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게 별것 아니다.
복수다, 응보다.
행위로 보면, 죄지은 만큼 벌을 받아라.
행위자로 보면, 악당이 잘살지 못하게, 착한 사람이 잘살게.
그게 정의다.
악당에게든 착한 사람에게든 그 대가를 주는 것.
그래서 악하게 살지 말라고 꾸짖고, 착하게 살라고 응원하는 거, 그게 정의다.
그렇게 정의가 실현된 뒤에야 악당도 용서받을 수 있고, 다시 공동체 속에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 글은 복수의 의미에 관해 그리고 2021년 한국 사회가 도달한 ‘정의’에 관해 그리고 한 성공한 인간의 ‘옹졸함’에 관해 그리고 국민청원 사이트의 ‘알 수 없음’에 관해 생각해보는 글이다.
종교 속 정의 혹은 복수
종교로 보면 이슬람 경전 꾸란(코란)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명령하여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코는 코로 귀는 귀로 이는 이로 상처는 상처로 대하라 했으니. 그러나 자선으로써 그 보복을 하지 아니함은 속죄됨이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결하지 아니한 자 바로 죄인들이라.” (꾸란, 5:45)[footnote]‘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에서 발췌[/footnote]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한 이슬람 형벌인 ‘키사스(Qisas)’가 바로 이 구절에서 유래했고, 이슬람 율법 ‘샤리아'(‘길’이라는 뜻)는 가장 무거운 법적 근거를 이 꾸란 구절에서 확보한다.[footnote]이슬람 율법 ‘샤리아'(‘길’이라는 뜻)는 1) 꾸란 2)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기록) 3) 이즈마(새로운 문제에 관한 신학자들의 ‘만장일치’ 해석) 4)키야스(꾸란과 하디스에 대한 유추해석)을 그 법원으로 삼는다.[/footnote] 그런데 꾸란만 그런 건 아니다. 기독교 성경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여러 곳에 등장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구약성서 ‘레위기’인데, 레위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레위기 24:17-21)
예수 혁명
하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하면서 복수에 관한 인식을 전복한다. 예수는 산에 올라 제자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세리’ 마태는 훗날 사도가 되어 예수의 목소리를 이렇게 기록한다.[footnote]사도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다른 사도를 칭할 때는 그 이름만 이야기하지만, 자신만은 유독 이름 앞에 ‘세리’를 덧붙인다. ‘세리’는 ‘세금 거두는 사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금 징수 관리 밑에서 일하는 부관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광야에서 가장 잔인한 짐승은 곰과 사자이지만, 도시에서 가장 잔인한 짐승은 세리와 기생충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리를 미워했고, 경멸했다. 세리들은 성전이나 회당에 들어가기도 어려웠고,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금기시됐으며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도 거부되었다. (참조: 성경지킴이, ‘성경에 나오는 세리’) [/footnote]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38-44)
하지만 역사를 통해 보건대, 기독교가 서구의 지배적인 통치 논리와 결합할 수 있었던 건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플라톤주의), 주인를 극복하는 노예의 복수심을 바꾸는 예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건 적지 않은 이들이 지적한 바다. 지금(현세)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라. 그 고난과 핍박이 천국(내세)에서의 영광과 축복을 약속한다. 얼마나 달콤한가. 얼마나 끔찍한가.
억압받고, 착취당한 자의 자기 극복은 지배하는 자, 짓밟는 자를 향한 적극적인 복수를 통해서만 성취된다. 하지만 예수는 그 복수심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사제적 권력으로 ‘노예의 복수’ 계획에 개입한다. 그리고 주인을 극복하려는 노예의 복수는 실패한다. (니체)
물론 그 사랑 때문에 예수는 더 위대하지만, 그 위대함을 실천하기에 인간은 너무 하찮다. 그리고 니체의 말처럼,
“기독교도는 사실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니체, 반그리스도)
악당은 부지런하다
그렇게 역사는 켜켜이 쌓여왔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악당은 찌질하지만, 그 욕망 때문에 부지런했고, 착한 사람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빛나지만 결정적으로 게을렀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잠언, 항상 그 문장에 저항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잠언.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Edmund Burke)
J와 그 처를 보면, 그 부지런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내가 설명할 ‘그 사건’만으로 J가 무슨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말하는 건 전혀 아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지만, J와 그 처가 자신의 소유물과 특권의식에 대해 갖는 감정, 그 충성심이랄까, 맹렬함이랄까… 아주 짧게 본 화면만으로도 그런 순수하게 뒤틀린 욕망이 보인다. 이제 J와 그 처가 무슨 짓을 했는지 살펴볼 차례다.
‘미스터리’한 국민청원
우선 암호문처럼 작성된 국민청원 게시물을 하나 보자. 먼저 알리자면, 이 청원 게시물은 당연히 ‘J’에 관한 청원이다.
나는 ‘실화탐사대’를 봤기 때문에 이 게시물 내용이 뭔지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실화탐사대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국민청원 게시물만으로는 그 내용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분들의 갑질”에서 “저 분들”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이다.
작성자께서 그렇게 일부러 모호하게 썼다면 할 말 없다. 그런데 글 말미에 뭔가 ‘찌뿌둥’한 느낌의 괄호 문장이 있다. 원문의 어떤 구절, 어떤 표현이 “국민청원 요건에 위배되어 관리자에 의해 수정”되었는지 궁금하다. 더불어 “국민청원 요건”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하고, 어떻게 “수정”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알 길 없다.
