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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망중립성 사망선고? 한국은 다르다.

2014년 1월 14일 워싱턴 D.C. 항소법원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광대역(브로드밴드) 영역에서 통신사가 콘텐츠,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비차별’ 원칙을 지키도록 의무화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른바 망중립성에 대한 사망선고다.

이번 판결을 망중립성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이미지: DonkeyHotey, CC BY)

이번 판결을 망중립성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
(이미지: DonkeyHotey, CC BY)

망중립성 사망선고?

이 판결을 통해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다. 연방통신위원회가 무력해진 이상 망중립성에서 벗어나는 통신사의 독과점 남용 행위를 견제할 제도적 수단도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주목하는 건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제도권 밖에서 본격적인 로비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바다 건너 미국의 일이지만,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 연방통신위원회가 망중립성을 유지하는 기본틀로 사용했던 ‘오픈 인터넷 고시(Open Internet Order)’가 지난 2011년 우리나라의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놓은 ‘망 중립성 및 인터넷 트래픽 관리에 관한 가이드 라인’에 거의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한미 FTA 협정문제15.7조 ‘전자상거래를 위한 인터넷 접근 및 이용에 관한 법칙’에도 엇비슷한 내용이 있다. 또한, 한국의 망중립성 논의에서 미 연방통신위원회의 오픈 인터넷 고시는 큰 역할을 해왔다.

미 연방통신위원회 패소, 한국 망중립성에 직접 영향 줄까?

그러나 미 연방통신위원회가 패소했다고 해서, 그 판결 결과가 한국의 망중립성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거란 판단은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망 사업자의 법적 지위가 우편, 전화와 같은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닌 언론매체와 같은 정보 서비스지만, 우리나라에서 망 사업자는 기간통신사업자다. 그 차이는 아주 크고, 본질적이다.

마이클 파월. 제 아버지가 콜린 파월이죠. 저는 FCC 의장했다가 로비스트가 됐어요. 그러나 미국에선 흔한 일이죠 (ㅎㅎ) (사진: Solitj, CC BY SA)

일은 2002년에 이미 시작됐다. 당시 FCC 의장이었고, 현재는 미국 케이블방송통신협회(NCTA)의 회장을 맡은 마이클 K. 파월(오바마 이전에 흑인 대통령 후보로 언급됐던 콜린 파월의 아들)이 부시 행정부의 경쟁 촉진을 명분으로 초고속인터넷을 기간통신역무에서 제외했다.

이미 통신시장이 독과점한 상황에서 파월의 탈규제 정책은 경쟁을 촉진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데 더 기여했고, 행정부가 문제면 사법부가 이를 견제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잘 되지 못했다.

사례: 브랜드X 사건

브랜드X(BrandX)는 소규모 인터넷 서비스 업체로 1996년에 제정된 전화통신법에 따라 법적으로 기간통신사업자로 정의된 케이블 회사들에 망 개방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연방통신위원회는 전화 시대에 만들어진 통신법을 인터넷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하다고 판단하고, 케이블 회사 편을 들어줬다.

연방통신위원회의 해당 규제는 항소법원에서 항소가 인정됐으나, 2005년 케이블방송통신협회 vs. 브랜드X 사건에서 대법원은 사건을 다시 취하했다. 이후, 케이블 회사들은 기간통신역무가 해제되고, 언론매체와 같은 정보 서비스 사업자의 법적 지위를 갖게 됐다. (여기서 케이블방송통신협회는 파월이 회장으로 간 그 케이블방송통신협회다. 돌고 돈다.)

따라서 공중파보다 케이블의 규제가 덜한 것처럼 혹은 반대로 경쟁 활성화를 이유로 규제하기 어려운 것처럼, 기간통신역무가 아닌 정보서비스로 규정된 통신사에 대해 미 연방통신위원회가 규제권한을 행사하기는 이제 어렵게 됐다. 사실 이렇게 내부에 논리적 모순을 가진 상태에서, 여론에 따라 오픈 인터넷 고시를 도입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게 보면, 이번 패소는 예고된 것이었고, 단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우리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전기통신사업법 시행규칙 제3조에 따라 망 사업자들의 법적 지위를 기간통신망사업자로 정의한다. 심지어 전기통신사업 회계정리 및 보고에 관한 규정 제16조에 따라 인터넷 전화도 기간통신사업자의 책임인 기간통신역무로 규정된 상황이다. 그러므로 미 연방통신위원회가 패소했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망중립성을 통해 망 사업자를 규제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전기통신사업법 제3조(역무의 제공 의무). 1. 전기통신사업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전기통신역무의 제공을 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

달리 말하면, 통신사가 트래픽 부담으로 모바일인터넷전화(mVoIP) 혹은 스마트 TV 등 인터넷 프로토콜(IP)에 기반한 새로운 서비스를 거부한다면, 그 입증 책임은 통신사에 있다.

