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전 의전비서관, 차관급)의 퇴출 과정은 간단했다. 김건희(대통령 부인)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같이 수료했다.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지난 20일, 교육위원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초등생 딸의 학교폭력이 드러났다. 사표를 냈고, 즉시 수리됐다. 비서관이 된 지 약 6개월만이다(2023.4.14~2023.10.20).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승희 딸이 반복적 폭행을 저질렀음에도 학폭위(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는 ‘지속성(상습성, 반복성)’ 평가에서 1점을 줬다(0점~4점). 이제 권력 외압이 있었는지 의혹이 커지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김영호(민주당의원)의 문제 제기


사건은 지난 20일 국정감사 과정에서 처음 알려졌다. 김영호(더불어민주당 의원)는 경기도교육청을 상대로 한 국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 모 초등학교 여학생 화장실 학교폭력 사건입니다. 3학년 여학생이 2학년 후배 여학생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리코더, 주먹 등으로 머리와 얼굴, 눈, 팔 등을 때려 전치 9주 상해를 입힌 폭행 사건입니다.”

“이 학폭 사건의 가해자 아버지는 대통령실 김승희 의전비서관입니다. 김건희 여사와의 대학원 최고의 과정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윤석열 캠프에 합류해서 의전비서관까지 올라간, 항간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장 의아한 것은 지속성이 1점 부과됐다는 거예요. 폭행은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총점 16점부터 강제전학 처분인데 15점을 받아 딱 1점 차이로 가해학생은 강제전학을 면하게 된 겁니다.”

“학교가 출석정지를 내린 날, 가해학생 어머니는 SNS 프로필 사진을 남편과 대통령이 함께 있는 사진으로 교체했어요. 남편 사진을 대통령 측근의 위세로 과시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태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김영호(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교육위원회 국정감사, 2023년 10월 20일.

여기에 임태희 경기교육감은 이렇게 답했다.

피해 학생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되 가해 학생이 초등 저학년이기 때문에 가급적 교육적 해결을 해야 되는 교육적 책무도 있다.

임태희 경기교육감

아래는 사건 개요다.

  • 가해자인 김승희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이하 ‘A’)
  • 피해자 A의 학교 후배로 초등학교 2학년이다. (이하 ‘B’)
  • A는 2023년 7월 10일(월), B를 화장실 변기로 데려가 앉힌 상태에서 10차례에 걸쳐 리코더로 머리를 때렸다.
  • A는 2023년 7월 17일(월), B를 변기로 데려가 앉히고 눈을 감게 한 뒤에 주먹으로 눈과 이마를 폭행했다.
  • B는 눈을 포함한 얼굴을 다쳤고, 피를 흘렸으며, 전치 9주 진단을 받았다.
  • B 부모는 A를 학교폭력으로 신고했다.
  • 학폭위는 최고 조치인 강제전학(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퇴학’ 조치가 불가능)에 1점 모자라는 15점으로 A의 행위를 심의했다.
  • 이로써 A는 강제전학을 면하고, 학급교체 조치를 받았다.
  • 어차피 같은 학년, 같은 반도 아니라서 학급교체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학폭위 총점 15점, 그런데 지속성만 1점?


학폭위는 학교폭력을 점수 매긴다. 아래는 그 ‘심의 기준표’다. 총점이 0점이면 학교폭력이 아닌 거고, 총점 1점 이상이면 그때부터는 학교폭력이다. 다섯 가지 항목으로 평가하고, 학교폭력 행위 요소 세 가지(심각성, 지속성, 고의성), 행위 후/외 요소(반성, 화해)가 나머지 두 부문으로 구성된다.

  1. 심각성
  2. 지속성
  3. 고의성
  4. 반성 정도
  5. 화해 정도

김승희 딸은 위 기준표에 따르면, 지속성을 제외한 부문에서는 거의 최고점을 받았다. 지속성 평가는 1점인데, 총점은 15점이다. 나머지 지속성을 제외한 나머지 네 부문에서 14점을 받았다. 지속성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 평균은 3.5점. 그런데 지속성은 1점이다. 학교폭력 수위(심각성, 고의성)가 매우 높고, 반성과 화해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케이다. 그런데, 거듭 강조하지만, 그리고 많은 이들도 의혹을 표시하지만, 유독 ‘지속성’ 항목에서는 1점을 받았다.

이 사건을 다루는 언론 보도 표현처럼 ‘단 1점 차이’로 강제전학 조치를 면했다(참고로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므로 ‘퇴학’ 조치는 불가능하다. 퇴학 조치는 고등학교만 가능하다).

