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울 수 있다”
(星星之火 可以燎原; 성성지화 가이요원)
– 마오쩌둥
[adsense]중국이라는 땅이 나에게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다가온 것은 내가 10살이었던 2003년이었다. 그전까지 중국은 짜장면과 탕수육 등 ‘중국집’으로 불리는 요리의 고향이거나 삼국지가 펼쳐졌던 실감 나지 않는 어떤 공간이었다. 이것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웃 나라로 갑자기 성큼 다가오게 된 계기는 너무나 명확했다. 학교에서도 TV에서도 중국에서 ‘사스’라고 하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이라는 괴질이 퍼져나가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 사스는 단 4명의 감염자로 그치고 사망자도 0명으로, 완벽에 가깝게 방어해냈기 때문에 그 단어는 이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저 10살 무렵 나의 기억을 형성하던 수많은 다른 단어들과 함께 묶여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나라를 공부하면서, 오랜 세월 망각하고 있던 이 질병이 다시 내 머릿속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질병은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중국 사회와 국가가 변하고 있다는, 혹은 변해야 한다는 신호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사스를 방치한 이유
2002년 11월 16일, 광동성의 포산 시에서 원인미상의 감염 환자가 최초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광동성, 혹은 포산시의 그 누구도 이 환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로 전 날인 11월 15일에 제16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폐막했기 때문이다. 이 당대회에서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시장개혁을 진두지휘 해온 장쩌민과 주룽지가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덩샤오핑이 낙점했다는 차기 지도자인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21세기의 중국을 지도하게 될 것으로 확정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민주국가의 선거보다도 더욱 중요한, 전국 단위의 권력 교체가 줄줄이 예정된 셈이었다. 거기에 당대회가 끝나고, 1-2월에는 지방 양회가 개최되고 3월에는 한 해 가장 큰 정치행사인 전국 양회(兩會; 매년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간에 열리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인민정협’)를 공히 가리키는 말)가 개최될 터였다. 이 무렵 발표될 정책들과 한 해 목표들, 복잡다단한 정치적 물밑 작업과 엘리트 간의 자원 분배는 모든 중국 당관료들의 이후 행보를 정하게 될 것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향 고양이에서 유래했다는 그 미심쩍은 전염병은 광동성에서 사실상 방치되었다. 현지 보건 당국은 그 전염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고, 상부로 보고하기를 계속해서 주저했다. 아마 권력교체기라는 민감한 시점에서, 공산당의 인사고과에 불리한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상부도 그런 보고를 원치 않았다. 천안문 이래로 중국 공산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불안정이었다. 아니, 사실 옛날부터 ‘조정’은 막강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천하와 강호의 움직임을 두려워했다는 점에서 이는 수천년 된 두려움이었다. 확인되지도 않은 전염병 소식으로 인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틈을 타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2003년 1월, 감염이 광동성에서 더 확산됨에 따라 의료당국은 이 질병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를 시작했다. 1월 27일, 광동성 보건국 측으로 보고서가 올라갔다. 따라서 관련 문건들은 아마도 북경까지 보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주의 깊게 회람되지 않았다. 결국 1월 31일, 훗날 사스 ‘슈퍼 전파자’로 기록될 한 환자가 광저우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 사이 그는 숱한 의료진을 감염시켰다. 2월 21일, 그 과정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산대학교 리우 지앤룬 교수는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홍콩에 방문했다. 이후 그가 홍콩에 방문했을 때 묵었던 메트로폴 호텔 911호는 세계를 휩슨 사스 유행의 진원지로 지목 받게 된다. 전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홍콩에서 본격적으로 전염병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 통제 vs. 정보 연결 … 그리고 폭로
[adsense]이 무렵부터 신종 질병에 대한 세계인들의 의구심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고, 타국민까지도 그 피해 범위에 들어왔는데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 해도 중국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심지어 전염병의 진원지인 광동성에도 정보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2월 내내 광동성에서는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괴담이 확산되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3월에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전염병이 베이징에 상륙하고, 그 달 말에는 더 북쪽인 내몽골까지도 진출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묵묵부답이었다. 새 정부가 꾸려진 뒤 치러지는 첫 양회를 망치고, 전염병 걱정에 경기가 둔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래로 20년 이상이 흘렀고, 개혁개방이 진정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된 남순강화부터 따져도 10년의 세월이 흐른 터였다. 이제 중국은 더는 공산당 선전부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했고, 자국 내에서의 연결은 더욱 늘어났다. 도시와 주변 농촌이, 또 도시와 도시 사이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사람과 정보가 오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통로로 질병도 오간 것이고 말이다. 따라서 이 미생물과 정보의 흐름을 더이상 당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당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터넷과 휴대전화라는 새로운 소통 수단도 상대해야만 했다.
