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연체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벌금.
미국에서는 연체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공공 도서관이 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반납 기간을 어긴 사람들에게 연체료가 거의 유일한 강제 수단이었는데 이게 효과가 없다는 판단을 뒤늦게 내리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2017년 내슈빌에서 시작했고 시카고와 댈러스, 샌프란시스코로 확산됐다. 2021년 뉴욕도 동참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단순히 연체료를 받을 거냐 말 거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서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연체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 막연하게 생각했던 통념을 뒤엎는 이야기다.
데이터가 말한다.
- 샌디에이고 공립도서관의 연구에서는 연체료를 내는 이용자 50%가 이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두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새너제이에서는 연체료를 하루 50센트로 올린 뒤, 도시의 가난한 주민들의 3분의 1 정도가 도서관을 찾지 않게 됐다.
- 뉴욕에서는 연체로 이용 중단된 이용자 40만 명의 데이터를 조사해 보니 절반 정도가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득이 낮은 지역일수록 연체 비율이 높았고 일부 지역은 5명 가운데 1명 꼴로 연체가 발생했다.
-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도니미크 고밀리온이라는 32세 여성의 사례를 보자. 딸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빌려왔는데 연체료가 50달러가 되자 추가 대출이 중단됐다. 연체료를 내고 다시 책을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고밀리온은 아예 도서관에 발을 끊게 됐다. 당장 생활비가 아쉬운 형편에 50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다른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러 찾았다가 뉴욕의 모든 도서관에서 연체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됐다. 책을 반납하면 밀린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 미국 도서관협회는 도서관 연체료를 “사회적 불평등의 한 형태”라고 규정하고 연체료 폐지를 권고했다.
책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연체료와 반납율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다만 연체료를 없앤 뒤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고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다. 수십년 동안 반납하지 않고 있던 연체 도서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 6개월 동안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 브롱크스에서 2만1000개 이상의 연체 또는 분실 도서가 돌아왔다. 브루클린에서 5만1000건, 퀸즈에서 1만6000건이 반납됐다.
- 실제로 그동안 도서관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돌아왔고 방문자도 9~15% 정도 늘었다.
- 시카고에서는 연체료를 없앤 뒤 반납률이 240% 늘었다. 시카고 도서관국장의 말이다.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책을 되찾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떠난 이용자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했다.”
- 뉴욕타임스는 연체료를 없앴더니 “보물이 굴러들어왔다(treasures roll in)”고 평가했다.
- 이런 편지와 함께 도착한 책 상자도 있었다. “28~50년 전에 빌렸던 책입니다. 나는 이제 75세이고 이 책들은 내가 엄마가 되고 교직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들과 너무 오래 살아서 미안합니다. 가족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 다음 그림은 연체료를 폐지한 미국 도서관을 지도에 나타낸 것이다.

참고할 만한 최근 사례.
- 보스턴에서는 연체료를 없앴더니 1973년에 대출됐다가 51년 동안 장기 연체 중인 책이 돌아왔다. 무려 1899년에 출판된 ‘오브리 비어슬리의 후기 작품’이라는 책이었다. 중고 서점에서 100달러 정도에 팔리는 희귀본이었다.
- 샌프란시스코에서는 6주 동안 연체료 면제 기간을 운영했는데 70만 권이 돌아왔고 5000명이 대출 카드를 다시 발급 받았다.
-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연체료를 두 배로 올렸더니 반납률은 그대로고 대출이 줄었다.
- 샌디에이고 도서관의 경우 연체료 수입이 1년에 68만 달러인데 연체료 관리에 100만 달러가 들었다.
- 샌디에이고 도서관은 1-7-14-30-60 원칙을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면 연체로 분류되고 대출이 중단된다. 7일이 되면 첫 번째 메시지가 나가고, 14일이 되면 두 번째 메시지, 30일에 세 번째 메시지가 나간다. 60일이 되면 도서관 카드가 정지된다. 60일 안에만 반납하면 대출 자격이 복원되고 연체료도 물지 않는다.
- 시카고 도서관에서는 연체료를 없앤 뒤 1년 동안 1만1000여 명이 대출 카드를 갱신했다. 연락이 끊겼던 이용자들이 돌아오고 대출도 7% 늘었다.
