구에게 합의 과정을 찾나.

3. 더 깊은 사회적 토론… 책임을 묵묵히

엄혹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갈등 앞에서
더 많은 시간과
더 깊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택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지고 가겠습니다.

–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중

나는 박원순의 이 목소리가 인권헌장 논란을 대충 뭉개고 가겠다는 확실한 의사표시로 들린다. 그리고 이 진술은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수사다.

보수 기독교계와 가부장 사회의 동성애 거부 정서에 편승해 급진적인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탈색하고, 자신에 대한 (소위 진보 진영의) 비판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망각 시스템에 맡기겠다는 언명으로 나는 읽었다.

“선택에 따른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지고 가겠다”는 고백에 담긴 고뇌까지 거짓이라거나 정치적인 장난질, 수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덧없고, 덧없다. 그리고 무서울 만큼 계산적이다.

4.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앞으로 더 어렵고,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상호신뢰의 원칙을 가지고 논의와 소통의 장을 계속 열고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가려고 합니다.

–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중

이쯤 되면 절망적이다. 앞 문단에서 “선택과 책임”을 이야기한 박원순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이라고 발을 뺀다. 이것은 진정한 고뇌인가, 아니면 고뇌하는 제스처인가. 여기에 책임은 없고, 언젠가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무의미한 제스처만 있다.

인권헌장 논란에 ‘책임’을 지는 길은 동성애에 대한 의견을, 무슨 전두환 뽑는 장충체육관 대선 투표처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그 갈등의 완전한 해소는 박원순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다.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책임은 정당하게 채택한 헌장을 서울시가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시민을 헌장의 제정자로서 모셔온 서울시가 그 권한을 자유롭고, 또 민주적으로 행사하고, 헌장을 채택한 시민의 당연한 신뢰를 폐기했다. 이런 기만과 배반을 바탕으로 소통이 가능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5. 갈등을 조정할 것인가 vs. 갈등을 핑계로 숨을 것인가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정치인으로서 박원순은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회피했다. 인권헌장 사태는 동성애에 관한 두 세력의 “갈등을 조정”하는 과제를 박원순에게 부여한 것이 전혀 아니다.

박원순은 이렇게 말했다.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경력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것과
현직 서울시장이라는 엄중한 현실,
갈등의 조정자로서 사명감 사이에서
밤잠을 설쳤고, 한동안 말을 잃고 지냈습니다.”

– 박원순 시장의 페북 게시물 중

지금 박원순이 해야 하는 일은 동성애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당연한 인권을 확인해 준 시민위원회의 결정, 정당한 절차와 합의 과정을 거쳐 채택한 ‘인권헌장’을 서울시의 수장으로서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단순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무슨 대단히 복잡한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후에야 그 헌장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조정자 역할이 생겨날 수 있다. 생겨나지도 않은 갈등에 관한 조정자로서 자신을 치장하며, 과도한 수사를 남발하며 정치적인 액세서리처럼 고민과 고뇌를 몸에 둘러봤자 한발도 전진할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동성애자는 인간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서울시의 공식 입장은 그렇다고 한다. 인간의 존엄에 관한 공동체의 확인이라는 경건한 축제를 잔인한 서커스로 만든 자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서울시민도 아니다.

결국, 박원순은 성 소수자 그룹의 비공개 회동과 그 직후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해 준 셈이다.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거부 사건  

이제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 논란 혹은 이 사태의 의미는 명확해졌다. 우리는 마땅히 이 논란, 사태를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거부 사건이라고 명명해야 한다. 이 사건이 함축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우리 사회의 동성애 혐오는 서울시가 추진한 공적 업무를 무력화할 만큼 조직적이고 강력하다. (동시에 이는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지자체의 공적 업무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서울시는 적극적으로 협력, 방조했고, 시민사회와 언론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3. 박원순이라는 정치인은 정치적 이익과 “살아온 삶”의 원칙 사이에서 (잠재적) 정치적 이익을 선택했다. 그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박원순이라는 정치인의 진면목을 확인했다는 점에선 같다.

나는 내 판단을 이야기하겠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치인은 말과 행동을 달리 해왔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대한 계산은 밝았지만,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일에는 게을렀다. 결단하고, 행동하며 갈등을 조정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갈등을 핑계로 그 결단과 선택을 미루고, 결국 그 사회적 의제를 망각 속에서 사라지게 했고, 그 정치인 역시 그랬다. 나는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거부 사건을 통해 익숙한 대한민국 표준 정치인의 초상을 떠올린다.

박원순, 그 역시 익숙하게 봐왔던 또 한 명의 정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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