한겨레는 피해학생 측 변호인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10월 17일 이전에 두 번의 폭행이 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즉,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의 폭행이 있었고, 피해학생 측은 학폭위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고 전한다. 한국일보는 익명 교사들 논평을 인용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는 한겨레나 한국일보를 제외하고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김승희 딸 학폭 사건이라는 개별 사건과 그에 관한 관련 기사에 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학교폭력에서 ‘지속성'(상습성, 반복성)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학교폭력의 특성에 기인한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지속성, 왜 중요한가?


. 문제 하나만 풀고 가자. 학교폭력을 영어로 번역하면?

  1. 스쿨 바이올런스 (school violence)
  2. 불링 (bullying)

정답은 2번이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형사정책이나 범죄를 연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교육이나 심리학의 분야에서 학교폭력은 ‘스쿨 바이올런스’가 아니라 ‘불링’이다. 유네스코도 학교폭력에 관한 가이드를 내면서 학교폭력을 스쿨 바이올런스로 쓰지 않고, 불링이라고 쓴다.

이게 무슨 차이인가. 무슨 의미인가.

‘스쿨 바이올런스’로서의 학교폭력은 학폭을 범죄로 보고, 그 재범 방지에 방점을 찍는다. 불링으로서의 학교폭력은 학폭의 범죄적 속성보다는 ‘괴롭힘’과 ‘따돌림’ 등 범죄로 단죄하기 어려운 교묘한 ‘학생들 간 권력 관계’ 문제를 교육과 심리의 관점에서 다룬다. ‘불링’으로서의 학교폭력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거꾸로 말하면 ‘스쿨 바이올런스’가 아니라 ‘불링’을 학교폭력으로 정립한) 노르웨이 교육심리학자 단 올베우스는 학교폭력의 세 가지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고의성
  2. 힘의 불균형
  3. 반복성 (지속성)
단 올베우스(Dan Olweus; 1931-2020). 학교폭력 연구의 아버지. 올베우스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OBPP)을 만들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학생들이 정말 괴로워하는 ‘진짜’ 학교폭력은 일회적인 폭력이나 폭행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계기로 생겨난 폭력, 폭행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학교폭력, 아니 다수 학생들이 정말 괴로워하는 학교폭력은 ‘힘의 불균형’ 속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키워드는 ‘일상적’으로다. 물론 일회적이고 우연히 발생한 학교폭력도 큰 상처를 주고, 깊은 절망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마치 숨 쉬는 것처럼 괴롭힘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면, 그 상처는 평생을 간다.

알려진 사실만으로 김승희 딸 사건을 여기에 대입해보자. 김승희 딸의 폭력은 일상적으로 발생할 것처럼 보이는가? 그렇다. 그래서 그것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일방적이고(‘힘의 불균형’), 일상적인 폭력과 먹이사슬의 관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피해 학생은 반항하지 못하고, 그런 힘의 불균형은 ‘학년 차이’라는 명백한 힘의 불균형 표지에 의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진짜’ 학교폭력은 ‘힘의 불균형’ 속에서 발생한다. 대등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대등한 당사자들 간의 다툼은 협의의 학교폭력(학교괴롭힘)의 영역에서 제외시켜 학교갈등이나 학교범죄의 영역으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관해선 후술한다.

다시 돌아가서, 학교폭력, 불링은 권력의 피라미드라는 구조화된 관계 속에서, 피라미드 상단에 있는 학생이 피라미드 밑바닥에 있는 학생을 일상적으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리는 일이다. 학교폭력 논문은 이 학생들, 피라미드 밑바닥에 있는 학생들을, ‘안전한 타깃’이라는 가슴 아픈 조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자는, 인기 있는 아이로 간주되고, 사회적 명성과 높은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논문은 말한다.

안전한 타깃은 누구입니까? 올웨우스(1993)는 가장 전형적인 피해자 그룹을 복종하는 피해자, 즉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예민한 피해자(예: 괴롭힘에 반응하여 자주 우는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순종적 피해자의 프로필입니다.