연체료의 경제학: 1만 원 때문에 도서관을 끊었다.
-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뉴욕의 공공 도서관은 1800년대 후반부터 연체료를 받았다. 1센트로 시작했다가 1954년 2센트로 올랐고 1959년 5센트로 올랐다. 최근에는 하루 25센트까지 올랐다. (아동 도서는 10센트, 브루클린은 15센트.) 30일이 지나면 분실로 간주해서 교체 비용이 청구됐고 15달러가 넘어가면 대출이 중단됐다. 2019년 기준으로 뉴욕과 브루클린, 퀸즈의 도서관의 연체료 수입이 연간 300만 달러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 연체율의 지역별 소득별 격차도 있었다. 시카고공립도서관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남부 지역에서는 연체률이 30%였는데 북부 지역은 15% 정도로 차이가 컸다. 연체로 중단된 대출 카드 5개 가운데 1개가 14세 미만 어린이었다. 어른들이라면 큰 부담이 없었겠지만 아이들은 연체된 상태로 도서관에 발을 끊는 일이 많았다.
- 이 도서관은 연체료 수입이 전체 도서관 예산의 0.7% 정도라 연체료 수입을 포기하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도서관장 리사 로는 “연체료는 공공 도서관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신뢰와 편안함을 약화시킨다”면서 “공공 자금의 지원을 받는 도서관의 본질적인 임무는 모든 형태의 정보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평한 접근”이라고 강조했다.
- CNN에 따르면 연체료 때문에 반납 기한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이를 테면 한 번 반납 기한을 넘기고 장기 연체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몇 백원 수준의 연체료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몇 만 원 단위가 되면 큰 부담이 된다.
- 뉴욕공립도서관회 회장 토니 막스가 CNN과 인터뷰에서 “도서관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지식과 기회로 연결하는 것”이라며 “연체료가 책을 반납하기 위한 효과적인 인센티브가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라는 게 명확하다면 폐지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 연체료가 도서관에 재정적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2017년 미국도서관저널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체료 수입이 전체 수입 가운데 평균 1.5% 정도를 차지한다. 샌디에이고는 연체료 수입이 연간 68만 달러정도인데 연체료 징수에 드는 비용이 100만 달러에 육박했다. 수입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더 깊게 읽기.
- 관심 있는 사람은 연체료 논쟁을 촉발시킨 위스콘신 공립 도서관의 댄 와섹의 테드 강연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저는 15년 동안 사서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수 십년 동안 도서관에 가신적이 없었죠. 아주 어릴 때 책을 한 권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정말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연체료 이외의 다른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지역사회의 자원을 집단적으로 공유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순서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만약 누군가가 어떤 책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 할 것이고 그건 공평하지 않죠.”
- “운이 좋게도, 우리는 가장 취약한 계층을 두려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도서관들은 넷플릭스 모델로 옮겨 갔습니다. 아마 익숙하실 거예요. 자료를 대여하고 다 본 이후에 반납하면 됩니다. 자료를 반납하지 않으면 더 이상 대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납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죠. 다시 자료를 빌려갈 수 있습니다. 다른 도서관들은 벌금을 계속 부과하지만 대체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벌금대신 음식을 받는거죠. 통조림식품 같은 걸로요. 아니면 벌금을 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책을 소리내어 읽으면 벌금을 면제해주죠. 위스콘신주에는 또 다른 방법을 가진 도서관도 있습니다. 그들은 카운터에서 복권을 제공하죠. 복권을 긁고 10%나 20%의 벌금을 감면받을 수 있습니다. 또 사면의 날도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사면의 날에 연체자료를 가져오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작년에 사면의 날을 진행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도서관이 있는데 이용이 금지됐던 5000명의 회원들이 사면되었습니다. 그 날 도서관은 연체되었던 70만 개 이상의 자료를 돌려받았죠. 그 중 하나는 100년이 넘게 연체되었던 책이었습니다.”