당국의 정보 통제라는 댐은 홍콩과 본토를 오가는 기자들에 의해 뚫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일국양제가 작동하던 홍콩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질환에 관한 정보를 공유받고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본토 출신 기자들은 자신들에게서 차단되고 있던 정보를 새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토로 돌아간 기자들 중 일부가 검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이 통제하는 공식 언론의 첫 관문이 뚫렸다. 그 다음은 소문이었다. 홍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소문, 검열되기 전의 언론기사를 본 사람들이 퍼트린 소문들이 이메일,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각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염병이 광동에서 시작됐고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더는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3월 말, WHO와 협조가 시작되면서 중국 당국은 제한적이나마 관련 정보를 외부인들에게 제공해야만 했다. 물론 외부인 입장에서는 당장 중국 정부가 모든 정보에 관해 전면적 협조를 시작해야 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권력과 그 기반인 사회안정이었지, 투명한 정보와 즉각적 위기관리는 아니었다. 4월, 장원캉 국무원 위생부장은 베이징에서 고작 12명 환자가 있을 따름이고 상황은 통제 가능하다고 발표하며 대내외적 신뢰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베이징의 사스 실태를 알고 있던 인민해방군 퇴역 군의관인 장옌융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인민해방군 301 병원을 비롯한 세 군데 병원만 이미 120명 이상의 환자가 있다고 폭로해버린 것이다. 중국 국영 CCTV는 장옌융의 폭로를 외면했지만, 이 소식은 외신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WHO와 각국 정부를 비롯한 외국인들과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불안에 떠는 중국인 모두가 당국에게 진실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사스로 ‘반쪽지도자’에서 벗어난 후진타오
그 시점에서, 새로 권력을 얻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다. 왜냐면 후진타오는 국가주석과 당총서기 직위만 승계 받았지,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직위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승계 받지 못한 ‘반쪽짜리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장쩌민이 나라를 여전히 통치한다고 생각하기 딱 좋았고, 사실 그게 맞았다. 장원캉 위생부장은 애초에 장쩌민의 주치의였고, 당연히 그의 심복이기도 했다. 13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면서 만들어놓은 장쩌민 계파를 뚫고 들어가기에, 내륙의 한미한 출신인 후진타오의 힘은 아직 약했다.