다만, 우려스러운 마음은 남아 있다. ‘마이클 파월’ 같은 사람이 미국에만 있는 건 아니고, 우리의 경우 로비는 더 은밀한 수단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탈규제를 하지 말아야 할 곳에 탈규제를 하는 오류를 범해, 독과점 기업에 간신히 매달아 놓은 방울(망중립성 규제)을 떼어버리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아직 지우기는 어렵다.

인터넷 자유 없이는 경쟁력도 없다 

이제 소셜, 모바일을 넘어 사물 인터넷(IoT)의 시대가 도래한다. 인터넷 트래픽이 증가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각 관계자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히니, 망중립성 문제는 끓임 없이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 규제 삽질은 지금까지로도 충분하다. 가끔 인터넷, 통신 정책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는 걸 보면 소위 선진국에서 좋은 것만 배우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시행착오까지 무비판적으로 들여오는 것을 본다.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미국도 부러워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갖춘 나라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콘텐츠, 애플리케이션 경쟁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동안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 등을 비롯한 다수의 잘못된 게임 규칙을 우리 인터넷에 적용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인터넷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우리 인터넷이 빠르기만 하고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학습에 의한 노파심이지만, 거기에 미국산이라고 또 하나의 잘못된 말뚝을 더 박을 이유는 전혀 없다.

왜 망중립성이 중요한가?

망중립성(net neutrality)은 쉽게 말하면 인터넷의 하부 구조(통신망)의 지배 구조가 인터넷의 상부구조(콘텐츠, 애플리케이션층)의 경쟁 질서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위한 규칙이다.

망중립성이 중요한 이유는 인터넷 혁신의 핵심인 상부구조의 ‘자유로운’ 경쟁 질서는 하부 구조의 ‘독과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콘텐츠, 애플리케이션가 이용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통신사가 임의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라인은 좀 더 빠른 라인을 주고, 마이피플은 좀 더 느린 라인을 줬다고 생각해보자. 이건 통신사가 자신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특정 콘텐츠, 애플리케이션에 핸디캡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망중립성을 정책적 쟁점으로 끌어올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한 콜럼비아 로스쿨의 팀 우(Tim Wu) 교수. 역시 사이버 법리를 세운 것으로 유명한 로렌스 레식(Lawrence Lessig)의 제자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다. 여기서 이 ‘자의적 기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전 세계적으로 통신사들은 이익 감소에 따라 콘텐츠, 애플리케이션층에 진출을 고려하고 있거나, 이미 고려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자의적 기준은 자신들의 콘텐츠, 애플리케이션 혹은 자신들과 이해관계를 공유한 콘텐츠, 애플리케이션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사실 망중립성은 굳이 추가 입법을 제안하지 않더라도, 공정경쟁법상으로도 문제가 있다. 독과점 자체는 합법일 수 있어도, 독과점의 ‘남용’은 경쟁법 논리상 불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독과점으로 운영되는 통신산업이 정부와 밀착된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정부는 정치적 목적상 시민의 통신 내역(콘텐츠)를 들여다보고 싶은 인센티브가 있다는 걸 고려하면, 통신사가 DPI(Deep Packet Inspection, 심층 패킷 검사) 같은 기술을 통해 콘텐츠를 들여다보는 건 통신비밀보호법상으로도 문제가 된다.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없는 것처럼, 합법적 근거 없이 통신 내역을 들여다보는 건 위법이다.

그래서 이용자(혹은 소비자) 단체, 디지털 권리 단체, 인권 단체, 인터넷 기업 등이 최근 수년간 국내외에서 망중립성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다. 인터넷 혁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키 중에 하나가 이 망중립성 문제이기 때문이다.

망중립성이 손상됐을 때의 가정

만약 망중립성이 손상되면 이런 날이 올지 모른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인터넷 라인 이용료 29.95달러 외에 구글+야후!+위키백과+플리커 사용하는데 추가 5달러, 아마존+스카이프+페이팔+이베이 사용하려면 추가 5달러, 스팀+EA+와우 이용하려면 역시 추가 5달러…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서비스별로 추가 비용을 내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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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재연
초대필자, 디지털 활동가

서울 거주. 비교정치경제, 동아시아, ICT 산업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 디지털 활동가. [소셜 웹이다], [소셜 웹 혁명], [누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죽이나]의 저자

작성 기사 수 :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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