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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아이스너: 그래픽 노블을 만든 사나이

만화와 그래픽 노블

어떤 예술 분야든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직업의 귀천을 쉽게 가리려는 편견이 방해꾼이거나 경제적 효용성을 따지는 의문이 문화의 높낮이를 평가하는 양상들이 끊임없이 반복됐기에, 오늘날의 공연예술과 영상문화가 그 매력과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중 만화 분야는 미술사에서나 산업사에서나 20세기 초반부터 모든 시각매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소설과 영화 최근에는 디지털게임이 제각기 점한 위치만큼 독특한 표현영역과 발전을 보여왔지만,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인 편견들과 대립하고 있다.

특히 만화가 줄곧 한정된 형식과 제한된 내용으로만 출판되면서 굳어지게 된 사람들의 인식은, 만화의 강력한 잠재력조차 묻어버리곤 한다.

1970년대 미국의 경우, 그 편견의 중심에는 ‘코믹북'(Comic Book)이 있었다.

대중의 인식에서 만화는 곧 코믹북이었고, 원색의 슈퍼히어로가 20페이지 남짓 짧은 분량에서 하나의 모험을 섬세한 전개나 흥미로운 시각적 연출보다는 그저 허겁지겁 펼치고 완결짓는 것이었다.

그런 만화 분야에 대한 편견과 싸워가며 만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한 사람은 글자를 소리 순서대로 읽어서 서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눈으로 접한 그림과 글자의 조합을 시각의 직관성으로 이해하는 이 분야의 특성을 고찰했다. 그리고 더 섬세하게 구성하고 연출된 장편 작품을 추구하며, 그간 만화 일반을 통칭하게 된 ‘코믹북’이라는 편견 가득한 이름을 대체하고자 하나의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모든 시각적인 표현을 뜻하는 그래픽(Graphic)과 기승전결의 서사를 가리키는 노블(Novel)을 붙여 “그래픽 노블”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FirstSecond Books 의 “Why Graphic Novles?” 해설문

퍼스트세컨드 북스(FirstSecond Books)의 “왜 그래픽 노블인가?”(Why Graphic Novles?) 해설문 중

이 이야기는 만화의 본질을 한 층 더 꽃피우고자 했던 그 사람, 그래픽 노블의 아버지* 윌 아이스너 에 대한 소개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용어 자체는 아이스너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했으나, 단순한 표어가 아니라 작품 활동과 연구를 통해 하나의 범주로 정립하고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작가임에는 이견이 드물다.)

유년시절과 성장

1917년 뉴욕, 1차 세계대전을 피해 체코로부터 이민 온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윌 아이스너는 화가로 극장 포스터나 간판을 그렸던 아버지 사무엘 아이스너의 작업과정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자랐다. 영어회화가 취약했기 때문에 허드레 색칠이나 포스터 등의 일감을 받아 와 묵묵하면서도 빠르게 손을 놀렸던 사무엘의 그림과 작업 방식은 유년 시절의 아이스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가정은 워낙 사정이 궁핍하여 빈번한 이사를 해야 했고 덩달아 노골적인 반유대주의가 판치던 학교는 청소년기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거리에서 신문팔이 소년들과 목을 다퉈 가며 잡지와 신문 판매로 고된 10대 시절을 채웠다

1936년 드윗 클린턴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아방가르드 미술과 로버트 칸을 만난다. 당시 학급신문과 문예지에서 자주 보이던 아방가르드 미술양식은 아이스너의 예술관에 큰 보탬이 되었고, 그런 예술 분야에서 취미가 맞아 우정을 나누게 된 로버트 칸은 후일 만화계에서는 필명 밥 케인으로 활동을 시작해 모르는 사람이 드문 걸작 만화 <배트맨>을 발표하게 된다.

고교를 졸업한 이후 뉴욕의 유명한 아트스쿨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1년간 인물과 해부학에 관련한 미술 교육을 받은 아이스너는 곧 여러 펄프잡지에 삽화를 그리며 만화 쪽으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제리 아이거와의 만남과 만화산업의 발전

애니메이터이자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던 밥 케인은 아이스너에게 본격 만화잡지인 <WOW, What A Magazine!>에 자신과 같이 만화를 투고하자고 권유하게 되는데, 해당 잡지는 4호 발간으로 폐간되었지만, 그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제리 아이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음이 맞아 잡지 외의 사업 이야기를 곧잘 나누게 되었고, 이는 아이스너의 인생을 크게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제리 아이거는 당시의 모든 신문이나 잡지가 절대 뒤처지면 안될 유행처럼 만화를 연재하고 다루기 시작하는 양상을 보면서 매체에 연재되는 만화들의 ‘공급이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산업적인 예측을 하였다.

