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콘텐츠에서의 정치적 올바름, 과연 어디까지일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 법한 문학 작품일 것이다. 누구든 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 작품을 교과서에서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어렸을 적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작품을 수백 번 더 읽고 읽어 서사를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지만, 나이를 먹은 후에는 이 작품을 읽는 것이 매우 괴롭다. 한국 문학에서 사실주의를 개척한 입장에 서 있는 현진건답게, 당대 사회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 건조한 문체로 독자의 폐부를 찌르게끔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인간의 공통적인 감정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문학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한편 당대에 쓰인 작품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상을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사료 역할도 한다. 물론 이 역할은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된 역할이기는 하지만.
현진건에 관한 ‘조금 다른 해석’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조금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 나중에 알았다. 소셜 미디어상에서 여성주의 관점으로 문학 비평을 하는 젊은 학생의 글을 읽으면서부터. 이 사람의 관점에서는 김동인, 김동리, 현진건 등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시절에 쓰인 문학 작품들이 소위 ‘구리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고, 그 작품들이 구리다는 이유는 여성혐오적 관점이 작품에 짙게 묻어 있다는 것이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확실히 이야기하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러한 평은 일종의 미숙함이라든지 경험 부족에서 나온 실수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즉,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최근 콘텐츠 업계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평등을 누군가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잘못된 관점으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시대, 그 작가… 그저 당대를 반영했을 뿐
먼저 과거의 콘텐츠에서 차별적 요소가 발생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대개는 해당 콘텐츠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콘텐츠 제작자가 그 시대 독자들을 어떻게 세뇌해서 자기 식대로 세상을 꾸려가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현진건이 살았던 시대에는 대다수 사람에게 성평등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으며, 사실주의 작가였던 그의 특성상 결국 그 시대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작품에 부여했을 뿐이다. 흉측한 괴물을 거울에 비추면 당연히 흉측한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괴물을 탓하지 않고 거울을 탓하는 모습은 틀린 관점이다.
그러므로, 앞서 이야기했듯 전근대 시대의 콘텐츠는 스토리로서의 가치도 지니지만, 근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사료 역할도 있다. 즉 서구권에서도 한동안 논쟁이 되었던 로알드 달의 동화에 등장하는 단어가 수정되었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PC주의자들이 옛 동화에서 본인들 보기에 불편한 단어들을 마음대로 수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히 반달리즘의 성격을 띤다.
만약 어떤 이가 절에 걸려 있는 달마대사의 그림을 보고 시각 장애인을 혐오하는 행위라며 모든 달마대사의 그림마다 눈꺼풀을 그린다면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의 실현일까? 아니다. 이것은 그저 반달리즘일 뿐이다. 달마대사가 눈꺼풀이 없는 이유는 본인의 종교적 실천을 위한 수행의 행위였으나, 현대인들이 그 맥락을 도외시한 채 거울만을 보고 혐오와 아님을 구별하여 과거의 존재를 소급해서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콘텐츠의 사료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한 교보재를 버리는 행위와 같은데, 검열을 하는 쪽에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역사상 벌어졌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무슨 무균실 같은 곳에서 성장하길 바라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열심히 백신을 접종시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위선적이다.
로알드 달의 ‘슈퍼뚱’
자, 두 번째로는 로알드 달의 동화에서 논란이 되었던 ‘슈퍼뚱'(“enormously fat”)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자. 나 스스로도 뚱보 혹은 뚱뚱한(“Fat”)이라는 단어 자체를 마구 남발하는 것은 좋을 것이 없다고 본다. 뚱뚱하다는 사실 자체는 인간의 신체를 표현하는 중립적 형용사일 뿐이지만 인류는 그것을 조롱의 뜻으로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비만인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눈 앞에서 당신은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모욕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상당수 사회 구성원이 국경을 가리지 않고 합의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걸 그냥 ‘enormous’로 바꾸면 세상에서 ‘Fat’이라는 단어가 없어질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단어 자체는 ‘1984’의 빅 브라더에 버금가는 어떤 권력 집단이 등장하여 ‘신어(Newspoke)’를 실제로 창제하고 반포하지 않는 이상 그 수명을 이어갈 것이며, 그렇다고 단어를 그렇게 바꾸면 인류가 그 단어를 비만인 사람을 조롱하는 용도로 활용을 안 하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로 교육을 통해 타인의 신체를 갖고 조롱하는 것이 잘못된 습관임을 수정하려면 단어를 살리는 것이 낫다. 살려 두고, 해당 단어가 어떤 뜻이며 정확하게 어떻게 사용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교육을 하는 것이 인류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단어를 살려 두어야 이 단어가 현재 어떤 맥락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 사용이 지양되는지, 왜 우리가 이런 단어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지 등등이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저 검열 후 삭제하는 것은 PC주의자들이 보기에야 대단한 정의의 실천 같지만 사실상 구소련이나 진시황이 하던 일과 같다. 역사에서 맥락을 삭제하여 후대가 배울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차별 혐오자’로 팬 공격한 닐 드럭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
지난 2020년 출시된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라는 게임과, 2023년 상반기 개봉한 인어공주 실사 영화판, 그리고 최근 개봉한 영화 [더 마블스]는 출시됨과 동시에 극도로 혼란스러운 논쟁에 휩싸인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세 콘텐츠의 쟁점은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제작자들이 작품에 이의를 제기하는 팬들을 모두 인종차별주의자라든지 여성 혐오자로 몰았다는 지점이다. 상당히 우려스럽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의 경우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있었지만, 이 모든 논쟁의 출발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의 주인공이었던 조엘 밀러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었다.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이 부분에 대한 상세 내용은 독자의 플레이 또는 검색에 맡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파생된 스토리에 대한 팬들의 지적에 대해 개발사인 너티 독의 수석 디렉터였던 닐 드럭만의 반응이었다.
