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리포트] 한국 정부 엘리엇 상대 패소. 무효소송을 내도 뒤집힐 가능성은 없다. 책임 있는 사람이 책임지는 게 맞다.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한국 정부가 패소했다. 9900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는데 7%만 인정됐다. 그래도 크다. 690억 원에 법무 비용과 이자까지 포함하면 1300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한가.
- 한국 정부가 삼성전자 이재용 일가의 3세 승계를 도우려고 국민연금을 동원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 표를 던지게 했고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 사실이 인정됐다.
- 이재용 일가와 제일모직 주주들이 이익을 챙겼고 삼성물산 주주들이 손해를 입었다. 삼성물산 주식을 들고 있던 헤지펀드가 손해 배상을 청구해서 이겼고 그 배상금을 국민들 세금으로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다.
- 한국경제신문은 “사실상 승소”라는 표현을 썼고 한국일보는 “선방했다”고 평가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것이다.
- 박근혜(당시 대통령)가 문형표(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를 시켜 홍완선(당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 삼성에 유리한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라고 지시했다.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국민연금이 입은 손실은 최대 5865억 원에 이른다(평가하기에 따라 다르다). 분명한 것은 만약 국민연금이 반대 표를 던졌다면 합병이 부결됐을 거란 사실이다.
- 이재용은 합병을 도와준 대가로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433억 원의 뇌물을 건넸다.
- 박근혜는 징역 22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사면으로 풀려났고 이재용은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가 파기 환송심에서 2년6개월로 줄었고 그나마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문형표와 홍완선도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더 깊게 들어가 볼까.
- 그때나 지금이나 이재용의 아킬레스건은 삼성전자다. 그룹의 핵심인데 지분이 적다. 2015년 기준으로 이건희와 이재용 지분을 다 합쳐도 4% 밖에 안 됐다.
- 대신 삼성생명과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각각 7.2%와 4.1% 확보하고 있었고 제일모직이 삼성생명 지분을 19.3%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재용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지배하면 몇 다리 건너 삼성전자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였다.
- 이재용 일가가 보유한 제일모직 지분을 다 더하면 42.2%인데 삼성물산 지분은 1.4% 밖에 안 됐다. 삼성물산이 또 약한 고리였고 그래서 두 회사를 합병하는 게 후계 구도의 핵심이었다. 당연히 이재용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 기업 가치를 높게 평가 받는 게 유리한 상황.
- 그래서 내놓은 게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1 대 0.35로 합병하자는 안이었는데 삼성물산 주주들 입장에서는 펄쩍 뛸 일이었다.
- 실제로 나중에 공개된 국민연금 내부 감사 결과를 보면 적정 비율을 1 대 0.64로 잡았다가 하루만에 1 대 0.39로 낮춰 잡았고 다시 1 대 0.46로 만든 사실이 확인됐다. 3500억 원 이상 손실을 입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삼성물산의 가치를 낮춰잡았고 이런 계산을 근거로 찬성 표를 던진 것이다.
들통날 걸 몰랐을까.
- 엘리엇 등이 합병 비율이 부당하게 산정됐다며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를 보유하고 있었다.
- 그 사이에 홍완선이 이재용을 여덟 차례 만난 사실이 확인됐다. 투자위원회를 앞두고 이틀 앞두고 홍완선이 위원 12명 가운데 3명을 교체했고 이들이 모두 찬성표를 던진 사실도 확인됐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 오죽하면 합병 다음날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총동원돼 삼성의 후계자 체제 안정을 도와준 셈”이라면서 “삼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한민국 전체가 삼성을 위해 뛰어줄 것이라고 낙관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발가벗고 뛰는 바람에 엘리엇이 소송을 걸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의 승소? 선방한 건 맞나.
- 정신 승리일 뿐이다. 애초에 엘리엇이 주장한 손해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 엘리엇은 합병 직전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서 지분을 털고 나갔다. 손실 규모가 100억~700억 원 정도일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 엘리엇은 소장에서 718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지만 합병 비율을 1.6 대 1로 잡아야 한다는 계산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시장의 평가에서 크게 벗어난 규모였다.
- 엘리엇이 1300억 원을 챙긴다면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 대통령까지 나서서 거든 이 빅딜의 결과, 이재용 일가의 삼성물산(제일모직) 지분은 30.4%로 늘어났다. 국민연금이 자체 추산한 적정 비율 보다 3%포인트 정도 지분이 늘어났는데 당시 주가로 환산하면 8000억 원에 육박한다.
- 결국 국민연금이 3500억 원 손실을 본 대가로 이재용 일가는 8000억 원을 챙겼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헤지펀드에 1300억 원을 또 국민들 세금으로 물어주게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 다른 헤지펀드가 낸 소송이 하나 더 남아있다. 정확히 같은 내용의 소송이다. 메이슨캐피털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 지분 2.2%를 보유하고 있었다.
론스타 사건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 론스타가 나쁜 놈들인 것과 별개로 한국 정부의 과실이 명확했다. 애초에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었지만 그걸 승인한 게 한국 정부라 론스타에 문제를 삼긴 어렵다. 론스타가 팔고 나가겠다고 했을 때 먹튀 논란을 의식해 매각 승인을 거부했던 건 명분이 부족했다. 결국 2억1650달러를 배상했다.
- 엘리엇은 선의의 피해자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앞두고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였던 사람들은 한국 정부가 이렇게 작정하고 삼성물산 주가를 후려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ISD 소송은 한 번으로 끝난다. 무효소송을 내도 뒤집힐 가능성이 전혀 없다.
교훈.
-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정부는 이 사건의 책임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 1300억 원은 박근혜와 이재용이 나눠서 내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