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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갤럭시 기어,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애플이 최근에 했던 광고 ‘우리의 서명(Our Signiture)’은 지나치게 설명적일 뿐 아니라 너무 미국 기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학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애플 광고는 늘 설명하기(telling)가 아니라 보여주기(showing)였는데, 이 광고에서는 이례적으로 설명하기의 방법을 썼다. 그래서 그 짧은 광고가 지루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광고에서 애플의 중요한 제품 철학 하나를 대놓고 드러낸 대사가 하나 있었다: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Does it deserve to exist ?)

절묘하게도 그 대사가 나오는 순간 애플은 아이패드 미니를 보여준다. 마치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7.9인치 아이패드 미니가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웅변하는 것처럼.

애플 광고로 떠올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1905~1980)

사르트르(1905~1980)
사진: la-philosophie.com

저 대사를 듣고서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였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이 명제는,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일 터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상품(produit)에는 저 명제의 역을 적용해야 옳다. 그것이 어떤 예술적 대상(오브제 objet)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굳이 실존과 본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어느 목공이 의자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 의자가 어떻게 쓰일지를 먼저 생각하지 그 의자의 실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기술(IT) 제품과 같이 최첨단 기술이 사용되는 상품을 대할 때 우리는 종종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는 당위적인 명제를 잊어버리고 만다.

‘노트’엔 있지만 ‘기어’와 ‘라운드’에는 없는 것

그것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어떤 기술을 활용해 만들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품인 이상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존재할 만한 이유’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을 터이다. 요컨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은 그 상품에 있어서 실존이며, 소비자에게 기본적인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본질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삼성전자의 상품 가운데 갤럭시 노트 시리즈가 ‘존재할 만한 이유’를 증명한 제품이라고 보고 스마트 카메라를 표방한 갤럭시NX와 스마트 손목시계(워치) 갤럭시 기어, 휜(커브드) 스마트폰 갤럭시 라운드 등이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 반면교사라고 생각한다.

갤럭시 노트3와 갤럭시 기어  (사진 출처: 삼성투모로우 http://samsungtomorrow.com/ifa-2013-%EB%8F%85%EC%9D%BC-%EC%82%BC%EC%84%B1-%EB%AA%A8%EB%B0%94%EC%9D%BC-%EC%96%B8%ED%8C%A9%EC%97%90%EC%84%9C-%EA%B0%A4%EB%9F%AD%EC%8B%9C-%EB%85%B8%ED%8A%B8-3-%EA%B0%A4%EB%9F%AD%EC%8B%9C )

갤럭시 노트3와 갤럭시 기어 (출처: 삼성투모로우)

펜으로 쓰고 싶은 욕구 충족한 갤럭시 노트

갤럭시 노트 시리즈는 일단 와콤의 태블릿(펜 마우스) 기술을 독점 적용해 만든 제품이다. 스티브 잡스는 “누가 스타일러스를 원하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 때부터 10개씩 가지고 태어난 최고의 지시 기구(pointing device)를 쓸 것이다”라면서 필기구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쓰는 이용자가 필기구로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실제로 아이폰 아이패드용 펜 액세서리와 관련 앱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와콤의 기술을 이용한 갤럭시 노트만큼의 필기감을 주지는 못 했다.

(잡스 관련 발언: 6분 38초~7분 10초. 플레이 누르면 시작점부터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은 너무 두껍고 뭉툭해서 (따로 훈련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밀한 작업을 하기 너무 어렵게 한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만으로 모건 프리먼의 얼굴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복잡한 서명을 필기구 대신 손가락으로 하라고 하면 제대로 하기 힘들 것이다. 갤럭시 노트 시리즈의 ‘S펜’으로 화면에 글을 쓸 때의 느낌이 아직 볼펜이나 만년필로 종이에 필기하는 것만큼의 필기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갤럭시 노트가 본질적 의미가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갤럭시 노트가 출시된 시기도 인상적이다. 이 제품은 2011년 9월 독일 베를린의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처음 공개됐다. 2011년 9월이면 스티브 잡스(1955. 2~2011. 10)가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아직 고인이 되기는 전이다. 아직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의 영향력이 엄청날 때다. 스마트폰의 대명사는 여전히 아이폰이었고, 아이폰은 곧 스티브 잡스였다. (약 한 달 뒤 잡스가 세상을 뜨자 경쟁사였던 삼성전자가 미리 예정했던 갤럭시 넥서스의 공개 행사를 미루기까지 했다. 당시 잡스에 대한 일반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갤럭시 노트라는 훌륭한 제품을 만든 삼성전자는 카메라를 만들면서는 형편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갤럭시NX는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적용한 렌즈교환식(미러리스) 카메라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런 ‘실존’을 위해 카메라라는 ‘본질’을 무시했다.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탓에 갤럭시NX는 제품을 켜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찰나의 순간을 담아야 하는 카메라로서는 가만히 보아 넘길 수 없는 단점이다. 본질의 침해다. 그런 주제에 가격은 두배다.