고심한 끝에 그는 마음도 잘 맞았지만, 만화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빠르게 그린다고 여기고 있던 동료 아이스너에게 자신의 예측과 사업구상을 말하면서 동업을 제안했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 서로의 이름을 딴 만화스튜디오 회사 “아이스너 앤 아이거” 를 설립하여 만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신문과 잡지 심지어는 전문 만화회사에까지 만화 공급을 시작하는 일명 ‘코믹북 패키저’를 시작한다.

당시의 연재만화들은 제리 아이거의 분석처럼 작가가 해당 지면에 스스로 투고를 하거나 그 출간사가 작가를 찾아내 계약을 맺은 뒤 다시 그 지면에 맞는 역할과 성격 등을 구상하여 비로소 만화가 만들어지는 양상이어서 항상 만화의 공급이 수요보다 부족했다.

그러나 ‘아이스너 앤 아이거’를 찾으면 어느 출판사든지 그들이 싣고자 하는 지면에 꼭 맞는 만화를 기성상품을 고르듯이 주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매우 획기적으로 연재만화들을 계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스너 앤 아이거’의 ‘코믹북 패키저’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아이스너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큰 부자로 여길 만큼 돈을 벌어다 주었다.

거기에 해당 회사를 거쳐 간 작가들은 각기 만화사에서도 큰 이름을 남긴 잭 커비, 밥 케인 같은 인재들이었을 정도로 회사의 앞날은 만화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밝았다.

더 스피릿의 작가로서 다시 출발한 아이스너

그러나 1940년 아이스너는 다시 한 사람의 작가로 돌아와 자기 몫의 회사 지분을 정리하고서 특별한 만화 작품 하나를 일요신문 만화 부문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자 세계 만화사에 걸작으로 꼽히는 [더 스피릿(The Spirit)]이었다.

얼굴을 감춘 유령 형사가 등장하는 이 모험물은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인생을 탄탄한 서사와 놀라운 연출로 선보였는데, 처음 8페이지로 시작했던 지면은 16페이지로 확대되며 동시에 20군데 이상의 신문에 연재되어 발간수로만 5만 부수의 신문들에 소개되는 인기 속에 1952년까지 연재되었다.

아이스너가 세계 제2차대전으로 인해 군에 징집되어 군대 홍보만화 분야에서도 그 재능을 발휘해 만화의 홍보영역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던 군 부재 기간에도 [더 스피릿]은 다른 작가에 의해 계속 연재가 되었고, 아이스너가 군대를 전역한 이후는 현대의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식을 신문지상에서 펼쳐가며 그 만의 독특한 실험실로 변해갔다.

만화연구로서의 길을 개척한 아이스너

1970년대가 되자 아이스너는 여러 만화를 제작하는 와중 만화분야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와 강의를 동반하였는데 그는 그 기간 동안 만화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벗기고 그 원론적인 의미를 되살리는 길에도 모색했다.

당시 ‘만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어느 나라나 거의 동일하게 ‘우스꽝스러운 그림이나 낙서’의 뜻에 가까웠다. 아이스너는 만화가 그 이름 때문에 가지게 된 편견을 우려하면서도 억지스러운 좋은 뜻의 단어로 바꾸는 것보다는 신중하게 만화의 본질을 연구하여 원형이 왜곡되지 않은 쉬운 단어로 나타내고자 연구를 한 것이었다.

만화의 본질을 연구했던 그의 노력은 수많은 작업노트와 강의서로 이어져 [Comics and Sequential Art](국내에선 [만화와 연속예술]로 출간) 과 [Graphic Storytelling and Visual Narrative](국내에선 [그래픽 스토리텔링과 비주얼 내러티브]로 출간) 등 명저를 낳기도 했다.