[adsense]하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인 사스가 그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서 잔혹한 진압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남자였지만, 그는 동시에 개혁파 지도자인 후야오방 밑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배경도 갖고 있었다. 총리 원자바오는 역시 다른 개혁파 지도자인 자오쯔양의 밑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 둘은 장쩌민 식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통치보다는 더 개방적인 통치가 앞으로의 중국에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고압적이고 폐쇄적인 행보가 사태를 일파만파 악화시키고 있음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이제 정보를 공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장옌융의 폭로 이후, 후진타오는 위생부 부장인 장원캉과 북경 시장인 멍쉐눙을 경질하고,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사스에 대한 전 인민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하였다.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베이징의 사스 감염자가 37명 밖에 안 된다고 주장하던 보도는 이후 곧바로 베이징 시민 340명이 감염되었으며 전국적으로는 1,800명이 감염되었다는 보도로 바뀌었다. 최초 발병 이래로 5개월이나 흐른 시점이었지만, 아직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전염병이 확대되지는 않던 상황이었다. 정보가 흐르고 각급 지방정부들이 중국이 자랑하는 거대한 동원력을 활용해 전면적 방역에 나서면서 사태는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정보를 계속 은폐하려고 하거나 태업을 벌이는 관료들에게는 계속해서 징계, 경질, 출당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후진타오는 마침내 전임자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자신의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출발선에 간신히 설 수 있게 되었다. 사스는 이제 마오쩌둥 시대의 단순했던 중국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국제 무역에 참여하면서 놀랍도록 복잡한 사회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전염병이 온 대륙과 세계 전역을 패닉 상태로 몰아붙인 것은 중국 내외부를 연결해주는 교통이 발달하고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국은 미생물은 통제 못하면서 정보를 통제하려 함으로써 중요한 방역 시기를 놓쳐버렸다. 후진타오는 이 상징적인 실패를 활용해 더 복잡해진 중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더 열린 정책 노선을 주문하게 될 터였다. 물론 그의 임기 내내 쓰촨성 지진, 멜라민 분유 파동, 원저우 열차 사건등이 그를 계속 괴롭혔고, 이 과정에서도 중국 당국의 고질적인 정보 은폐와 검열은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adsense]그러나, 어쨌든 ‘겨우 그 정도’에 그쳤을지라도 사스는 중국을 바꾸었다. 후진타오 시대 중국이 더욱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중산층이 늘어났고, 그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당관료들은 각종 사고와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해야만 했다. 산업재해, 교통사고, 보건과 식품위생, 환경오염 등 시민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 국가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언론의 보도도 더 자유로워졌다. 물론 위에 언급된 숱한 사례처럼, 전국적으로 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사건에는 여전히 엄격한 보도 통제가 이루어졌지만, 대중의 일상 영역에서 일어나는 잦은 사건 사고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보도가 되어 무언가 조치가 취해지곤 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고, 근본적 제한이 있었지만, 어쨌든 진전은 진전이었다. 이것이 내가 10살 무렵 짧은 뉴스로만 기억하던 ‘사스’ 사태의 숨겨진 전말이었다.
17년 전과 ‘같은 것’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17년이 지난 지금, 사스의 경험이 무서우리만치 똑같이 우한에서 반복되고 있다. 먼저 중국인 특유의 야생동물 섭취 문화가 만들어낸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점에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스와 판박이다. 하지만 유사점이 여기서만 그쳤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마치 2002년 광동에서 당대회와 양회사이의 기간에 ‘태평 천하’를 연출하려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처럼, 2019년 12월 후베이와 우한에서도 1월에 있을 성급(省級)[footnote]’성(우리나라의 ‘도’) 단위에서 열리는'[/footnote]양회를 앞두고 사태를 의도적으로 축소, 은폐, 경시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스에 대항한 ‘성전’의 기억이 있는 나라에서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한 것일까? 이는 아마 후진타오 정부에서 시진핑 정부로의 성격 변화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비교적 우호적이고, 전면적은 아니나 정치적으로 더 개방된 질서를 원했던 이전 정권의 성격이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히 퇴조했다. 물론 이 흐름에 나름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위기, 사회 혼란, 당내 갈등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에 후진타오의 리더십은 너무 허약했다. 당은 다시 사회 안정을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맡도록 소환되었다. 공산당의 더욱더 적극적인 영도 하에 중국 인민은 중국이 다시 세계 정상의 국가에 올라서는 ‘중국몽’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로 당의 권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어야 하고 ‘허튼 일’로 대중적 소요와 사회 혼란이 발생하는 일이 전면 차단 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베이성과 우한시 당 관료들 입장에서 새로운 괴질을 은폐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개혁개방 이래로 중국은 줄곧 각급의 당관료들을 지방 행정부에서 경쟁하게 하고, 실적이 좋은 이들에게 상급 행정기관을 맡기는 인사 정책을 시행해온 터였다. 이는 개혁개방의 흐름을 한창 탈 무렵 경제성장을 촉진시킨 효과적인 정책이었음이 드러났다.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각 지방 정부의 수장들은 기업의 수출과 도시 발전을 위해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건설하고, 각종 제도적 혜택과 혁신을 고안하여 더 높은 실적을 거두고자 했다. 한 지방정부에서 얻어진 성공은 다른 곳으로 빠르게 복제되어 중국 전역이 분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인사정책이 위기대응 능력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실적은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기록되어 승진에 좋게 활용되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이나 실패는 절대 자신의 것이 되면 안 되었다. 어차피 몇 년 근무하고 떠날 근무지 아닌가? 임기 내 최대한 사고 없이 무탈하게 보내 실적을 쌓아 상급 기관으로 영전하는 것이 지방 관료들의 목표가 되었다.