‘시계의 본질’조차 놓친 갤럭시 기어

스마트 손목시계 갤럭시 기어는 한번 충전한 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만 하루, 약 25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이 제품은 매일매일 충전하면서 써야 한다. 하루만 깜박하고 충전하지 않으면 그 다음 날은 아예 제품을 끌러놓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인 아날로그 시계나 디지털 시계 전지를 한번 교체하면 짧게는 몇 달에서 길면 몇 년까지 쓸 수 있다는 점과 견주면 갤럭시 기어는 시계로서 낙제점이다. 스마트폰도 매일 충전하기 쉽지 않은데 심지어 손목시계까지 충전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소비자를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아니, 행복하게 하기는 할까.

한 번 충전에 25시간을 쓸 수 있는 갤럭시 기어 (출처: 삼성투모로우)

이 제품이 앞으로 판올림하면서 개선돼 나중에는 시계와 다를 바 없이 안심하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이 될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제품이 실존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본질은 이미 상당 부분 사라진 셈이다. 문득 시계를 보려고 봤는데 배터리가 다 돼서 쓸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손목시계가 아니며, 스마트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각에서 ‘실험적’ 제품이라고까지 말하는 이 제품을 소비자에게 돈을 받고 파는 건 세계적인 소비자 전자제품 회사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그냥 휜’ 스마트폰 갤럭시 라운드

갤럭시 라운드는 세계 최초로 휘는 디스플레이 패널로 만든 제품이다. 그러나 디스플레이 패널만 휘지 제품 외관 자체가 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 제품은 ‘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냥 휜’ 스마트폰이 돼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갤럭시 라운드는 전혀 새롭지 않은 제품이 되고 만다.

휘어지지 않는 '그냥 휜' 스마트폰 갤럭시 라운드 (출처: 삼성투모로우)  http://samsungtomorrow.com/%EC%82%BC%EC%84%B1%EC%A0%84%EC%9E%90-%EC%84%B8%EA%B3%84-%EC%B5%9C%EC%B4%88-%ED%94%8C%EB%A0%89%EC%84%9C%EB%B8%94-%EB%94%94%EC%8A%A4%ED%94%8C%EB%A0%88%EC%9D%B4-%ED%83%91%EC%9E%AC%ED%95%9C-%EC%BB%A4

휘어지지는 않고 ‘그냥 휜’ 스마트폰 갤럭시 라운드 (출처: 삼성투모로우)

삼성전자는 앞서 2011년 이미 ‘휜 유리(curved glass)’를 적용한 스마트폰 갤럭시 넥서스를 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비자 입장에서 봤을 때 갤럭시 라운드의 존재 가치는 거의 없는 셈이다. ‘본질’적으로 갤럭시 라운드가 소비자에게 추가로 제공하는 가치는 없다. 물론 ‘커브드’ 기술은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다. 자유자재로 개켜서 갖고 다닐 수 있는 스마트폰도 언젠가는 나올 것이며, 갤럭시 라운드의 개발은 그런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인 것도 맞다.

그러나 갤럭시 라운드는 돈을 받고 소비자에게 팔기보다는 내부의 성과로만 기억했어야 했다. 소비자에게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역할에 만족했어야 한다고 본다. 진화론에 빗대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에 해당하는 제품을 원하지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그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에 해당하는 제품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본질 갖춘 세계 최초 vs. 실존뿐인 세계 최초

정보기술(IT) 제품의 실존과 본질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쓰는 이유는, 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종종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세계 최초’라는 판촉 문안에 유혹되기 쉽다. 기술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니 본질을 갖춘 진짜 ‘세계 최초’ 제품은 종종 단순히 실존적일 뿐인 ‘세계 최초’에 묻힌다.

스마트폰 한 대가 100만 원씩 하고, 조금이라고 깎아서 사보자고 이동통신사 약정을 하면 2년은 싫으나 좋으나 같은 제품을 써야 하는 시대다. 순간의 선택이 최소한 2년은 좌우하는데, 본질을 갖춘 스마트 기기가 빛을 발하기를 바라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2014년 최저임금은 5,210원이다. 100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사려면 192시간 일해야 한다. 하루 8시간 일한다면 24일, 주말을 빼고 한 달 내내 일해야 스마트폰을 한 대 살 수 있다. 소비자로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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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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