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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이 되기 전에 나는 늘 엄마 손에 이끌려 극장에 가곤 했다. 나를 위해서이기보다는 엄마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보러 간 탓에, 보곤 했던 영화는 [E.T]나 [구니스] 같은 것들보다는 [마지막 황제]라든가 [태양의 제국] 같은, 묵직한 주제가 담긴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한 번 더 볼 수 있었던 영화관

물론 꼬맹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들어가면 영화는 늘 상영 중이었고, 자리가 없으면 나는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엄마의 해설을 들으며 영화를 봤다. 상영이 끝난 뒤엔 필름을 되감느라 3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이 있었고, 그럴 때면 엄마와 나는 빈자리를 찾아 앉아선 꼭 한 번씩을 더 보고 나오기도 했다.

극장에서 표 한 장 사면 상영 중이건 전이건, 두 번이건 세 번이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은 꽤 최근까지였다. 지금처럼 상영시간에 맞추어 입장을 허용하는 것을 처음 본 것이 제대 직후였으니, 90년대 말까지는 그런 식의 극장이 썩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그런 극장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래된 극장
Marceau Rouvre – Photographie & Graphisme, CC BY NC SA

시간과 공간을 조각내다

그러니까, 지금의 극장은 모두 규격화되어 있는 셈이다. 관객들은 모두 상영시간 몇 분 전부터 해당 상영관에 입장할 수 있고, 영화가 끝나면 상영관에서 틀림없이 나와야만 한다. 좀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이런 변화를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분절이 이전보다 규격화된 상황이라고 할 만하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전보다 규격화된 것이 어디 극장에서뿐이겠는가. 학교에서, 회사에서,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의 구획 나누기나 도시풍경에서 흔히 보이는 블록과 같은 것들도 모두 규격화에 해당하기는 매한가지다. 미관이라는 면에서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이것이 주변 환경이나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아름답고, 보기 좋고, 때때로 감동적이며 재미를 줄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아파트
vitroid, CC BY

규격화와 구획화는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기능적 목적에 더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정리정돈이랄까. 방 정리를 할 때도 그렇지 않던가? 구획을 나누고 크기에 따라 물건을 정리해야 공간의 활용이 더욱 효율적이다. 마찬가지로 구획화, 규격화된 공간과 시간은 관리의 효율성 측면에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듯싶다.

수학적 규칙성과 아름다움, 그 틈새

수학적 규칙성은 아름다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공간의 정합성은 효율성을 높이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규칙과 불규칙, 비례와 불균형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 아름다움이 자리하는 경우도 많다. 움직일 듯 말 듯한 밀로의 비너스 상(像)처럼, 수학적 규칙과 정확함 속에 숨겨진 약간의 비틀림과 위태로움은 그 아름다움을 결정적으로 표현한다.

다빈치의 인체도와 밀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1492년 작)과 밀로의 비너스(기원전 130년~100년. 추정)

이러한 모종의 애매함 속에서 해석의 가변성과 다양성이 나온다. 해석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달리 말하면 해석이란 활동에서의 자유랄 수 있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볼 자유, 각자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자유, 그 생각에 따라 달리 말하고 반응할 수 있는 자유가 그것이다. 이런 자유의 파이는 외형적 규격이 어디까지 침투하여 세밀한가에 따라 다르다. 즉 정확함의 세밀도가 높아질수록 자유의 파이가 줄어드는 것이다. 작품해석에서만 그러한가? 규율에서도 마찬가지다.

멀티플렉스 극장 시대와 영화 보는 자유

처음에 말했던 극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금보다 느슨한 규율 속에 있었던 이전의 극장 운영방식에서는 관람객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극장 운영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규율과 규격화가 더 세밀해진 데 대해 전적으로 반기를 들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분화한 규격이 대체로 자유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멀티플렉스 극장 매표소
Dick Thomas Johnson, CC BY

외형적 규격이 허용하는 자유의 크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개인의 활동적 자유의 범위가 된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 마음껏 찾아다니고, 보고, 듣고, 만지고, 부수고, 새로 만들어 보며 자신의 규칙을 형성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가 그것이다. 개인이 만드는 이 규칙을 다른 말로 하면 개별적 자아의 정체성 내지는 자아에 형성되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개별 자아의 정체성이 혹은 자아의 서사 즉, 규칙이 만들어지는 자유의 범위가 줄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말할 것도 없이 자아의 서사는 빈약해질 것이며 정체성의 견실함 역시 줄어들 것이다. 더 협소해진 범위에서 만들어진 룰이 더 넓은 범위에서 만들어진 규칙보다 풍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형적 규격이 세분화되고 개별 자아의 자유가 점점 제한되는 현실에서 견실한 자아, 이전보다 튼튼한 자아, 더 포용력 있는 자아가 형성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규격은 효율성을 낳지만 자유를 죽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청소년기의 특징적 행동양식으로 정체성 놀이를 말한 적이 있다. 여러 정체성을 실험해봄으로써 자아를 형성해 간다는 얘기다. 그러면 규율이 늘어가는 사회에서 자란 세대와 지금 자라고 있는 청소년들의 자아는 이전 시대에 비해 어떨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정체성 놀이’를 제공하고 있을까?

비단 청소년에게만 속한 이야기는 아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의하면 자아가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통념(혹은 주입된 관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균형을 잡는 일(사회화의 변증법)은 어렸을 때만의 일이 아니다(‘거울 단계 이론’). 그것은 평생토록 이어지는 지속적인 작업이다. 그러면 규율 혹은 규격이 세분화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 전체를 아울러서, 현대인의 자아는 이전 시대에 비해 어떨까?

규율이나 규격의 세분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매우 유용하며, 특히 업무의 어떤 부분에서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과연 지금 우리 삶의 특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규율이나 규격의 세분화가 정말 그 분야에서 필요한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자유의 파이가 커진다 해서 반드시 자아의 견실함과 안정성이 필연적으로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의 파이가 작아질 때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사도라 덩컨
고전 발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 무용’을 창시한 현대 무용의 어머니 이사도라 덩컨(1878년~1927년) (사진: Arnold Genthe, 1915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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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글쓴이의 의도는 알겠으나 극장 시스템과 비교하며 자유찾기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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