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일본인의 연설이 이웃나라 한국에서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신생정당 레이와신센구미(れいわ新選組)의 당수인 야마모토 타로. 평소 일본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수많은 사람이 동영상을 공유하며 공감을 표했던 건, 배우 출신인 야마모토의 뛰어난 언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야마모토 타로의 연설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어떤 불안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바로 ‘생산성’이 떨어져 언제든 탈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 어떤 사람도 평생 생산적일 수는 없다. 한국의 경우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시기는 길게 잡아야 1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까지다. 그 전후로는 좋든 싫든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야마모토 타로의 연설이 장애인과 저소득층을 넘어, 더욱더 광범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돌봄이란 사실상 ‘운명’이므로.
이젠 너무나 진부해진 말이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붕괴됨으로써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더욱 가혹한 처지로 내몰렸다. 누구나 남에게 돌봄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은, 의지할 곳이 사라진 순간 ‘비운’으로 거듭났다. 사람들은 이제 생산성이 없으면 죽어 마땅하다는 슬픈 운명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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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사회를 그만두자”
(야마모토 타로)
https://youtu.be/GEh3J6tsHfY
(연설 중에 한 청중이 “잘난 척 하지 마”라고 비난하면서, 왜 당수로서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 장애인 당원 두 명을 당선시켰느냐고 지적하자)[footnote]참고로, 야마모토 타로는 비례 3순위로, 장애인 당원은 1, 2순위로 배정됨.[/footnote]
“생산성으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고 있지 않아요?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고 있어?’
‘이 나라에 도움이 되고 있어?’언제나 그렇게 질문 받는 세상이지 않나요?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발생시키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에요.
‘죽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회는 지옥 같지 않나요? 이런 장애인 분들을 국회에 당선시켜서 생산성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세상을 바꾸는 것, 어떤 의미로 국회에 미사일을 박아 넣은 것이나 다름 없어요, 이것은. 인간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사회를 그만두자는 의미로서도 이 재능이 넘치는 두 분이 당선되어야만 했어요.
인간의 가치라는 것이 생산성으로 대변되는 그런 사회가 가속화되면, 이것은 인간이 살아 있어도 되는 기간, 기한을 정해두는 사회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에요.
‘당신은 도움도 되지 않는데 아직도 살아 있을 셈인가요?’
고령화사회가 진행되었을 때
‘뭐야, 넌 그냥 침상에 누워 있을 뿐이잖아.’
‘너 때문에 모두가 비용을 짊어지잖아.’그런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후략)”
-야마모토 타로, 재인용 출처: 유튜브 Southbound 한일TV 日韓を仲良. (정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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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민주화
이 ‘비운’을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더 견딜만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야마모토 타로는 ‘전통적인’ 해법, 다시 말해 국가의 역할 확대를 염두에 둔 듯하다. 하지만 설령 국가가 모든 걸 떠맡는다 한들, 운명의 방향을 틀 수 있을까?
여성주의 정치학자인 조안 C. 트론토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전성기 시절처럼 돌봄을 국가에 ‘외주’ 줄 경우, 필연적으로 돌봄에서 비켜난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책 [돌봄 민주주의]는 돌봄이란 국가가 일방적으로 떠맡기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대안은 무어냐, 바로 돌봄의 민주화다.
트론토는 돌봄을 ‘윤리’가 아닌 ‘관계’의 측면에서 정의한다. 돌봄은 개인의 이타심에 기반한 주체적인 선택 혹은 미덕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이상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마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돌봄은 매우 일상적이고 광범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성격이, 돌봄을 정치적 의제로 테이블에 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돌봄 민주주의의 적들
트론토는 그간 돌봄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게끔 방해해온 요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돌봄은 여성(만)의 자연스럽고 사적인 활동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이다. 아내에게 당신이 일 나가면 애는 누가 키우냐고 당연한 듯 물어보는 대한민국 남성 대다수(?)가 잘 보여주듯, 돌봄은 ‘여성’과 ‘가정’이라는 경계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돌봄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인 ‘돌봄 무임승차’는, 돌봄을 ‘가정’과 ‘여성’에 묶어둔 이러한 편견이 오랜 세월에 걸쳐 튼튼히 뿌리내린 결과다. 돌봄 무임승차란 말 그대로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가며 돌봄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리려는 행태를 일컫는데, ‘보호형 무임승차’와 ‘생산형 무임승차’가 대표적이다.