국민청원 해당 페이지에서 “국민청원 요건”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 웹페이지 바닥(푸터)에 있겠거니 하고 봤는데, 아무리 눈알을 굴려도 안 보인다. 안내전화(02-730-5800)로 전화해봤지만, 의미 없는(?) 자동반복 안내만 두 번이나 세 번 반복되다가 끝난다. 왜 굳이 전화번호를 넣은 걸까? 이런 건 그냥 웹페이지 적어서 안내해도 충분할 텐데. 그야말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아무런 안내원도 등장하지 않는, 어떤 사람과도 연결할 수 없는, 그리고 별 안내 기능도 없는 그런 전화번호다. 그 허탈함을 직접 느껴보고 싶은 분은 한번 걸어보시라.
하나 더 이야기하면, 여기에 올라온 게시물과 정보의 성격상 (최소한 국민청원 게시물은 예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청와대 저작권”(“ⓒ Office of the President, All rights reserved”)을 주장할 게 아니라 최소한 CCL(조건부 저작물 이용 설정) 아니면 ‘공공누리’(공공저작물 자유이용) 설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이제 이 미스터리 게시물의 내용을 알기 위해 실화탐사대를 탐사할 시간이다.
실화탐사대, 전직 장관 ‘J’를 고발하다
위 실화탐사대 “강남 전원마을 소형평수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제보자는 한 강남의 (럭셔리한) 전원마을에 (‘작은’) 집을 짓고 싶어 하고, 소송까지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해당 관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얻었다. 하지만 2년째 공사가 지연되고 있다.
-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 특히 제보자의 집이 들어설 맞은편에 있는 ‘전직 장관 J과 그 처’와 어느 재벌가 ‘사모님’이 제보자 집 건축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 이들은 건축자재 차량의 공사 현장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을 수시로 바꿔가며 공사 현장에 주차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방해해 왔다.
- 제보자의 가장 큰 불만은 정당한 권리로 내 땅에 내 집을 짓는데, 이렇게 계획적으로 명백하게 집짓기를 방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공권력이 아무런 일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가끔 나와서 ‘교통정리'(건축 방해를 위한 목적으로 주차된 차량 주인들과 실강이)하는 정도.
- 일부 마을 주민들이 제보자 집짓기 반대하는 ‘명분’은 해당 마을의 ‘도로’가 오래 전 기부채납을 통해 건설된 ‘원주민’의 사유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임승차’라는 논리인데, ‘실화탐사대’의 보도에 따르면, 사유지를 기부채납한 원주민들은 오히려 제보자의 집짓기를 반대하지 않았고, 제보자 집짓기를 극렬하게 반대, 방해하고 있는 주민들 역시 새로 입주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 이들은 위 ‘무임승차’ 논리의 연장에서, 제보자에게 이 마을에 입주하고 싶다면, ’12억 5천만 원’의 마을발전기금을 내고 들어오라고 요구한다고 함. 물론 제보자는 그럴 돈도 없고, 그 돈을 낼 이유도 없다는 입장.
- 한편, 마을 주민들의 집짓기 ‘방해 공작’에 탁월한 능력(?)을 뽐내는 이가 있었으니 검은 패닝을 입은 할머니. 집짓기 반대 마을 주민이 고용한 ‘용역’일까? ‘실화탐사대’ 취재진은 그 정체가 몹시 궁금하다며 그를 수소문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알고 보니 그 검은패닝 할머니의 정체는 전직 장관 J의 처였다!
- 오늘도 제보자는 떡 한 접시를 들고 강남 럭셔리 전원 마을 주민들에게 집짓기를 방해하지 않길 호소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2019년 7월 YTN도 짧게 보도한 적 있다.
J, 2조 건설사 인수 계획 중?
그러던 중에 다소 아이러니하고 일견 황당한 뉴스를 접했다. 우리집 ‘뷰’를 가리는 작은 3층집은 짓지 못하게 할 거지만, 2조 원 건설사는 인수해보겠다? J가 대표로 있는 사모펀드가 매물로 나온 대우건설 인수에 나서고 있다는 뉴스. 실화탐사대가 방영되고 이틀 뒤에 난 기사다. J의 포부가 그야말로 웅장하다.
J에게
나쁜 사람을 응징하지 못하고, 착한 사람을 응원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어떤 식으로든 붕괴한다. 악은 주로 파멸에 관여하고, 선은 주로 생성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질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정신에 관해, 마음에 관해,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공평한 ‘영혼’에 관해 말하는 거다.
왜 가질만큼 가진 인간들은 더 가지려고 하는가.
왜 그들의 욕망은 이토록 집요한가.
그의 갑질은 그냥 잊혀도 되는 걸까.
그 집요하고 무서울 만큼 끈질긴 욕망으로 그는 끊임없이 성취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참 부럽다. 그 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그 집요하고 무서우며 끈질긴 욕망이 이토록 초라할 수도 있다는 게 나 같이 아무런 성취도 없는 삶, 별다른 물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쩌면 위안이다.
그건 그에게도, 나 같은 소심한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도 참 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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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국민청원 한방!
나는 왜 이런 글을 쓰는가? 에드먼드 버크의 경고가 너무 짜증이 나서다. 왜 악당은 매번 그렇게 승리하는가. 내가 무슨 착한 사람이고, ‘J’가 무슨 절대악이라는 건 아니다. 선악의 경계는 항상 희미하고, 내 몸와 마음 속에 선악은 뒤엉켜 있지만, 그럼에도 선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모든 종교를 넘어서 가장 위대한 건 사람들의 ‘친절’이다. J와 그 처는 너무 친절하지 못하다.
그래서 ‘J’와 그 처의 갑질을 알리고, 그 갑질을 고발하는데 소심한 목소리라도 하나 더 보태려고 이 글을 쓴다. 이 글의 취지에 공감한다면, 그리고 1~2분쯤 짬이 난다면, 저 ‘미스터리’한 국민청원에 들려주시면 좋겠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