-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알게된 것은 도서관들이 벌금을 부과해온 이유는 자료를 효과적으로 제때 반납 받을 수 있을 거란 강력한 믿음 때문이고 그 믿음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벌금을 부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여지껏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서관이 가진 최고의 선택지는 도서관의 사명을 우선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이 요구한다면 들어줄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 연체료 때문에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린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공공 도서관이라면 보통은 2주, 연장하면 3주 정도의 대출 기간을 준다. 대출 기간이 지나면 연체 기간만큼 대출이 정지되고 대출 정지를 풀려면 하루 100원 꼴의 연체료를 납부해야 한다. 5권을 50일 연체하면 250일 동안 대출을 할 수 없다. 이 경우 연체료는 25만 원이나 된다. 도서관마다 상한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도 연체료 때문에 반납을 포기하는 경우가 상당할 가능성이 크다.
- 2008년 기준으로 서울 시내 18개 공공 도서관 390만 권 대출 가운데 4.4%, 17만 건 정도 연체가 발생했다. 연체료 수입은 도서관 평균 117만 원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래도 남는 의문.
- 책을 빌려서 읽지도 않고 쌓아두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연체료 부담이 없다면 굳이 빨리 반납할 이유도 없을 텐데.
-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니다. 연체 기간이 지나면 대출이 중단되는 건 같다. 뉴욕 공립도서관의 경우 연체 한 달이 지나면 분실 비용을 발생한다. 다만 반납만 하면 분실 비용이 면제되고 다시 책을 빌릴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 반납 기한이 늘어지면 다음 대출자가 피해를 보지 않나.
- 분명한 건 연체료가 반납율을 높인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납을 하지 않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서 없애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반납을 해야 다음 책을 빌릴 수 있으니 반납을 안 할 수는 없다.
- 연체된 상태에서 대출 신청이 들어오면 문자 메시지 등으로 통보를 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 정직하게 기한을 지켜 반납하는 사람들이 손해 보는 게 아닐까.
- 연체료가 교훈을 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텐톤카운티도서관에 편지를 보낸 한 이용자가 이렇게 말했다. “50여 년 전 일인데 어제처럼 기억이 납니다. 처음 연체를 했을 때 사서 선생님이 말했어요. 책을 가져오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이 못 읽게 된다고요. 저는 권위와 규칙, 규정을 존중하도록 자랐고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 사회적 약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연체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 약속은 몇 백 원의 연체료로 지켜지는 게 아니고 연체료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사회적 합의와 선택의 문제다. 오히려 적절한 인센티브와 공공선에 대한 신뢰, 사회 안전망으로 가능하다는 게 일련의 실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생각해 볼 부분.
- 연체료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미국 사회의 반성은 의미심장하다.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즈의 아이들은 컴튼의 아이들이 교실 도서관에 갖고 있는 책보다 네 배나 많은 책을 집에 보유하고 있다. 연체료 몇 만 원을 기분 좋게 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몇 만 원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도서관을 찾지 못할 아이들도 있다.
- 25달러짜리 책이 돌아오지 않으면 손실은 25달러에 그친다. 만약 그런데 한 엄마가 25달러가 부담스러워 도서관을 찾지 않는다면 이 가족은 평생을 도서관에 갈 일이 없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이들을 다시 도서관에 돌아오게 만드는 데는 25달러 이상의 사회적 비용이 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연체료를 없앤 도서관에서는 이용자들과 연체료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사라졌다. 연체 관리가 도서관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일손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용자들을 혼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서들의 업무 만족도도 높아졌다.
결론.
- 연체료 100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연체료 몇 천 원 때문에 도서관에 발을 끊고 장기 연체자가 되는 사람도 많다. 이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가.
- 그나마 연체료를 안 받으면 연체가 급증할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반납을 더 잘 한다는 게 다른 나라의 경험이다. (물론 한국은 다를 수도 있다.)
- 패널티는 대출 중단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책을 더 읽기 위해서라도 반납을 하게 만들면 된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도서관 이용 자격을 잃는 것이다.
- 어차피 연체할 사람들은 한다. 이들이 늦게라도 돌아오게 만드는 게 핵심이다. 가장 안 좋은 건 책을 들고 잠수 타는 것이다.
- 책이 돌게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