가깝게, 리커창 총리가 허난성 성장에 부임하자마자 발생한 매혈로 인한 에이즈 위기는 그의 승진에 계속해서 걸림돌이 된 바가 있었다. 중국의 당관료로서 성공적인 출세 가도를 걷고자 한다면, 이런 불운을 최대한 피해야했다. 즉, 윗선에서 들릴 잡음이 나면 절대 안 되었던 것이다. 특히 양회와 같이, 당이 인민에 노출되는 중차대한 행사를 앞두고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1월 12일에 있을 양회 전에는 어떠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있어도 묻어라. 양회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징으로 보고 올리지 마라.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이 후베이성 당지도부의 생각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서는 추측만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17년 전과 ‘다른 것’
[adsense]사실 이뿐만이 아닌 것이 더 문제다. 지금까지는 17년 전과 같은 것을 보았지만, 17년 전과 달라진 것도 많기 때문이다. 먼저, 발병지가 그렇다. 사스는 중국 남쪽 끝 광동성의 한 지방 도시에서 최초로 발병했다. 따라서 포산에서 11월에 첫 환자가 나오긴 했어도 이 질병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될 발판인 광저우에 도달하기까지는 약 두 달, 세계적으로 번져나갈 허브인 홍콩에 번지기까지는 약 세 달이 소요된 터였다. 중국 당국의 늑장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키긴 했지만, 초기 국면에서 속도가 그렇게까지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혀 달랐다. 한낱 지방도시가 아닌, 인구 1,100만 명이 거주하는 메트로폴리스의 한 가운데서 질병이 발병하였다. 거기에, 이 지역은 다른 곳도 아니라 남북으로 베이징과 광저우를 잇는 징광 고속철도, 동서로 상하이와 청두를 잇는 후한룽 고속철도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 중의 요지다. 따라서, 전염병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뒤 중국 전역, 나아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갈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더하여, 2003년에 비해 중국의 경제적 수준이 놀랍도록 팽창함에 따라 위험은 가중되었다. 다른 도시를 이동하는 데 며칠씩 걸렸던 일반 열차는 이제 대륙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시켜주는 시속 300km의 고속철도망으로 바뀌었다. 구매력이 늘어나고 시간 압박이 늘어나면서 이마저도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은 중국 각지 도시, 나아가 세계 유수의 도시를 연결시켜주는 항공편을 찾았다. 거기에 사스 당시 40%가량이던 도시화율은 17년 사이 60%로 늘어나면서, 인구 밀집 지역의 크기는 더욱 커졌다. 육로, 해로, 항공로 모든 면에서 그 인구 밀집 지역 간의 연결망이 중국 정부의 대규모 토목 건설 투자로 촘촘하게 깔린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조금 더 무리한 추정을 해보아도 될 것 같다. 사망자와 확진자는 중국 당국이 집계·발표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많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사스 당시에도 중국 정부는 사회 안정을 위하여 계속해서 정보를 은폐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장옌융이라는 의인의 폭로와 그 이후 시스템적 개선이 있었지만, 그 방향의 개선이 시진핑 정부 들어서 강력해진 중앙정부의 통제책으로 무위가 되었다면, 현재 나오는 자료 역시 의심이라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질병이 세계적 재난(판데믹)으로 번지거나, 중국이 이번 질병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과한 추정까지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미흡함을 보여줘 신뢰를 상당히 잃긴 했어도, 17년 간 중국의 방역 역량은 어쨌든 늘어났을 것이고 세계적 대처 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중국 당국이 지금에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중국 공산당의 영구적 안녕을 위해 총력을 다해 자원을 투입한다면, 아무리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을지라도 끝내는 통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공조가 이어지고 의료진과 연구진, 방역 당국의 분투가 이어진다면 마찬가지 결과를 얻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생명이 희생될 것이도, 엄청난 자원이 소모되며, 살아남은 자들도 과거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 긴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 대상이 될 인구가 봉쇄 영역에 있는 최소 3천만 명으로 시작한다는 게 이전 위기와는 상당히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당이 승리한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17년 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