보호형 무임승차에 대한 설명으론 “여자도 군대 가라!!”는 한 마디면 충분할 듯싶다. 한국사회에서 군복무는 일종의 ‘시민권’이자, 돌봄 의무에 대한 ‘면책특권’으로 작용한다. 거칠게 말해 남성인 나는 군대에서 온갖 고생 다 했으니 이걸로 됐고, 여성인 너는 군대도 안 갔으면서 이것저것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군복무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돌봄의 범주에 들어갈 터이지만(이 점에서 저자는 급진 여성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남성들은 구태여 군복무를 돌봄에서 떼어내고 군복무를 특권화한다.
‘전선’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보호형 무임승차와 달리, ‘바깥’에 있는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남의 돌봄에 올라타는 생산형 무임승차는 좀 더 복잡하다. 작가 정지민이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에서 담담하게 적고 있듯, ‘바깥양반’ 여성이 ‘안사람’ 남성에게 난 밖에서 쌔빠지게 고생하는데, 넌 집에서 놀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며 짜증내는 상황 역시 얼마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집 밖의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구 공산권의 야심찬 기획 역시, 어떤 여성은 남의 돌봄에 무임승차하고, 어떤 여성은 이전보다 더 많은 돌봄 의무를 떠맡는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돌봄과 민주주의의 사이를 벌려놓은 세 번째 요인은 바로 1980년대부터 착착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사회라는 건 없다”는 대처의 선언(1987)[footnote]“사회라는 건 없어요.” (“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영국 잡지 ‘우먼즈 오운(Woman’s Own)’의 더글라스 키(Douglas Keay) 기자와 1987년 9월 23일 행한 인터뷰에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영국 수상인 대처가 한 말. 참고: 전체 인터뷰, 재인용 출처: margaretthatcher.org[/footnote] 이후, 개인과 가정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떠맡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돌봄은 국가는 물론이고 가장 전통적인 거처였던 가정으로부터도 떨어져나가, 점차 시장에 포섭되어갔다. 조주은이 [기획된 가족]에서 예리하게 포착했듯, 화이트칼라 여성이 아이와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신성한 돌봄’과 ‘허드렛일’을 분리하여 자신은 ‘신정한 돌봄’만 수행하고, ‘허드렛일’은 가족이나 가사도우미에게 외주를 맡기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칼라 여성이 남들의 돌봄에 전적으로 무임승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일은 일대로 하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업무 틈틈이 세심하게 가족을 돌봐야만 한다. 앞서 언급한 ‘허드렛일’의 외주화는, 임금노동과 돌봄의 이중굴레에서 허우적대는 이들 화이트칼라 여성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화이트칼라 여성이 이럴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머지 여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화이트칼라 여성이 고용한 가사도우미는 하루의 절반은 남의 집에서,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집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돌봐야만 한다.
‘돌봄복무제’를 제안한다
이처럼 저자는 가부장제와 임금노동의 신성화,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해 돌봄이 진지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지금이라도 돌봄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에 떠넘기거나 국가와 시장에 외주화하는 일 없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돌봄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로드맵이다. 트론토는 돌봄에 적합하게끔 시공간을 재조직해야한다고 주장할 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경우 남성 의무 육아휴직제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트론토가 지적했듯,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돌봄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이른바 ‘돌봄복무제’ 도입이다. 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남성들에게 군복무 말고도 돌봄이라는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신체조건(사회복무요원)이나 아주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입증해야하는 본인의 신념(양심적 병역거부)과는 상관없이, 모든 남성은 자유롭게 군복무와 돌봄복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돌봄복무를 택할 경우 유치원, 아동센터, 특수학교, 요양원, 복지관 등에서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 물론 업무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돌봄복무 기간은 군복무 기간보다 길어야 한다.
돌봄복무제는 사회복지에 들어가는 세금을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돌봄이 군복무와 동렬에 놓이게 되는 상황 그 자체이다. 앞서 언급했듯 군복무는 그간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시민권’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공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사실상 군필자(당연히 남성)에게만 부여되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남성에게 군복무와 돌봄복무라는 선택지를 주는 건, 돌봄이 군복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란 걸 보여줄 수 있는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다. 나아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군복무 역시 보다 넓은 의미의 돌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돌봄이 군복무보단 편하지 않냐고. 글쎄, 어느 쪽이 더 ‘헬’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유치원 특수반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돌보는 사회복무요원으로서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돌봄, 절대로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말 안 듣는 아이를 향해 “우유 마셔요”, “바르게 앉아요”, “정리해요” 같은 말을 백 번 넘게 되풀이하고, 잠깐 한눈판 사이에 저만치 뛰쳐나간 아이를 쫓아가고,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보면 “아이고 되다”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는 건 힘든 만큼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만일 구청이나 선관위같은 ‘꿀무지’로 배정받았다면, 나는 결코 돌봄의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한국 남성 대다수가 돌봄복무제를 통해 돌봄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돌봄이 당연히 남성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여성 역시 군복무와 돌봄복무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