닐 드럭만은 트위터를 통해 “만약 당신이 동성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다. 씨X 우리를 내버려 둬라.”라는 커트 코베인의 발언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림으로써 사실상 비판적 관점을 가진 팬들을 모두 차별주의자로 몰았으며, 그 이후에는 “왜 가상인물에 몰입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더 심각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두 번째 발언이 더욱 심각했던 이유는, 닐 드럭만이 게임 제작자로서 가지는 기본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콘텐츠의 재미는 소비자가 그것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것이고, 그 몰입이 후속작이나 차기작을 구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즉 몰입은 콘텐츠 흥행의 기본 요건인데도 불구하고, 비판이 쇄도하자 그 몰입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작품 비판에 ‘혐오, 차별’ 호명하는 제작진: 인어공주, 더 마블스
비슷한 사태는 [인어공주] 극장판과 [더 마블스]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어공주]에 흑인 배우가 캐스팅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손쉽게도 인종주의자로 공격했고, [더 마블스]의 감독이자 각본에 참여한 니아 다코스타는 버라이어티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열성 팬이기 때문에 속하게 되는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문명화된 비평을 포함하는 그 숭배의 공간에 존재하고 싶습니다.”라고 그녀는 설명합니다. “그리고 정말 악랄하고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인 모든 끔찍한 것들을 포함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빛의 편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제가 팬덤에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There are pockets where you go because you’re like, ‘I’m a super fan. I want to exist in the space of just adoration — which includes civilized critique,” she explains. “Then there are pockets that are really virulent and violent and racist — and sexist and homophobic and all those awful things. And I choose the side of the light. That’s the part of fandom I’m most attracted to.”
니아 다코스타, 버라이어티 인터뷰 중에서.
왜 제작자들은 형편없는 콘텐츠를 만들고, 팬들이 자신들의 메시지에 반대한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인어공주]의 문제점은 흑인 배우 캐스팅이 아니었다. 어두운 조명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해 공포증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고, 기본적으로 뮤지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과거 90년대 애니메이션 버전보다도 흥겹지 못했으며, 원작의 유머러스한 부분들이 다수 삭제됨에 따라 기존 팬들에게 핼리 베일리의 캐스팅은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연출에 실패한 것이 문제였다.
[더 마블스]의 문제점 역시 출연진들이 여성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법이라는 선전이 무색하게끔 박진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액션 연출과 빈약하기 그지없는 메인 빌런의 매력,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의 스토리에 의존한 나머지 기존에 꾸준히 마블 시리즈를 모두 챙겨본 팬들에게만 설득력을 가지는 스토리 등등 핵심적인 부분들 모두가 문제였다. 특히 히어로 액션물인 마블 시리즈에서 ‘액션’이 빈약하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팬을 증오하는 제작진의 교만함
실제로 이러한 제작자들의 교만함은 콘텐츠의 퀄리티를 빈약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커리어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저 인종적 다양성만을 구현해 놓고 제작자들이 우쭐대고 있을 동안, 작품은 흥행에서 참패하고 흥행에 성공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논쟁에 시달리는 배우들은 커리어 침체기에 빠진다. 물론 PC 진영의 열렬한 옹호자들은 이들이 그저 망한 콘텐츠에 출연했다는 본질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시스젠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 배우들이 탄압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러니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다.
앞서 설명한 일련의 이 모순들을 ‘정치’라는 명목 아래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의 위선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가 혹시 병에 걸리더라도 크게 아프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백신을 접종하고 약을 먹이지만, 동시에 그가 성장을 하면서 복잡다단한 사회 구조 속에서 직면할 수 있는 일종의 차별이나 감정적 상처가 될 수 있는 상황은 절대로 겪지 않게 하려는 강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최근 기조는 그런 자들이 주류를 점해온 것으로 보이고, 그 극단성은 결국 대안우파나 극우 진영의 반격을 더욱 쉽게 해 줄 뿐이었다.
한편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인해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는데, 이 분을 추모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 누군가 자발적으로 가져다 둔 화환이 쌓이자 또 일부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며 항의가 들어오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서로 다른 사건 같아 보이지만, 강박적으로 정치적 메시지에 집착하는 일부 제작자 및 평론가들의 관점과 이러한 개인들의 이기심은 그 끝에서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애들이 보고 배울까 봐’ 모든 것을 지우고 표백된 세계관만 가르치겠다는 것은 그냥 어른이 귀찮아서 자기 할 일을 안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중 향한 세뇌? 필요한 건 성실한 설명과 대화
마지막으로, 앞에서도 밝혔지만, 가령 운수 좋은 날의 작가 현진건이, 무슨 대단한 가부장제의 영속을 바라고 김 첨지를 그런 캐릭터로 만들었을까? 로알드 달이 무슨 비만인들이 영원히 혐오당하기를 온 마음으로 ‘슈퍼뚱'(“enormous fat”)이라고 썼을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를 비판하는 팬들은 단지 등장인물이 남성 중심적 세계에서 추앙받는 미의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제작자를 비판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콘텐츠에서 제공받아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고, 소비자라면 응당 들어야 하는 제작자의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그저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는 제작자들의 증오와 혐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콘텐츠를 억지로 고치는 쪽이야말로 대중을 향한 세뇌의 의도가 있다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여야 한다. 콘텐츠는 서사, 연출, 각본, 음악, 촬영, 조명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감상하는 소비자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포괄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를 중심에 두지 않고, 특정 제작자의 정치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함으로써만 기능하는 도구로 콘텐츠를 대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1984’를 가져올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