괴롭힘을 하는 아이들은 지배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부 공격적인 아이들은 인기 있는 아이로 간주됩니다. 청소년기 초반에 또래가 주도하는 적대적 행동은 사회적 명성이나 높은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공격성이 집단 내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물행동학적 연구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괴롭힘 가해는 청소년이 집단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야나 유보넨(2013), 학교 내 괴롭힘: 괴롭힘의 힘과 피해자의 어려움 (Bullying in Schools: The Power of Bullies and the Plight of Victims)

김승희 딸 사건을 올베우스의 ‘공식’으로 바라보면, 지금 당장 밝혀진 폭력의 회수가 2회든 3회든 간에, 그리고 그것이 지속성 항목에서 1점을 받든, 4점을 받든, 그리고 학폭위 심의행위에 대통령실 비서관의 권력이 개입했는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것은 정치의 이슈이지 교육의 이슈는 아니다. 물론 세상에 정치 아닌 것은 없긴 하지만.

사실 나는 김승희 딸의 폭력행위에 지속성(상습성, 반복성) 점수를 얼마나 줘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지속성 1점’에 김승희의 권력이 개입했는지에 관해서도,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매우 중대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범죄겠지만, 내 개인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내가 더 궁금하고,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은 이렇다.

  • 후배를 화장실 변기에 가두어 때리는 초등학교 3학년 ‘김승희 딸’은 예외적인 존재인가.
  • ‘김승희 딸’과 같은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의 권력을 모방하고 학습하는가.
  • 만약 그것이 본능처럼 모방되고 학습되는 폭력이라면, 그 사회적 폭력의 유전을 우리는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학교폭력은 대체로 집단 안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다.

안전한 타깃… 그리고 학교로 이식되는 권력


학교폭력의 사회적 함의는 학교라는 가장 ‘안전하고, 평등하고, 공정해야 하는 공간’이 오프라인의 권력을 그대로 이식해 가장 불공정하고, 위험하며, 불평등한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학교폭력은 점점 더 그런 학교 외부의 권력 관계를 학교 안으로 이식해오는 경향성을 띤다. 그런데 ‘학교 밖’의 권력이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얼마나 잘 사는지, 부모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가령 김영호(의원)의 고발처럼, 학교를 상대로 SNS 플픽에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 정도 걸어줄 수 있는지가 그 표지가 된다. 출석정지가 내려지던 날, 마치 그것의 부당성을 웅변하는 것처럼,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마치 항의 표시처럼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는 엄마를 보며 그 딸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러면 ‘안전한 타깃’은 누구인가.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내가 취재한 10여 명의 전문가(학부모, 교사, 교육감, 피해자 부모, 가해자 부모, 학생, 상담교사, 교총, 전교조 등)은 대부분 이구동성으로 조손가족 학생, 한부모 학생, 다문화 학생,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렵거나 성적이 좋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왜소하며, 운동을 잘하지 못하는 학생을 ‘안전한 타깃’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가해학생 그룹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가핵학생 그룹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한 학생은 인터뷰에서는 ‘보통’이 그 기준이라고도 말했다. 적당히 잘 살고, 적당히 공부도 잘하고, 적당히 운동도, 적당히 용돈도 쓰고, 적당히 해외여행도 다녀오고(‘개근거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 해외여행간 적 없어서 개근하면, 이런 멸칭으로 불린다), 적당히… 그 보통이 10개라면, 적어도 5~6개 정도는 있어야 ‘안정권’이다. 그 밑으로 떨어지면 ‘안전한 타깃’이 된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배우고, 학교로부터 배우며, 사회로부터 그 모든 걸 흡수한다. 마치 스펀지처럼. 그렇게, 처음부터 ‘학폭 가해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학생들은 무슨 학교폭력을 어디서 따로 배우는 게 아니다. 그 부모로부터 배우고, 그 사회로부터 배운다. 그 권력의 작동법을 본능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다. 그게 학교폭력의 본질이다. 결국 피는 위에서 아래로, 부모에서 자녀에게도 이어진다. 하지만 그 부모만 탓하고, 그 자녀만 탓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모두의 가슴을 쳐야 할 일이다. 그 권력을 방관하고, 그 권력에 기생하며, 그 권력을 만들어 준 게 누구인가. 우리 자신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김승희 사건은 그저 권력층 자녀의 일회적 학교폭력 문제로 넘겨선 안 된다. 그게 대통령실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현재와 같이 변호사 붙여서 서로 싸움 붙이고, 아이들의 다툼을 어른들의 권력 쟁투로, 힘 자랑으로 만들고, 결국은 돈 있고, 여유 있고, 권력 있는 자녀들만 싸워볼 만한 ‘법률 시장’으로 학교폭력 ‘시장’을 만들면, 이런 권력형 학교폭력은 더 빈번하게, 마치 숨 쉬는 것처럼, 권력에 선 자들이 그렇듯, 그렇게 확장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제안한다.

