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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에 올라온 “혐오발언, 포용할 것인가 응징할 것인가”(T.K.)라는 칼럼은 제레미 월드론의 [혐오발언의 해악]을 리뷰하면서 혐오발언을 규제하자는 주장의 강점과 문제점을 소개했다. 칼럼은 혐오발언 규제론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확히 어떤 발언이 소수자의 존엄에 법이 개입해야 할 정도로 위해를 끼치는 지 자명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칼럼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일베에서 전라도 출신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는) ‘홍어’라는 단어가 미국사회에서 니거(nigger)라는 단어와 같은 수준으로 모욕의 정도가 높은 것인가? 또 그렇게 … “홍어”라는 단어를 거론하는 것이 전라도 출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폭력을 암시하고 그들을 2등 국민으로 전락시키는 것인가? 월드론의 이론은 좀 더 토착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이 아직 사회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혐오발언 규제 찬성론의 입장에서 쓰인 영국의 정치학자 칼렙 용(Caleb Yong) 교수의 논문, “표현의 자유는 혐오발언을 포함하는가?”(Does Freedom of Speech Include Hate Speech?)를 참조하여, 위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강간 농담’ 사건

우선, 미국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강간 농담은 절대 웃기지 않아요

한 여성이 미국의 코미디클럽에서 공연 중이던 다니엘 토쉬(Daniel Tosh)에게 소리쳤다. 독일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에서 목사의 아들로 자란 토쉬에게 강간은 아주 웃기기 좋은, 그래서 애용하던 코미디 레퍼토리의 하나였다. 갑작스러운 관중의 항의에 당황하지 않고 토쉬는 능란하게 응답했다.

지금 저 여자가 다섯 명의 깡패들에게 여기서 강간당한다면 정말 웃기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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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토쉬(Daniel Tosh) (사진: 위키커먼스)

미국의 유명 케이블 채널 코미디 센트럴(Comedy Central)에서 자기 이름을 건 쇼를 꿰찰 정도로 잘 나가는 코미디언 토쉬는 막나가는 유머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의 조크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동성애 혐오적이라는 혐의를 받지만 토쉬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유머에 대해 “내가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런 농담이 웃겨서 쓸 뿐”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크리스 락(Chris Rock)이나 댄 쿡(Dane Cook)같은 유명 코메디언들도 검열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강간 농담을 즐겨하는 토쉬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기도 했지만, 토쉬는 잔인한 성적농담을 가했던 그 여성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논란은 점차 사그라졌다.

강간 농담은 법적 처벌 대상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론재판과는 별도로, ‘강간농담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인정되는 미국에서 듣는 사람을 격분시키는 병맛발언의 자유까지도 정당화하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 논리로 압축된다.

  • 첫째,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사람들은 민주적인 자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거짓과 허위가 토론을 통해 걸러져서 종국에는 사회적으로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 둘째,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개개인은 자율권을 행사하고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발언일지라도 민주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최소한의 생각해 볼거리를 갖고 있다면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혹은 그런 쓰레기 같은 발언도 자기계발을 위한 자율권의 행사이므로 보호받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표현의 자유’가 내가 싫어하는 다른 의견을 법의 이름으로 억압하지 말자(freedom of speech that I hate)는 정신에 있지, 혐오를 자유롭게 표현해도 좋다(freedom of hate speech)를 보장하는 게 아님을 구별해야 한다. 후자는 명예훼손죄와 같이 규제 가능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만약 볼테르의 아내를 특정해서 집단강간하자는 선동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지속적으로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볼테르는 뭐라고 응답했을까?

“저는 당신의 글을 경멸하지만, 당신이 계속 일베에 글을 쓸 수 있기 위해 제 아내를 걸겠습니다”라고 댓글을 달았을까? 전라도 홍어들을 땅크로 부릉부릉 쓸어버리자는 온라인선동을 일삼는 일베의 혐오 선동가들의 증오할 자유를 위해 볼테르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울타리의 역설’

혐오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우려가 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 일련의 교육학자 그룹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관찰했다. 미국의 어떤 놀이터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고, 그렇지 않은 개방형 놀이터도 있다. 오랜 관찰 결과, 이들은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울타리가 없는 개방형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중앙에 모여 옹기종기 노는 반면에, 울타리가 있는 놀이터에서는 애들이 공간을 훨씬 넓게 쓰더라는 것이다.

울타리가 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훨씬 더 공간을 넓게 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진: touring_fishman, CC BY NC SA)
울타리가 있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훨씬 더 공간을 넓게 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진: touring_fishman, CC BY NC SA)

‘울타리의 역설’은 혐오표현의 규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사회적으로 분명하게 그어 주었을 때 오히려 보통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범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폭넓게 표현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그 경계선이 불분명할 때는 “너 일베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오히려 자신의 발언을 사전검열하게 되는 부작용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경계선이 뚜렷해지면 허락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말놀이를 할 수 있고, 더 모험심이 강한 토쉬 같은 악동들은 울타리 타기를 하며 금을 넘나드는 위험한 장난도 시도해 볼 것이다. 지금은 그런 경계가 없는 상황에서 다수는 중앙에서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쓰지 못하는 반면 극단적인 지역차별주의자, 여성혐오론자들만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혐오의 자유를 200% 행사 중이지 않은가?

혐오발언, 어떻게 선을 그어 처벌할 것인가?

그렇다면 혐오발언을 어디까지 선을 그어 규제할 것인가? 그 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표현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반대로 뒤집어 보면 표현의 자유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넘지 말아야 할 발언의 한계선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네다홍'(상대방의 주장에 ‘네, 다음 홍어’라고 조롱하는 표현)과 같이 토론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내용도 없이, 소통이 목적이 아닌 일방적인 배설, 토론을 오히려 봉쇄하는 혐오발언은 표현의 자유의 보호영역 밖에 위치한다.

홍어들은 전라민국으로 독립하라는 주장은 자긍심 향상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타인의 자기계발과 민주적 참여를 배제하거나 가로막는 언어폭력이므로 이런 부류의 혐오발언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지 않는, 법적 처벌이 가능한 영역에 속하게 된다. 내가 발언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타인이 발언할 권리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표현의 자유는 평등이라는 가치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인 바, 타인이 갖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는 발언은 규제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규제가 가능한 대상 모든 것을 반드시 처벌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 원칙과 양립 가능한 명예훼손법이 그 입법 취지와는 다르게 한국사회에서 강자가 약자의 입을 막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처럼, 혐오발언 금지법도 악용될 소지가 있다.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혐오발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그룹,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출신 지역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발언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규제 가능한 혐오발언의 범위는 가급적 좁게 잡고, 그 범위를 시대 상황을 반영해서 사회적으로 탄력적으로 늘리거나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같이 자유주의 서구 사회의 대표적 민주국가인 영국에서도 인종이나 종교에 대한 혐오발언은 벌금이나 징역 등의 처벌 대상이다. 이런 혐오발언 규제로 인해 영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었는가? 오히려 영국의 텔레비전에서는 숱한 욕설과 독설이 난무하며, 이런 토론문화가 미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혐오발언을 규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자기방어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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