아이스너의 만화 연구 기반에는 아트스쿨에서 만화 잘 그리는 법뿐이 아닌 만화문화의 심층적인 부분과 이론에 대해 강좌를 해온 자신의 현장 지도 자료들이 토대를 이루었고 그는 그 연구 끝에 아예 그 본질을 작품으로서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픽 노블의 탄생

마침내 1978년 [신과의 계약(A Contract With God)]을 발표할 때 파격적으로 제목과 같이 붙인 ‘그래픽 노블’ 이라는 말은 만화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정의로 자리 잡혔지만, 대중과 일반 출판사들이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서두에서 거론된 이야기지만 한국어로서의 “만화”라는 말도 쓸데없는 그림들, 혹은 허무맹랑한 웃음을 주는 그림표현이라는 것이 원론적으로 내포되어 이 분야를 가리키는 단어가 사회적인 편견을 갖게끔 되어있는 것처럼 영어권에서도 “코믹스(Comics)”는 우스꽝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느낌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제아무리 만화에서 진지하고 뛰어난 메시지가 보여도 그 평가는 다른 매체와의 하위비교로밖에 이뤄질 수 없는 실정이었다.

[신과의 계약] 출간은 그런 만화분야에 대해 이론과 실력을 겸비한 아이스너 라는 한 작가가 그 본질을 추구하다 못해 사회를 위해서 그 분야를 새롭게 명명해내고 자신의 작품에 아예 그 표기를 한 의미심장한 행동이자 한 예술사조의 탄생을 이뤄낸 행동이었던 것이다.

피베이스닷컴에서 공유한 “신과의 계약” 표지, '윌 아이스너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피베이스닷컴에서 공유한 [신과의 계약] 표지
‘윌 아이스너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영어권 만화출판업계가 이 단어를 토대로 만화를 재발견하는 데에는 다시 한 번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뒤를 제대로 잇기 시작했지만, 오늘날 인터넷에서의 문화상품을 분류하는 지표로도 기능하는 아마존닷컴에서는 어느새 양장본 만화 전체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학술적인 기능과 변화를 보여주는 위키백과 역시 이전까지 ‘코믹스’로 분류했던 작품들을 그래픽 노블로 부르고 있다.

아마존닷컴의 만화코너

아마존닷컴의 만화코너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36년 전 한 만화연구가의 집념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만화분야에 붙은 또 하나의 이름은 그의 예측대로 일반사회가 만화의 가치를 더는 저평가하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만화를 또 하나의 예술로 바라보는 방법으로 제시한 셈이다.

아이스너상의 탄생과 국내의 경향

이렇듯 만화가이자 만화연구가로서의 업적이 워낙 뛰어난 아이스너에 대해 동료작가들은 뛰어난 만화작품이 나올 때마다 장난삼아 ‘이것은 아이스너상 감이다.’ 라는 말을 1980년대부터 사석에서의 농담은 물론 그들의 만화 속에서도 곧잘 대사로서 쓰곤 했다.

그리고 그 농담은 해마다 산디에고에서 개최되고 있는 국제 만화행사인 ‘코믹콘(Comic-Con International)’의 1988년 행사부터 정식 시상으로 만들어져 오늘날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우게 된 ‘아이스너 어워드(Eisner Award)’로 정착했다.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작품들과 그로 인해 만화계에 작품을 남기게 된 유명한 작가들 그리고 뛰어난 만화연구 저서들과 강의를 남긴 아이스너이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그래픽 노블’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최근 10년 동안 한국만화시장에도 세미콜론, 시공사, 미메시스 등 양질의 만화를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으로 좋은 작품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이든 미국이든 홍보자료나 관련 기사에 흔히 보이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만화”라는 표현은 마치 기존 만화와는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새로운 장르인양 그래픽 노블을 오도하게 한다.

그래픽노블콜렉션닷컴 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 자사의 신간만화작품들만을 판매하는데 정신없는 마블코믹스의 사이트운영,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어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뜻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으로 대부분의 만화출판사들이 보이고 있는 경향이다

‘그래픽노블콜렉션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 자사의 신간만화작품들만을 판매하는데 정신없는 마블코믹스의 사이트 운영.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어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뜻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으로 대부분의 만화출판사들이 보이고 있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을 겪으면서라도 만화가 예전에 받았던 푸대접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온전하게 인정되는 것을 아이스너는 바랐고 그런 세상이 마침내 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여기며 소개 글을 맺는다.

이 글은 곧 출간 예정인 피오니북스의 [영화같은 만화, 그래픽 노블 100]에 실릴 내용에 바탕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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