2003년과 대비하여 가장 결정적으로 달라진 마지막 요인을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작은 기기다. 사스 당시 사람들은 이메일, 문자메시지와 같은 텍스트 자료로 소문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기기가 갖고 있는 능력의 한계가 딱 거기까지 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다르다. 2010년대에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중국 전역에 수억대가 뿌려졌다. 이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영상을 촬영하여 인터넷 광장에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중국 공산당은 ‘자유의 무기’로 인식되었던 이 스마트폰을 역발상으로 ‘자발적 통제의 무기’로 뒤집어 사용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노력은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던 것 같다. 이번에는 중국 공산당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회 소요가 아니라, 생물학적 소요가 등장했음이 확실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 우리는 유튜브와 트위터에서 우한에서 촬영되었다는 수많은 영상들을 실시간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거리를 걷다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마스크를 한 사람들, 혼잡한 병동에서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 어떻게든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마트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시민들의 처절한 울부짖음, 봉쇄령이 떨어지자마자 탈출 행렬로 꽉 차버린 우한의 고속도로, 방호복을 입고 총을 든 채 역을 지키고 있는 대원들, 이미 환자는 9만 명이 넘었고 2차 변이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는 간호사의 목소리, 후베이성 서기와 성장에게 중국인에게 있어 민주와 자유의 의미를 묻는 우한의 젊은이. 한 유튜버가 이를 소개해주면서 외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지금 이렇게 많은 영상들이 위챗에 돌고 있는데, 이 많은 영상들을 전부 가짜로 찍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이 상황에서 시진핑 정부가 아무리 강력한 당의 권위를 외친다 하더라도, 생존을 향한 이 수백만의 절규들을 막을 수 있을까? 늦어도 한참 늦은 봉쇄령으로 갇혀버린 3천만 명의 인민에게, 이미 깨져버렸을 당에 대한 신뢰를 선전만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정부 당국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과장된 괴담과 공포의 불길을 이제 꺼버릴 수 있을까? 바다 건너 타국 사람들도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그 나라 안에, 그 봉쇄지구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바이러스’ 이후의 중국
우한은 본래 장강 중류의 무창(우창), 한양, 한구(한커우)라는 세 개 도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곳이다. 이 도시는 장강 중류 물류의 중심지로, 청제국이 개항을 하면서 더욱 빠르게 발전하여 열강들의 조계지까지 설치된 곳이기도 하였다. 약 100여년 전인 1911년, 바로 이 도시에서 사천 지방의 보로 운동을 진압하러 가던 호북 신군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청제국의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이 곳에서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고,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자 대부분의 지역들이 봉기에 동참하게 된다. 마침내 전국적 봉기가 이어져 2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의 청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아니, 시황제 이래로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을 통치하던 황제 전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신해혁명’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신해혁명의 신호탄은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던 도시의 이름을 딴 ‘무창 봉기’로 간주되는 바이다.