학교폭력의 학생 당사자의 권리, 의무 관계로 만들어 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학교 변호사 제도’ 같은 것으로는 정말 안 된다. 행정절차법으로서의 학폭법을 아무리 정교화해도 아이들은 싸울 수밖에 없고, 학교폭력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의 권력을 반영하고, 이식하기 때문이다. 가슴 아프지만 그렇다. 그리고 학교는 그 권력의 이식을 방어할 어떤 권한도 권위도 독립성과 자율성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갈등과 폭력의 해소방식이 ‘변호사’, ‘법률’, ‘법정'(혹은 학폭위)이라면 이 다툼은 더 복잡해지고, 더 지리해지고, 더 추해지며, 결국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교훈도 없이 아, 힘 있고, 돈 있고, 여유가 있으면 학폭도 해볼만 하구나. 그런 ‘현실적인 교훈’ 밖에는 줄 게 없다.

  1. 학교폭력은 가-피해자 당사자 간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학생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관, 동조의 권력 관계 속에서 촉진되고, 약화되며, 중단되거나 다시 생겨날 수도 있는 유동적인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폭력 문제를 당사자와 그 부모의 문제로 한정시키고, 그들의 법적 문제로 비화하는 현재의 제도는 학교폭력을 해결하기는커녕 악화하는 주범이다. 학교폭력은 작게는 한 학급의 문제, 한 학교의 문제, 지역 사회의 문제, 크게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본질에 맞는 방법론을 취해야 한다. 제발이지 학교 변호사 제도 따위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대증요법적 태도를 버리기 바란다.
  2. 학교폭력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고, 불러야 한다. 학교폭력은 앞서 간단히 살핀 것처럼 1) 고의성 2) 힘의 불균형 3) 반복성을 요건으로 해야 한다. 평생을 연구한 한 권위자의 결론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 선구자(단 올베우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료와 후학이 그것이 옳다고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대신에 세 개의 다른 이름으로 학교폭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것은 1) 학교갈등: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갈등. 고의성, 힘의 불균형, 반복성 중 하나나 둘을 결여한 약소한 갈등, 우발적 폭력을 다룬다. 2) 학교괴롭힘: 진정한 의미에서 학교가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정책을 마련하며 함께 풀어야 할 ‘보이지 않는 학교폭력’의 문제는 대부분 학교괴롭힘에 포섭할 수 있다. 3) 학교범죄: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는 정도의 사건은 학교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왜냐하면 학교는 수사기관도 아니고, 그럴 권한도 없으니까), 이런 심각한 행위는 형사정책적 관점에서 그 단죄와 재범의 방지에 주력한다.
  3.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 학교 3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제도는 교사는 진심으로 교육을 하려고 결심하면 자기 자신을 극단적인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령, 학교폭력이 생겼다고 치자. 그 가/피해 관계가 명확하다고 치자. 열의를 가진 진정한 교사가 그 가해학생을 따끔하게 혼내고, 그 피해학생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게 현재의 기만적이고, 반교육적이 제도라는 걸 명심해라. 그것이 행정절차법으로서 교사를 반교육의 편에 서게 하는 학교폭력예방법이다. 여기에서 학부모와 학생도 피해자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학교폭력예방법은 전면적으로 개정돼야 한다. 특히 위 2의 관점에서 정의(제2조)만이라도 우선 개정돼야 한다.
  4. 끝으로 초경쟁사회(BBC가 바라본 한국)와 그 초경쟁사회의 물적 토대를 구성하는 피 말리는 초경쟁 입시구조 속에서 인성교육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학교폭력은 그 비옥한 토양으로서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경쟁의 바다 속에서 토양 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밖에 없다. 왜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하는가. 왜 모두가 SKY를 열망해야 하는가. 그래야 사람 취급받고, 그래야 연애나 결혼이라도 꿈꿀 수 있으니까. 모든 제도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지자체의 아주 작은 정책마저도 그런 ‘고정된 편견’의 테두리 속에서 움직인다. 이것을 깨뜨려야 한다.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출발점이 대화라는 것. 권력으로 왜곡된 관습과 견고해진 타성을 깨고 스스로 질문하는 것이라는 것은 안다.

당장 그 질문을 하지 않으면, 권력형 학교폭력은 점점 더 늘 것으로 본다. 권력의 ‘참모습’ 아니 왜곡된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자란 그 딸과 아들은 학교에서도 그 권력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탐욕스럽게 모방하고, 과시할 거다. 학교가 딸에게 출석정지를 내린 날, 자신의 SNS에 대통령과 찍은 자기 남편 사진을 걸어놓는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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