무창봉기로부터 1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중국 대륙에서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외세에 의해 착취 받던 중국은 오히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났다.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무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패권국인 미국마저도 중국과 ‘협상’을 해야한다. 한편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민들의 수는 이제 부지런히 메트로폴리스를 오가는 도시민들보다 적어졌다. 이제 말 그대로 ‘불야성’인 번쩍번쩍 빛나는 거대한 도시들이 대륙을 수놓고, 그 도시 밑에는 거미줄 같은 지하철이, 도시들 사이는 수개월 걸리던 거리를 수시간으로 줄여주는 고속철이 가로지른다. 인민들의 삶은 여유로워졌고 사람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대비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해혁명과 신중국 성립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이 이루어냈다고 자부하는 성과들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자유선거는 단 한 차례밖에 치러지지 않았다. 관리들은 여전히 인민 위에 서려고 하며, 그들이 행하는 부정의는 달라진 바가 없다. 그런 면에서, 당이 주장하는 지난 백년의 성과는 어찌보면 껍데기와도 같은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중국은 아프리카에서는 중국의 발전 경험을 전수하겠다고 자랑하고, 유럽 선진국에서도 ‘큰 손’으로 대접 받는 것을 즐기며, 패권국인 미국에도 맞서겠다는 세계 제2의 강대국이었다. 그들의 정부와 당이 그렇게 선전했고 그 국민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대한 나라가 국민이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죽도록 방치하고, 세계의 공장이라면서 고작 마스크도 제대로 배급 못하며, 공식 발표라는 것이 인터넷 괴담만큼의 신뢰성을 보여준다면, 그 인민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야할까?
그런 이유로, 당-국가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퇴치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러스가 당과 인민 사이에 만들어낸 상처가 회복되기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17년 전 사스는 더 발전되고 복잡해진 중국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어떠해야할지, 정보는 어떻게 흐르고 행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후진타오는 그에 대해 불충분하지만 나름의 답을 제시했었다. 당의 절대적 영도 하에 최대한 주어지는 자유. 이 답이 옳든 그르든 어쨌든 중화인민공화국은 후진타오의 답 덕에 17년의 세월을 벌었던 것 같다.
시진핑이 접한 문제는 17년 동안 중국이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안팎으로 더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으며, 더 많은 정보가 실시간으로 오가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7년 동안 시진핑은 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을 더 강하게 막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아마 필시 모바일 시대 새로이 등장한 놀라운 신무기들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정착민과 도시민의 근원적 공포라고 할 수 있는 미생물의 공포마저 통제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하겠다. 더 커진 문제에 맞서 시진핑과 그의 수하들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까. 방향을 급선회하여 그의 전임자가 시행한 대책들을 더 크게 실시할까? 아니면, 그의 완고한 고집을 이어 더 강력한 통제책으로 미생물, 나아가 인민에 대처하려고 할까?
어떤 선택이 되든 그 선택은 바이러스 이후의 중국과 중국인, 그리고 중국과 함께 살아가야할 세계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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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역학적으로 어떻게 확산되고 국내에 어떤 여파를 미칠지 따지는 글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21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변화와 전염병의 관계에 대해 잠깐 생각한 뒤 쓴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국내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를 양산할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필자)
제목 중 ‘우한 폐렴’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수정합니다. (업데이트: 2020. 1. 31. 오후 5:32) 이유는 아래 뉴스톱 칼럼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2015년 WHO에서는 새로 발병되는 병명과 병의 원인체에 대한 명명 원칙을 새로 수립했다. (중략) 질병 이름에서 피해야할 용어는 지리적 위치, 사람 이름, 동물 또는 음식의 종, 문화, 인구, 산업 또는 직업 등이며 과도한 공포를 유도하는 단어도 배제한다.”
출처 : 뉴스톱, ‘우한 폐렴’이 아니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2019’다. (더나은사회실험포럼,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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